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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69화 (69/230)

69화

연천이 스승님께 배운 무공이라는 것이 그랬다.

같은 동작을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야 했다.

스승님이 하는 이야기들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복해서 몸을 단련하는 것과 같이, 반복해서 머리 한편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연천은 스승님이 했던 말 하나하나를 머리에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연천을 바라보는 걸윤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근성은 있구만. 그래도 지금부터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그 순간, 진한 피 냄새가 확 끼쳐왔다.

수련 중이던 연천이 동작을 멈추었다.

걸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의 향이 나는 곳으로 뛰었다.

앞서 걸음을 옮기던 연천이 걸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걸아… 내 아우를 좀 부탁합니다.”

연천이 걸윤에게 걸화를 부탁하고,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걸윤은 주제 모르는 녀석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피 냄새가 난다는 것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뜻이었다.

무림 경험도 부족하고 무공도 별 볼 일 없는 자가 달려가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오, 그대가 아우를 살피시오. 저쪽은 내가 가 보겠소.”

연천을 지나치며 걸윤이 다리에 힘을 실어 달렸다.

연천이 걸화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걸윤이 도착한 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한 명은 어두운색 경장 차림의 사내이고, 한 명은 파란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두 사람 모두 난도질을 당해 피가 낭자했다.

걸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사이 연천과 걸화가 달려왔다.

걸화가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연천이 급하게 달려와, 바닥까지 피가 흐르는 경장 차림의 사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맥을 짚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를 옮겨 파란 무복 사내의 맥을 짚었다.

연천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이자는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파란 무복 사내의 혈을 눌러 지혈을 했다.

“걸아야! 조명탄을 쏘아 올리거라.”

서둘러서 말하고 두리번거리더니 저 멀리 뛰어가서 잎이 둥글둥글한 식물을 양손 가득 뽑아왔다.

그 사이 걸화가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연천은 뽑아온 식물을 대충 짓이겨 파란 무복 사내의 상처 위에 올렸다.

핏물로 뒤덮인 사내의 상처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연천은 피를 대충 훑어내고 식물을 올렸다.

무언가에 찔린 듯한 상처는 생각보다 더 많았다.

연천은 다시 풀을 뽑아와서 짓이겨 올렸다.

쉬지 않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사내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 잔뜩 긴장한 연천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형님! 풀 더 뽑아와요. 내가 찧을게요.”

걸화의 말에 연천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다시 달려갔다.

걸화는 연천이 하던 대로 풀을 빻았다.

잠시 후, 연천이 다시 풀을 양손 가득 뽑아와 같은 작업을 계속했다.

걸윤은 연천이 상황을 판단하고 일을 처리하는 순서와 속도에 놀랐다.

개방 방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전국의 거지들이랑 뒹굴며 볼 것 안 볼 것, 알아서 좋을 것 나쁠 것까지 다 보고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잔인하게 난도질 된 시신을 보고 당황했다.

보자마자 시신이라 생각했었다.

살아있는지를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딱 봐도 격렬하게 저항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상대는 빠르게 처리해야 했고 저항하니, 마음이 급해 저리 되는대로 처리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했음에도 당연히 죽었다 생각했다.

연천이 아니었다면 그냥 시신이라고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걸윤이 고개를 들어 연천을 보았다.

연천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연천과 걸화를 보던 걸윤도 걸화를 도와 잎이 둥근 식물을 찧어댔다.

걸윤은 약초니, 식물이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연천이 아는 척하며 하는 일이니 돕는 수밖에.

걸윤이 걸화를 대신해서 찧은 식물을 사내의 상처에 올렸다.

뭔지 모를 풀때기를 찧어대면서, 슬그머니 의심이 생겨났다.

‘저자가 이 식물이 뭔지 제대로 알기는 하겠지?’

워낙 백연천이라는 사람을 개무시하고 있는 터라, 그런 생각이 쬐끔 들기는 했다.

상처에 약초라고 추정되는 것을 올리는 작업이 거의 끝날 때쯤, 위적훈과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위적훈이 쓰러진 두 사내의 목동맥을 짚은 후, 검은 무복의 사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내들은 쓰러진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날듯이 사라졌다.

“어찌 된 일입니까?”

위적훈이 땀과 피로 물든 연천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

말주변이 없는 연천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보여준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한참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걸윤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피 냄새가 나서 달려왔고 도착했을 때의 상황, 그 뒤에 연천이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까지 제법 자세하게 말했다.

위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윤의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그리 놀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당연시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위적훈이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연락을 주어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시험 중이니 계속 임해주길 바랍니다.”

말을 끝낸 후, 가볍게 포권을 하고 날듯이 사라졌다.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죽기 직전이었다.

