74화
“아후… 벽에도 천정에도 땅바닥에도 사람들이 숨어서 막 쳐다보고 그래… 진짜 이상한 곳이야.”
걸화가 구시렁댔다.
걸윤도 벽과 천정에 은신한 자들은 알았지만, 바닥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바닥에 사람이 있는 게 말이 돼?”
걸윤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걸화의 말에 반박했다.
걸윤은 개방 내에서도 추적술이 뛰어나기로 손가락 안에 들었다.
선천적으로 걸부와 걸윤 모두 기감이 뛰어났다. 특히, 걸윤이 그랬다.
하지만, 개방의 누구도 걸화의 독보적으로 뛰어난 기감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느꼈으니 있는 게지요!”
연천을 의식한 걸화가 말을 높이며 톡 쏘아붙였다.
“아! 그리고, 거! 사람이 실수로 휘장을 좀 뜯었으면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되지 그게 뭔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벌린데?!”
걸윤이 아주 큰 소리로, 혼잣말처럼 말끝을 맺었다.
“내가 형님 대신 사과해 준거거든! 내가 수습해 준 거라고!”
걸화가 걸윤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연천은 두 사람을 놔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처음 식사를 가져온 시종이 다음부터 식사는 시간이 되면 전각 앞에 둘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건 뭐… 니들끼리 전각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우리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다는 뜻 아닌가.
실력이 있는 무인이라고 해도, 호위 무사라고 하면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했다.
호위하는 사람들끼리 합을 맞춘다거나 안면을 트거나, 꼭 알아야 하는 규칙이라도 가르쳐줘야 했다.
이런 방치에 가까운 대접은 객인에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호위 무사에게 할 것이 아니었다.
“뭔가 기분이 묘하군.”
걸윤의 말에 연천과 걸화가 그를 쳐다보았다.
“호위 무사면 무사들의 숙소로 보내야지 이리 따로 전각을 내어주는 게 영 이상하오.”
걸윤이 영친왕의 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연천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걸윤도 연천도 서로에게 직접적인 말을 피했다.
연천은 원래 말이 없었으니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고 걸윤은 혼잣말인 듯,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쳇! 이리 따로 주면 좋지! 뭐가 이상하냐!”
걸화가 걸윤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톡 쏘아붙였다.
“걸아야… 너보다 어른이다.”
연천이 걸윤에게 막말을 하는 걸화를 말렸다.
“쟤도 형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데요. 뭘….”
걸화는 자신만 말리는 연천에게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걸아야…….”
연천이 낮게 걸화의 이름을 한 더 불렀다.
“치잇!”
걸화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허!”
걸윤은 기가 찼다.
‘내 말은 그리도 안 들으면서 왜 저자는 이름 한번 부른 것 가지고 꼬리를 내려?!!’
걸윤이 코 평수를 넓혀 크게 숨을 내쉬며, 연천과 걸화를 번갈아 보았다.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맘에 안 드는 두 사람이었다.
연천과 걸화, 걸윤은 며칠 동안 꼼짝없이 영친왕의 성내 숙소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박따박 가져다주는 삼시 세끼를 챙겨 먹으면서 말이다.
호위 무사를 뽑았으면, 호위 일에 써 먹어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밥만 축내고 있으라는 건지.
걸윤은 처음부터 이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던 연천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고 걸화는 심심하다고 투덜댔다.
걸윤은 걸화가 한마디만 하면 빈정대거나 놀렸고, 성질난 걸화가 쏘아붙였다.
곧 서로 악을 써가며 싸워댔다.
연천은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는데, 말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신, 두 사람을 피해 방에서 명상을 했다.
방 밖의 고함을 새소리인 듯, 물소리인 듯 흘려들으며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작은 숙소를 울려대는 두 사람의 악다구니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둘을 피하고 소리를 흘려보내며 지낼만했는데, 딱 한 가지 그때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바로 식사 시간 말이다.
숙소 앞에 놓여 있는 식사는 세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혼자 먹을 만큼 덜어 따로 식사하기도 애매했다.
몇 끼쯤은 건너뛰어도 되기에 먹지 않겠다고 하면, 걸화가 방까지 찾아와 연천의 건강을 걱정했고 걸윤도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천의 방에서 싸워댔다.
그러니 그냥 식사 시간에 아주 잠깐이라도 방 밖으로 나가 몇 숟가락 뜨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야! 밥 삼 인분 있는 거 안보이냐? 너 혼자 그렇게 많이 먹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걸윤이 짜증을 냈다.
“그럼 너도 얼른 먹던지!”
걸화가 맞받아쳤다.
“이게 얼른 먹고 말고 할 문제냐? 똑같이 나눠서 먹어야 될 거 아니야?”
걸윤이 걸화를 노려봤다.
“그만하시오. 걸아야! 내 것까지 먹어라, 나는 되었다.”
연천이 걸윤을 말리며,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대협! 대협이 자꾸 그러니 애가 이리 버릇이 없는 것 아니오. 먹는 것을 두고 저리 자기 이익만 챙겨서 되겠소?”
