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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73화 (73/230)

73화

【입성!】

영친왕은 금으로 자신의 성내를 휘황하게 장식해 놓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물질인 황금은 불멸의 황권을 나타냈다.

영원한 황제의 권력.

그랬기에 황제와 황족만 금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황제는 변함없는 권력을 희원하며 황금을 마구 써댔고, 황족은 황제께 변함없이 충성한다는 의미로 금의 사용이 허가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권세 등등하고 돈이 많은 황족이라도 스스로를 낮추어 은을 사용하는 것이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용은 신성한 동물로 제왕을 상징했다.

천자를 의미하는 용을 황족이나 귀족이 사용하지 못한다는 법은 따로 없었으나, 누구도 감히 용을 사용하지 않았다.

까딱했다가는 역모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한데, 영친왕은 황룡포를 걸치고, 금을 대놓고 사용했다. 숨기는 시늉조차 없이 말이다.

이건 황제보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는 것을 떠벌리는 짓이었다.

영친왕은 황제의 삼촌으로 황제가 어릴 때부터 그를 대신해 대리청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권력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수많은 제상과 신하들, 심지어 황제도 영친왕성의 이 유난한 장식을 봤겠지만,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허수아비 황제 편을 들어서 무슨 득이 되겠는가?

황제도 목숨 부지하려면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검은 무복 무인의 안내로 도착한 방은, 웬만한 객잔 하나가 통 채로 들어가고 남을 만큼 커다란 공간이었다.

성안의 방 하나였지만,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실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방의 제일 안쪽에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보일 정도로 높은 계단 꼭대기에 크고 화려한 금빛 용교의가 놓여 있었다.

계단에도 금색의 수를 놓은 호화로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연천은 금으로 된 용이 튀어나올 듯 조각된 넓은 벽면을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걸화는 촌티를 팍팍 내는 연천을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걸윤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넓은 실내, 저 멀리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도 호위 무사 시험에 통과한 다른 무인들이리라.

잠시 뒤, 검은 무복의 무인이 또 다른 세 명의 사내를 방으로 안내했다.

앞선 사내는 무인이라기보다 상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렸다.

화려한 의복을 입고 불룩 나온 배를 한껏 내밀며 들어왔다.

그 사내를 호위하는 것 같이 보이는 두 명의 무인이 뒤를 따랐다.

두 무인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경장 차림이었지만 두 눈은 무섭도록 매서웠다.

검은 무복을 입은 무사의 안내에 따라 넓은 방 안으로 몇 명의 무인 무리가 더 들어왔다.

멀리서 서로를 관찰했지만, 말을 걸거나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걸화는 함께 일을 하게 될 사람들과 통성명을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했고, 연천은 벽면에 드리워진 가느다란 금빛 실로 짠 휘장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걸윤은 무인들을 하나씩 살피며 그들의 무공과 경험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했다.

무인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 서로의 전력을 살피는 것은 당연히 필요했다.

내 편이건 아니건 누가 더 강한지는 중요했다.

그리고 겉으로야 영친왕을 위해 모인 것이지만, 언제 무슨 일로 등을 돌릴 일이 생길지 몰랐다.

호위 무사로 온 이들 중에 태반은 천하제일 검이라 불렸던 혈영천마의 천마검, 영친왕의 수중에 있는 그 검이 궁금해 성으로 들어온 것일 테니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조용하지만 매서운 시선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넓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딱 두 사람만 빼고.

연천은 신기한 듯 눈을 끔뻑이며 금색 벽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검지를 들어 문질러 보았다.

“하아암…….”

기다리기 지루한 걸화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걸윤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성에 들어오면 절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던 다짐이 아주 간단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둘을 쳐다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대체 이곳에 뭐 하러 왔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자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잠시 생각했다.

“흐음…….”

한숨만 나왔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찐득하고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백연천과 배걸화라는 늪에…….

잠시 뒤, 위적훈이 검은 무복의 사내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위적훈은 높다란 계단 아래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뒤 영친왕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앞쪽으로 와서 예를 갖추어주십시오.”

위적훈의 말에 넓은 방에 흩어졌던 이들이 계단 아래로 모였다.

가까이 선 무인들의 시선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넓고 고요한 실내에 무인들의 소리 없는, 기 싸움으로 공기가 따가웠다.

실제로 살기를 뿜어대는 자도 있었다.

걸윤도 자신보다 위라고 판단한 몇 사람을 살피며, 맞대응할지 말지 고민했다.

칼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 누군가 무기를 뽑아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무림인들이라는 작자들이 이랬다.

서로가 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항상 바닥에 깔린 인간들이었다.

위적훈과 검은 무복의 무인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모른 척했다.

조용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 쫌!!”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오가던 살기와 긴장감이 빠르게 걷혔다.

