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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71화 (71/230)

71화

‘그저 물러터진 성격이라 누가 부탁을 해도 들어줬을라나? 내가 자신보다 무공이 강하니 무서워서 그랬을까? 잘난 척을 하고 싶었던 걸까?’

걸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흠…….”

연천이 묵직한 표정을 지었을 뿐, 대답이 없었다.

“…….”

걸윤은 연천이 무슨 말이든 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걸화였다.

“형님… 나도 궁금해요. 왜 그랬어요?”

연천 덕분에 저 오라비라는 놈이 영친왕의 성에까지 쫓아오게 생겼다.

생각만 해도 짜증 났다.

걸화의 물음에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깟 수실 하나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을 하는 연천의 눈은 아무것도 없는 탁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걸화는 피가 낭자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섬뜩하고 끔찍했다.

그들을 그리 만든 자들이 자신들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저자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너와 내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저자는 어찌 피한다고 해도 우리가 수실을 가진 걸 눈치챈다면 다른 무인들이 공격해 올 것이고, 너와 내가 어찌 될지 장담하지 못하겠더구나. 그래서 그리하였다.”

연천이 여전히 걸윤은 무시한 채, 걸화에게 말했다.

연천이 말하는 저자가 바로 걸윤이었다.

연천의 말을 다 들은 걸윤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정말 그리 나쁜 생각은 없었소. 호위 무사가 되어 부나 명예를 얻을 마음도 없소. 그저 사정이 있어 합류하려 했던 것이오.”

“알겠소.”

연천이 걸윤을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소심한 표현이었다.

“아우가 있소.”

걸윤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걸화가 걸윤을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여기서 자신을 누이라고 밝히기라도 하면, 오라비고 뭐고 이판사판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걸윤은 걸화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무공도 못 하는 아이가 어찌어찌 영친왕의 호위 무사가 될 모양이오. 얼굴만 마주했다 하면 싸우는 녀석이라도 걱정이 되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소. 나는 무림이 얼마나 비정한 곳인지 알고 있소. 그렇기에 그 아이를 지키고 싶소.”

걸윤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흠… 알겠소, 그만 앉으시오.”

연천의 좀 더 진정성 있는 대답이었다.

자리에 앉은 걸윤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는데, 연천이 호리병을 받아 들어 걸윤의 잔을 채웠다.

“으음… 고, 고맙소.”

걸윤이 연천에게 주저주저 겨우 말했다.

얼빵이, 머저리, 생각 없는 놈이라 실컷 욕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에.

걸화는 입을 삐죽댈 뿐 뭐라 말하지 않았다.

“존함이 어찌 되시오?”

연천이 걸윤에게 물었다.

“배…….”

걸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는데, 걸화가 끼어들었다.

“배윤이래요!! 배윤!! 아까 들었어요!”

걸화가 고함을 치며 걸윤의 말을 막았다.

연천과 걸윤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걸화를 쳐다보았다.

“음… 음…….”

걸화도 자신이 좀 과했다 싶었는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걸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도록 둘 수 없었다.

연천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배걸아, 배걸윤은 의심할 만했다.

“백연천이라고 하오.”

“배걸아예요.”

걸화가 걸윤을 째려보며 말했다.

걸윤은 장난기 어린 눈을 가늘게 뜨고 걸화를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묵직한 분위기 속에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끝끝내 오리구이도, 오리구이를 만들러 간 주방장과 점소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 * *

연천은 언제나 일어나는 그 시간에 눈을 떴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자신의 몸 한 부분과 같은 검을 가지고 객잔의 뒷마당으로 내려갔다.

손님 없는 객잔의 뒷마당 또한 조용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검집을 쓰다듬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검을 빼어 들었다.

깨끗하고 맑은 검이 자신을 드러냈다.

가볍게 내리치고, 옆으로 베고 방향을 바꾸어서 베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고 찌르고…….

단순한 동작을 우직하게 반복했다.

이 층의 작은 창문으로 연천을 내려다보는 이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는 조용히 연천을 응시하고 있는 걸윤이었다.

걸윤이 본 연천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수련했다.

자세도 좋았다. 하체가 단단하고 힘이 있어 흔들림 없이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검로이지만, 정확하고 예리했다.

아마 저 동작을 셀 수도 없이 반복했으리라.

돌아가신 스승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스승이 계시긴 했던 모양이었다.

스승이 저 간단한 동작을 가르치고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스승의 실력도 저만큼이든지 어쨌든 배운 것이 딱 저기까지인 것 같았다.

손에 익은 하초가 낯선 절초를 이긴다고는 하지만 무림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저 단순한 초식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걸윤은 저 성실하고 우직하기만 한 사내가 안타까웠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면, 제법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는 저 답답한 사내, 백연천처럼 단순하고 우직한 게 크게 도움이 될 테니깐.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걸윤의 머릿속에 한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걸화의 스승이었던 장자방이었다.

