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걸화는 몸을 웅크렸다.
세상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무(無)와 같은 어둠 속에서, 제발 이 모든 것이 끝이 나기만을 빌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흐르던 눈물도 말라버렸다.
깜깜하고 고요하고 서늘했다.
귀신도 괴물도, 벌레도 코앞에 있을지는 몰라도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려움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겁에 질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것은 자신이 연천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눌려 있던 연천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자,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밀친 연천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고, 연천이 자신을 밀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연천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사실 다른 방도가 없기도 하고.
조용히 어둠을 향해 집중했다.
연천이 느껴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스윽, 샤악―
가볍고 작은 움직임과 옷을 털어내는 것 같은 마찰음이 들렸다.
걸화는 귀와 자신의 기감에 더욱 집중했다.
이건… 두 사람이 얽혀 싸우고 있었다.
스르릉―
누군가 검을 빼어 들었다.
스릉―
다른 편에서도 검을 빼어 들었다.
쓰윽―
가벼운 움직임
휘익―
칼로 베는 소리
쓱―
빠른 움직임
휘익―
걸화의 기감이 따라잡기 어렵게, 작고 가벼운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챙―!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아주 잠시, 찰나의 순간 빛이 번쩍이다 사라졌다.
털썩―
다시 묵직한 고요가 찾아왔다.
누구의 움직임도 없었다.
한쪽이 쓰러진 모양인데, 그게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쓰러진 이가 연천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연천이 쓰러진 것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밀려오며,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댔다.
어둠 속의 고요함이 견딜 수 없이 무겁게 압박해 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소리 나지 않게 이를 꽉 깨물었다.
연천이 쓰러진 것이라면 일단 들키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연천을 구하고 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몸에 힘을 꽉 주고 작게 말아 웅크렸다.
잠시 후, 검으로 은은하게 빛을 밝힌 연천이 걸화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으냐?”
“흐… 너무 무서웠어요.”
걸화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콧물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이제 괜찮다.”
연천이 토닥여주자 걸화의 마음이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한참 뒤, 걸화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수실은요?”
“아!”
연천이 동작을 멈추었다.
“에이그, 그걸 먼저 빼왔어야죠.”
걸화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연천 뒤에 쓰러진 검은 무복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뛰어가서는 검집에 매여있는 수실을 빼어 가지고 와, 연천에게 내밀었다.
“네가 가지고 있거라.”
연천이 수실을 받지 않고 말했다.
“누가 뺏으려 하면 어찌해요? 나보다는 무공이 센 형님이 가지고 있어야지.”
걸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연천이 수실을 받아 깊숙이 챙겨 넣었다.
“얼른 나가요. 무서워 죽겠어요.”
걸화가 연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저자는 저리 두고 가도 돼요?”
걸화가 쓰러진 검은 무복의 사내를 보고 물었다.
“잠시 기절한 것이니 괜찮을 것이다.”
연천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럼 빨리 나가요. 너무 무서워요.”
연천이 미소 지었다.
걸화가 익숙한 동작으로 연천의 등에 매달렸다.
* * *
걸화는 무슨 일을 해도 정도가 지나치게 적극적인 면이 있었다.
중요하고 큰일뿐 아니라,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도 말이다.
특히,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전투적이었다.
먹고 남도록 음식이 쌓여있어도 일단 달려들어서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먹는 것이 그리 중하다, 생각하지 않고 소극적인 연천이 보기에는 참으로 신기했다.
희한하게, 별 볼 일 없는 음식도 걸화가 먹는 것을 보면 그리 맛있어 보였다.
연천은 물끄러미 걸화를 쳐다보았다.
“그리 맛있느냐?”
연천이 물었다.
“당연히 맛있죠, 형님이 구워준 생선인데. 형님… 음식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 구워준 토끼도 그랬고, 전에 끓인 죽도 그렇고… 혹여 식당 할 생각 없어요?”
걸화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
연천이 대답 없이 웃었다.
“식당 하면 나 점소이 시켜줘요! 맨날 맨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너무 좋겠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생선을 크게 한입 물고 뜯었다.
생선에 붙은 검댕이 걸화의 얼굴에 묻었다.
“네가 점소이면 식당에 남아나는 것도 없겠다.”
연천이 또 웃었다.
그리고, 걸화를 따라 생선 들고 뜯었다.
“핏! 치사해.”
연천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입으로 욱여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 가고 있는 시각이었기에,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볕의 기운을 잃은 산에는 쌀랑한 바람이 불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져서 달빛을 받는 한밤보다, 이 시간이 더 춥게 느껴졌다.
하루 중 가장 고독하고 쓸쓸한 기운이 스미는 때였다.
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데가 있었다.
연천과 걸화는 생선을 잡은 웅덩이에서 멀지 않은 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다.