모여 있는 이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윤도.

걸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연천을 쏘아보는 걸화와, 민망한 얼굴을 한 연천이 서 있었다.

“내가 촌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조심성 없이 그게 뭐예요!”

어찌할 바 모르는 연천의 손에 얇은 금색 휘장 조각이 들려있었다.

신기해서 만져보다 뜯긴 모양이었다.

“거! 입 좀 다물라니까요!”

걸화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입을 오므리는 연천이었다.

“으흠…….”

걸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걸화는 숲속에서 산적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를 기억했다.

걸화의 실수(?)를 연천이 사과하고 일을 수습했던 그 일을 말이다.

그때, 연천이 참으로 믿음직스러웠고 듬직했다.

그가 좋은 일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행이라면 무릇, 서로의 실수를 함께 수습하고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마친 걸화가 위적훈 앞으로 다가갔다.

무인들의 시선이 모두 걸화에게 향했다.

걸화가 진지하게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 형님이 촌에서만 살아 아는 게 너무 없어, 그만 실수를 하였습니다.”

걸화의 말에 위적훈이 눈을 깜빡였다.

위적훈은 무림의 고수 출신으로 현재 영친왕의 최측근인 호위대장이었다.

영친왕이 선대 황제의 부인인 선대 황후를 제거할 때 앞장섰고, 그 황후의 집안과 측근을 없앨 때도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의 손에 피 묻힌 사람 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 수백을 순식간에 제거하고, 목숨 걸고 영친왕을 지켜냈던 그가 당황했다.

이 방에는 수많은 제상과 신하들은 물론이고, 죄인과 형틀을 맨 죄수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다녀갔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온 방이 순금으로 발렸으니 오다가다 실수로 흠을 낸 자가 있기도 했겠지만, 단 한 번도 저렇게 대놓고 죄송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모른 척 조용히 지나가지, 왜 그걸 밝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는가?

위적훈은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거… 뭐… 괜찮지 않겠소…….”

칼날처럼 차갑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위적훈이 당혹감을 누르며 적당히 대꾸했다.

걸화가 깊이 고개 숙여 말했다.

“고맙습니다.”

걸화는 연천의 실수에 자신이 나서서 사과하고 처리한 것이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흐뭇한 얼굴로 연천에게 다가갔다.

연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멍하게 서 있는 그를 위로했다.

“형님, 괜찮아요. 내가 대신 사과했어요.”

실내에 있는 무인들 사이에 어수선한 기운들이 오갔다.

‘이… 뭐… 이런…….’

걸윤은 연천과 걸화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두 사람이 자신을 모른 척, 무시하는 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 계단 꼭대기 옆으로 난 문이 열렸다.

밝고 고급스러운 장포를 걸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내는 용교의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영친왕께서 나오십니다.”

묵직하게 말을 내뱉은 이는 영친왕의 모사 좌사종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좌중은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며 반듯하게 섰다.

아래를 둘러보던 좌사종이 안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영친왕이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걸친 금색 장포가 바닥에 길게 끌렸다.

영친왕이 익숙하게 황금 교의에 앉자, 뒤따라온 시녀들이 영친왕의 의복을 정리했다.

영친왕은 교의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아래에 도열한 무인들을 천천히 살폈다.

영친왕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영친왕께 호위대장 위적훈과 새로 영입된 호위 무사들이 인사드립니다.”

위적훈이 크게 말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위적훈 뒤에 죽 늘어서 있던 새로운 호위 무사들이 눈치껏 따라 무릎을 꿇었다.

연천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영친왕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흐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아주 소중한 물건이 있으니, 그대들이 지켜주어야겠다. 그대들에게 기대가 크니 성심을 다하도록 하라.”

영친왕이 간결하게 말했다.

짧게 말을 끝낸 영친왕의 눈빛은 무릎을 꿇은 이들의 머리통 하나하나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영친왕의 말이 끝나고 냉랭한 시선을 보내는 동안에도, 모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다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영친왕이 갑자기 고개를 젖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대들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군. 훌륭해, 아주 훌륭해.”

말을 뱉고는 일어서서 들어왔던 문으로 사라졌다.

모사 좌사종과 시녀들이 그의 뒤를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영친왕이 사라지고 한참 후 위적훈이 일어섰고, 그 후 새로운 호위 무사들이 따라 일어났다.

걸화는 마음에 안 드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연천 일행은 검은 무복의 무인이 안내한 그들의 숙소로 들었다.

영친왕의 성에서 전각 하나를 일행의 숙소로 따로 내어 주었던 것이다.

“이게 호위 무사의 숙소라고? 이건 손님의 숙소지! 영친왕은 호위 무사를 이리 떠받들고 사는가?”

걸윤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담한 마당이 딸린 전각이 크지는 않았지만, 호위무사에게는 과분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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