장자방이라면 연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걸윤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왜 저자를 도와?’

장자방이 나타나면 걸화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힐 것이다.

걸윤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스승을 만나고 기연을 얻고, 또 별 볼 일 없는 자의 한칼에 죽어 나가는 것 모두 자기 팔자이고 복이었다.

안타깝지만, 연천의 무공에 대한 운은 딱 저기까지 인가보다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수련하는 연천을 유심히 관찰했다면, 연천의 검을 따라 언뜻언뜻 흐릿한 기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연천이 끊임없이 수련 중인 보이지 않는 검강이었다.

주변이 어둡기도 했지만, 사람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다.

걸윤에게 연천의 수련은 눈에 보이는 딱 그만큼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저 성실한 사내가 가여웠고 같은 무인으로서 안타까웠다.

한편으론 저들 일행에 합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합류한 게 맞겠지?

연천을 관찰하던 걸윤은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무공을 배우는 초기에는 내공보다는 외공과 체력단련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쏟지만, 체력이 강해지고 외공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가면 내공과 명상 수련에 집중한다.

매일같이 저렇게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아직 햇병아리라는 증거라고 걸윤은 생각했다.

한참 뒤, 시끄러운 소리에 뒷마당을 내다보았다.

연천과 걸화가 함께 있었다.

걸화는 머리카락과 얼굴이 홀딱 젖은 꼴로 비도를 던지며 깔깔대고 있었다.

걸윤은 즐거움에 겨워 웃어대는 누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개방에서 좀체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걸윤 앞에서는 묵직하고 진중하던 연천도 걸화처럼 웃었다.

“으흠…….”

걸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 지켜본 연천은 답답하도록 우직하고, 바보 같도록 순수한 사람이었다.

무림에서 칼 맞아 죽기 딱 좋은 녀석이었다.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꼬박꼬박 복수하는 걸화 또한 무림에서 길게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성질머리를 갖고 있었다.

‘저 불안한 둘의 조합으로 용케 죽지 않고 돌아다녔구먼…….’

걸화도, 연천도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걸화는 어찌 저리도 자기와 똑같은 녀석을 찾아냈는지…….’

걸윤은 종이와 붓을 찾아 서찰을 써 내려갔다.

총타에 계신 아버지와 형님에게.

* * *

연천 일행이 파월산을 내려간 이틀 뒤, 파월산의 거친 폭포 한가운데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기막을 두르고 있어,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데도 그의 몸에는 물 한 방울 닿지 않았다.

진한 남빛 무복을 입은 사내의 눈썹은 짙고 강렬했다.

눈썹 아래에 빛나는 안광은 딱 무인의 그것이었다.

어깨가 넓고 장대한 골격은 가만히 있어도 위압감을 발했다.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큰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었다.

망설임 없이 파월산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산 외곽의 작은 굴이었다.

굴 안에는 다섯의 사내가 모여 있었다.

사내들은 걸어오는 덩치 큰 사내를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통 사람들보다 키가 한 척은 더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는 마교의 혈풍대주(烕風隊主)로 있는 청마(靑魔) 마철용이었다.

마철용을 기다리는 이들은 혈풍대(烕風隊)의 부대주 흑수(黑手) 소강과 혈풍대 소속 단원 네 명이었다.

영친왕의 호위 무사를 뽑는다는 방이 붙기도 전, 천마검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문에 마교 전체가 들썩였다.

교주 상관량은 말할 것도 없고, 마교 전체가 그 검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에 찬동했다.

그들의 생각은 똑같았다.

천마검은 마교의 것이었다.

영친왕이건 황제건, 무림의 어느 문파에건 내어줄 수 없었다.

무조건 마교로 다시 가지고 와야 했다.

마교에서 천마검을 회수하기 위한 작업을 준비했다.

성이 워낙 크고 방비가 잘 되어 있어, 성에 대해 잘 아는 자를 찾아 잠입할 계획을 세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영친왕이 호위 무사를 뽑는다는 방이 붙었다.

소문에는 천마검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무사를 선발한다고 했다.

천마검을 노리는 마교로서는 이리 잘된 일이 또 없었다.

마철용은 이 일에 자원했다.

전대 천마인 혈영천마를 경애하는 마철용으로서는 이 일을 꼭 직접 하고 싶었다.

교주 상관량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허락했다.

마교 내에 마철용을 따르는 자가 많아 경계하긴 했지만, 실력 면에서는 그만한 자도 없었다.

일단은 천마검부터 찾고 봐야 했다.

손에 천마검이 들어오기만 하면, 상관량은 진짜 교주가 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반쪽짜리가 아니라.

상관량은 마철용을 영친왕의 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녀석들을 따로 보냈다.

누구든 상관없었다.

천마검을 자신 앞에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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