연천이 보기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임에도, 위적훈은 그저 일상인 듯 가볍게 말하고 사라졌다.

범인을 잡을 의지 따위는 아예 없었다.

연천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옷 아래에 수실이 만져졌다.

수실을 얻기는 했지만 ‘저런 자들이 일하는 영친왕의 성에 들어가는 게 옳은 생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연천이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형님! 괜찮아요?”

걸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다, 피를 좀 씻고 어서 내려가는 게 좋겠다. 여기 더 있다가는 좋지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했지만, 연천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그들이 물고기를 잡았던 웅덩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연천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걸화였다.

걸윤은 걸화가 걱정되었다.

거지꼴을 하고 거지들 속에서 제멋대로 자라긴 했지만, 개방 내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였다.

험한 꼴은 안 보고 살았다.

걸화가 험한 꼴을 만들기는 했지만…….

암튼, 어린 누이가 놀라지 않았을까 염려되는 것이 당연했기에 걸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입을 열었다.

“야! 이런 꼴 보고 내려갈 걸 시험은 왜 응시했냐? 그냥 속 편하게 객잔에서 쉬지.”

걸화가 걱정이 되어서 한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걸화와 얼굴을 마주하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거기다 지금 상황이 답답하지 않는가?

애초에 저 정도 배포를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 잘못이지.

무림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건 아주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호위 무사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정말 호위가 되면 이보다 더한 꼴을 볼지도 몰랐고 당할지도 몰랐다.

대체 왜 이런 되지도 않은 짓을 자초하는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는커녕 짜증만 났다.

당최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우린 볼일 다 봐서 내려가는 거야!”

걸화가 연천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걸윤에게 쏘아붙였다.

“뭔 볼일? 생선 잡아먹는 거? 그래, 니들 덕에 파월산 생선이 씨가 말랐겠더라.”

걸윤이 빈정댔다.

“에잇, 쯧!”

걸화가 눈을 부라리며 혀를 찼다.

제대로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연천의 눈치를 보며 꾹꾹 참고 있었다.

“야! 대체 너랑 저놈이랑 머리에 뭐가 든 거냐?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하는 거야? 나도 무인이야, 무림에 쌔고 쌘 저런 인간들 잘 안다고. 저런 주제도 모르는 놈이랑 다녀봤자 너만 위험해.”

걸윤은 답답한 마음에 또 같은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도저히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우리 형님 욕하지 말랬지!”

걸화는 앞서가는 연천과 거리를 벌리며 속삭이듯 으르렁거렸다.

작게 말하는 것 자체가 성에 안 차고 답답했지만, 걸윤이 자신의 오라비인 것을 절대 연천에게 들킬 수 없었다.

연천은 자신이 오갈 데 없는 거지인 줄 알고 동행으로 받아 준 것이었다.

이런 사지가 멀쩡(?)한 오라비가 있는 걸 알면, 걸윤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날지도 몰랐다.

절대! 그것만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욕하는 게 아니고 현실을 보라고 그러는 거야! 무공도 별 볼 일 없는 놈이 널 이런 위험한 곳에 끌어들였잖아! 그리고 피 좀 봤다고 저 얼빠진 표정을 봐라.”

걸윤의 입장에서는 아주 타당한 이야기였다.

“무공이 별 볼 일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성질이 머리끝까지 오르는데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하니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만 모르는 거지, 무공을 익힌 자들끼리는 보면 알아!”

걸화보다 걸윤은 침착했다.

이상하게 걸화가 성질을 내면 낼수록 걸윤은 침착해졌다.

그리고, 기분도 좀… 좋아지고.

“아휴! 암튼 넌 신경 쓰지 마! 호위 무사 뽑는 것 구경한다면서 구경이나 실컷 해! 나 좀 내버려 두고.”

걸화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다.

“어찌 내버려 두냐? 이리 머저리 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데, 여긴 뭣 하러 왔어? 못 볼 꼴만 보고 갈 거면서.”

걸윤이 참고 있는 걸화의 성질을 벅벅 긁어댔다.

“뭣 하러 오긴 뭣 하러 와! 호위 무사 시험 치러왔지!”

“하! 그런 주제에 피 좀 봤다고 포기하고 내려가? 어떤 놈인지 안 봐도 뻔하다!”

“포기하긴 누가 포기해!”

“그럼 뭐 수실이라도 찾았다는 게야!”

“그래, 찾았다.”

걸화가 이를 꽉 깨물고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수실 때문에 피를 본 것일 게다.

함부로 크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뭐?”

걸윤이 뻥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찾았다고, 수실”

걸화가 여전히 이를 꼭 깨물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걸화의 앞을 막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걸화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한 표정으로 걸윤을 흘겨보고는 연천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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