불똥이 연천에게까지 튀었다.
“네가 양보해줄 것도 아니면서 형님한테 왜 난린데?”
걸화가 연천의 편에서 걸윤에게 성질을 냈다.
“네가 이기적이고 버릇이 없으니깐 그렇지?”
“너만 여기서 없어지면 아무 문제 없거든?”
“밥 먹는 거 하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네 꼴 보기 싫다는 말이잖아!”
연천은 서로에게 막말을 해대는 것을 못 들은 척 그 자리에 앉아서 뜬눈으로 명상에 빠졌다.
걸화와 걸윤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정신을 쏙 빼놓는 식사 때만 빼면, 어찌어찌 버틸만했다.
연천이 계속 이 생활을 하는 것이 맞는지 누구든 찾아가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때쯤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그들의 숙소로 찾아왔다.
영친왕의 성에 들어온 지 보름이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내일 호위 임무가 있소. 묘정 시(오전 여섯 시)부터 유정 시(오후 여섯 시)까지오. 호위 중에는 자리를 비울 수 없고 식사도 할 수 없소. 내일 아침은 일찍 가져다주겠소. 묘정시 전에 데리러 올 터이니 그리 알고 채비하시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준비한 말을 꺼내놓고 사라졌다.
“야호! 내일부터 임무다! 임무! 임무!! 나도 호위하러 간다!! 호위! 호위!”
걸화가 신이 나서 팔딱팔딱 뛰었다.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워!!”
걸윤이 걸화에게 소리쳤다.
걸윤의 말에 걸화가 혀를 날름날름 내밀며 놀려대더니, 쪼르르 도망가 버렸다.
“너 잡히면 죽는다!!”
걸윤이 걸화 뒤를 쫓았다.
“으흠…….”
연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천은 영친왕의 호위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일이 위험해서도 아니고, 번거롭거나 힘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저 두 사람 때문이었다.
저 둘과 계속 같이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연천은 천마검이고 뭐고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목소리 높은 두 사람이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싸우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야아!! 너 죽어!!”
“그럼 잡아 보시든가!! 메에에롱!”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명상에 들었다.
그것이 지금 연천이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다음날 새벽, 묘정 시가 되기 전에 찾아온 이는 위적훈이었다.
연천은 이제야 뭔가 일다운 일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걸윤은 영친왕과 위적훈을 향한 의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디서 뭘 하던 놈인지 그 신분이 불분명함에도 무림인을 호위로 쓰는 것은 그 실력 때문이다.
한데, 수실을 찾은 한 사람이 두 명을 추천한다?
추천받은 자의 실력을 어찌 믿고 호위로 뽑는다는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짓거리였다.
그렇게 뽑은 호위들의 실력을 확인하거나 훈련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전각을 내어주고 거기서 보름씩이나 썩혀둔다?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짓이 아니었다.
걸윤은 위적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위적훈은 표정도 없고, 특별한 말도 없었다.
“따라오시오.”
무표정하게 말을 끝낸 위적훈이 앞장섰다.
그 뒤를 검은 무복의 무인 두 명이 따르고, 연천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숙소를 나선 위적훈은 성의 구석에 위치한 정원을 지나, 성의 외각,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성 중심에서 떨어진 그곳은 너무 조용해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성의 곳곳을 지키고 서 있는 무인들조차 그곳에는 없었다.
외따로 떨어진 작은 전각으로 위적훈이 들어갔다.
연천 일행은 위적훈을 따랐다.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검은 무복의 무인을 따라 세 사람이 전각을 나서고 있었다.
연천 일행과 같이 뽑힌 새로운 호위들이리라.
걸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무인들을 빠르게 살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인 한 명과 젊은 무인 둘이었다.
대충 보아도 장년인의 무공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경험 또한 많아 보였다.
젊은 두 사람은 그의 제자쯤 되어 보였다.
제자를 데리고 호위 무사가 되겠다는 장년의 고수라…….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영친왕을 호위할 마음이 있는 자가 아니었다.
천마검에 관심이 있는 자였다.
장년인의 시선이 걸윤과 연천, 걸화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걸윤은 장년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찰나였지만 틀림없는 비웃음이었다.
그의 눈에 이쪽의 형편없는 전력이 같잖겠지.
이건 그 장년인 뿐만 아니라, 어떤 무인을 데려다 놓아도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걸윤 스스로도 연천과 걸화가 어디서 수실을 주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신기했으니.
장년인 일행이 나가고 전각의 문이 닫혔다.
위적훈이 전각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는 텅 빈 방의 안쪽 벽에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위적훈이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들의 임무는 유정시까지 이걸 지키는 것일세. 시간이 되면 다음 사람들이 와서 지킬 것이네. 며칠 쉬었다가 자네들 차례가 오면 또 와서 지키는 게야. 소중한 것이니 잠시도 방심하지 말게나, 아! 그리고 검에는 손을 대지 마시게.”
말을 마친 위적훈과 검은 무복의 무인들이 방을 나갔다.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 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