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걸윤은 걸화가 잘 있는 것만 확인하고 자신의 길을 나설 참이었다.
잡아가지 않을 테니, 개방에 한 번씩 연락하라는 말과 실력 있는 개방도 몇을 몰래 붙여놓고 말이다.
걸윤은 어릴 때부터 개방의 분타로 심부름을 오가며 무림을 나다니긴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무림행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걸윤에게도 의미 있고 중요한 시간이었다.
한데, 걸화를 찾으러 다니느라 몇 달을 허비해 버렸다.
걸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해주고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이 객잔도 걸윤이 걸화를 위해 꽤나 신경 쓴 것이었다.
언제 또 볼지 모르는 누이를 위해 걸윤이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연천와 걸화가 묵고 있는 곳은 개방 소유의 객잔이었다.
무인들이 버글거리는 성도에서 걸화만을 위해 비워놓은 것이다.
걸화와 연천이 객잔으로 들면 아예 밖에 불을 꺼버렸다.
그래도 어디든 묵을 곳을 찾아드는 손님들이 있었다.
무림인 좀 상대해 봤다 싶은 점소이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객잔이 빚쟁이에게 팔렸다. 주인장의 여동생이 집을 나가서 도저히 객잔을 운영할 정신이 없다고 말을 만들어 내어 손님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 정도면 기분 좋게 이별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데, 영친왕의 호위 무사가 되겠다고?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는 짓거리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좋게 해보려던 작별 인사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됐거든, 이제 가! 밖에서 나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마라!”
걸화가 아직 할 말 많은 걸윤의 등을 떠밀었다.
“야! 야!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호위 무사는 안 돼! 그리고 저자도 안 되겠다. 믿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생기는…….”
걸윤이 방 밖으로 밀려나며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가! 가! 빨랑 가!”
걸화가 힘을 줘서 걸윤을 방 밖으로 밀어냈다.
내력을 쓰든 완력으로 버티면 어찌해서든 걸화의 방에 붙어 있겠지만, 걸화가 쫓아내려고 마음을 먹고 내몰았다.
버텨봤자 더 흉한 꼴로 쫓겨날 뿐이었다.
걸윤은 걸화의 방 밖으로 밀려 나오며 생각했다.
역시 배걸화랑 얽히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어떻게 저걸 그냥 두고 혼자 무림행을 다니겠는가?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서 개방으로 끌고 가지 않는 이상, 저 철딱서니 없는 누이를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깜깜한 복도에 선 걸윤은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 같았다.
걸화는 문을 세게 닫고 침상에 다시 누웠다.
걸윤때문에 흥분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를 잡아가지는 않겠다는 말인데…….’
“하하하하!”
침상에 누워, 눈깔을 희뜩 뒤집고 이쪽저쪽으로 몸을 굴려 가며 웃는 모습은 오줌을 지릴 만큼 섬뜩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걸화는 혼자 신이 나서··· 잠들었다.
* * *
이른 아침, 얼굴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화는 제법 먼 거리의 조그만 나무토막을 향해 비도를 날렸다.
비도가 퍽 꽂히며, 나무토막이 뒤로 자빠졌다.
“제법이구나.”
연천이 말했다.
“칭찬이죠?”
걸화가 웃었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이제 움직이는 물체를 맞추어 보자꾸나, 내가 이것을 던질 테니 맞추어 보거라.”
연천이 허공을 향해 나무토막을 던졌고, 걸화가 비도를 던졌다.
따악―
기분 좋은 타격음이 울리며, 걸화의 손에서 날아간 비도가 나무토막 한가운데에 꽂혔다.
열 개의 비도가 날아가는 나무토막 여덟 개를 맞추었다.
“아이… 다 맞출 수 있었는데…….”
걸화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그 정도면 아주 잘했어.”
연천이 칭찬했다.
걸화는 나무토막과 바닥에 박힌 비도를 주웠다.
“좀 더 단련되면 내공심법도 배워야겠구나…….”
연천이 바닥에서 비도를 줍는 걸화에게 말했다.
“내공? 우와! 좋아요! 가르쳐 주세요!”
“내공도 마찬가지다, 무공이라는 것 자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종이를 쌓아가듯이 매일 한 장씩 한 장씩 쌓다 보면 어느 날 두꺼운 너의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에~ 네에~”
걸화는 연천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저 너무 신이 났다.
연천과 걸화는 며칠을 걸화의 비도 연습에 몰두했다.
객잔의 작은 창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걸윤이었다.
걸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비도를 사용하는 무공은 많았다.
검도, 도도, 주먹도, 비도도 모두 같았다.
적의 수와 적이 있는 방향과 각도, 위치와 나의 상황에 따라 수만 가지의 자세와 방법으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천과 걸화가 하는 연습은 걸화의 돌멩이가 비도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그저 던지는 것이었기에 걸윤은 속이 답답했다.
‘철딱서니 없는 누이동생이 쥐뿔도 모르는 놈한테 무공을 배운다고 설치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한다니…….’