제법 크게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로 과하다 싶게 많은 생선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흠뻑 젖었던 옷을 말리고, 따뜻한 불가에서 배를 채우는 걸화의 얼굴은 만족스러웠다.
걸화가 우악스럽게 생선을 뜯는 모습을 보는 연천도 흡족했다.
혼자 하던 간단한 야숙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천의 야숙은 간소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휴식이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걸화와 함께 하는 이 야숙은… 커다란 모닥불과 넘치는 음식, 옆에서 재잘대며 웃어주는 걸화가 있는 야숙은… 따뜻하고 포만감 있고 즐거웠다.
산과 동화되어 차고, 마른 땅에서 느끼는 편안함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연천은 생소한 충만함을 느끼며, 얼굴에 검댕이 묻어도 신경 쓰지 않고 생선을 뜯었다.
괜스레 더 즐겁고 맛있고 재미있었다.
* * *
걸윤은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쓰며, 그 굼벵이들이 갈만한 반경을 넘어서까지 샅샅이 뒤졌다.
없었다.
정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살랑살랑 걷는 걸음으로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니고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닐 텐데 작은 단서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야생 동물도 버글거리는 이 숲속에서 그 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허기진 산짐승의 저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짐승의 밥이 되었다면, 핏자국이나 하다못해 신발 한 짝이라도 바닥에 뒹굴 법도 한데 전혀 없었다.
무력감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은 심정으로, 처음 그들을 놓쳤던 곳으로 걸어가던 걸윤은 폭발할 것 같은 울분이 치밀었다.
언제 사라졌냐는 듯, 웅덩이 근처에서 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있는 연천과 걸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어휴우!!”
걸윤이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연천의 멱살이라도 되는 듯이 양손으로 꽉 쥐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길게 들어가 박히며, 나무 기둥 가운데 열 개의 구멍이 움푹 파였다.
걸화에게 생선을 내밀며 웃는 연천의 뒤통수를 한 대만 후려갈기면 화가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걸윤은 애꿎은 나무를 후려쳤다.
내공을 싣지 않은 터라, 나무에 손바닥 모양만 깊이 패일 뿐이었다.
죄 없는 나무에 수많은 자국을 남기고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기운도 없고 배도 고팠다.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걸윤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생선을 뜯고 있는 연천과 걸화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연천과 걸화는 그들 곁으로 다가온 걸윤을 올려다보았다.
“몹시 시장해서 그런데 남는 생선이라도 있으면 좀 얻어먹을 수 있겠소?”
걸윤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모닥불 옆에 꽤 오래 있은 듯, 후끈하게 열 오른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두 사람을 찾으러 다닌 걸윤은 억울했다.
생선 기름과 검댕이 묻은 포만감 가득한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내리눌렀다.
걸화가 걸윤을 향해 눈을 부라며 욕을 해댔다. 눈으로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좀 가라앉았다.
걸윤을 보는 연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낯이 익습니다. 혹여 우리가 만난 적이…….”
걸화가 냉큼 연천의 생각과 말을 잘랐다.
“아이구 참! 형님도! 형님이 쟤를 아니, 저 사람을 어디서 봤겠어요! 형님 보기보다 눈썰미 되게 없어요. 사람이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다 비슷해 보이는 경향이 있어요.”
걸화가 손짓, 발짓까지 해대며 과장되게 말했다.
“그러냐…….”
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저 사람 다리 아프겠네.”
걸화가 아직 서 있는 걸윤을 보고 말했다.
“아! 이쪽으로 앉으시오. 생선이 많소. 제 아우가 워낙 식욕이 왕성한지라… 부담 갖지 말고 많이 드시구려.”
연천이 걸윤에게 말했다.
걸윤은 웃는 연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인간은 뭔데 남의 아우를 자기 아우래!’
누이도 아니고 아우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게 더 편한 걸윤이었다.
속마음을 숨기고 연천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연천이 미소 띤 얼굴로 잘 익은 생선 꼬치를 내밀었다.
딱 뒤통수 한 대를 갈기고 싶은 그 표정으로.
“점심때도 저 웅덩이에서 생선을 잡아먹었소. 씨알 굵은 물고기가 제법 있더군요. 맛도 나쁘지 않으니 드셔보시오.”
연천이 편하게 말을 붙였다.
“네…….”
걸윤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물고기에 환장 한 놈 같으니라고, 이곳까지 와서 물고기 타령이나 하고 앉아있다니.
넓은 파월산 전체가 시험 장소였다.
가끔 작게 불을 피운 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이 흔적 없이 밤을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싸움에서건 적은 알되, 나를 알리지 않는 것이 이기기 위한 초석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한데, 이놈은 이곳에서 마을 잔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커다랗게 불을 피워놓고 둘이 먹는데 아주 파월산의 생선 씨를 말릴 작정으로 물고기를 잡아다 놓았다.
‘어휴우…….’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배걸화만큼이나 이상하고 제멋대로인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