무엇보다 겨우 저딴 것을 배워서 영친왕의 호위 무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두 멍청이를 어찌해야 하나 싶어 골치가 아팠다.
연천은 며칠 안으로 걸화의 손에 비도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가르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비도를 사용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최소한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 * *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영친왕의 호위 무사를 뽑는 시험 날 말이다.
시험 당일 아침, 연천과 걸화는 며칠간 했던 것처럼 아침 일찍부터 걸화의 비도 수련을 했다.
아침을 먹고 채비를 한 연천이 걸화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가지 말자고 하면 어찌하겠느냐?”
걸화가 씨익 웃었다.
“그럼 형님 두고 나 혼자 가야죠.”
연천이 따라 웃었다.
“내가 가지 못하게 막으면?”
“형님 머리통이라도 깨고 가야죠.”
연천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황에서 건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거라,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건 내 말을 듣거라. 할 수 있겠느냐?”
연천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에!!”
걸화가 큰 소리로 답했다.
연천이 묵직한 얼굴로 일어섰다.
영친왕의 호위 무사 시험을 치르기로 한 것은 걸화를 말리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자신의 욕심이었다.
여느 무인들처럼 연천도 영친왕의 성에 들어가서 그 검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염려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걸화가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믿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시험을 치른다고 무조건 호위 무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은 시험을 치러보고, 그 뒤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연천은 촐랑대는 걸화와 함께 시험 장소로 나섰다.
시험 장소가 어딘지 몰라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많은 무인들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천과 걸화도 무인들의 무리를 따라 걸었다.
시험 장소는 왕성에서 멀지 않은 파월산이었다.
파월산은 운파월래, 구름이 열려 그 사이로 달빛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산세가 험준하고 산짐승이 많았지만, 하늘을 향해 양팔을 크게 벌린 듯한 산형은 달빛을 유난히 잘 받아서 한밤중에도 산 곳곳이 훤했다.
시험 장소가 파월산이라는 것을 들은 자들은 ‘밤늦게까지 시험을 치르겠구나…’ 하고 한 번씩 생각했다.
연천과 걸화는 파월산 입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입구에서부터 워낙 많은 무인들이 버글거렸기 때문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시험을 치르러 온 것이냐?”
미어터지도록 많은 사람을 보며 연천이 입을 쩍 벌리고 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전 무림의 무인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말로만 들었지 생김새와 분위기, 무기나 의복 등 모든 것이 각양각색인 무인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형님! 또 그런 모자란 표정 짓는다!!”
걸화의 말에 연천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무인으로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잘만 되면 이름을 날리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으니 이리 많이 모일 수밖에.”
연천과 걸화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들의 옆에 백색 무복을 단정하게 입은 장년인이 점잖게 대답했다.
사내의 가슴에는 매화꽃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영친왕의 호위 무사가 되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유가 맞긴 했다.
하지만, 깊이 감춰둔 속내는 달랐다.
혈영천마와 함께 사라졌던 천하제일 검.
최근 영친왕의 수중에 나타났다는 검.
그 천마검을 어찌해보려고 기를 쓰고 왕성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천하제일 검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천마검이 무인들을 불러 모은다는 둥 검이 피를 부른다는 둥 헛소리들을 해대면서.
혹여, 천하제일 검이 자신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야욕에 눈이 먼 자들이 버글거렸다.
“아! 화산의 제자시군요!”
걸화가 알은체를 했다.
“…….”
화산의 제자라는 사내는, 자신을 알아본 것에 대해 흡족한 표정을 지었을 뿐 대답은 없었다.
“이야~ 화산의 제자를 직접 만나 뵙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배걸아라고 합니다.”
걸아가 좁은 틈에서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운백이라고 합니다.”
화산의 제자가 짧게 이름을 말했다.
“저희 형님인 백연천입니다.”
걸아가 연천을 대신해서 소개했다.
자신의 의중과 상관없이 걸화가 자기소개를 하는 통에 연천은 가볍게 인사를 했다.
“화산의 제자이시면서 이런 곳에도 오셨습니까?”
걸화가 화산의 제자, 운백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수일검이라는 영웅이 있는 화산은 중원 최고의 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어찌 아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음… 다 제각각의 사정이 있으니까요.”
운백이 반듯하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걸화는 ‘그래서 무슨 사정인지 더 말을 하시지?’라는 표정으로 운백을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걸화는 뭐라고 말을 더 붙여볼까 싶어 눈을 굴렸다.
그때, 파월산 입구에 솟아난 높은 바위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연천과 걸화는 워낙 멀어서 그 사람이 손톱만 하게 보였다.
그 옆으로 몇 명의 사람이 더 올라왔지만 잘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화산의 제자인 운백은 어느새 사람들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걸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운백을 찾다 이내 포기하고 바위 위에 선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모습을 주시하는 자가 있었다.
눈으로 연천과 걸화의 뱃속까지 뚫을 듯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그자는 눈에 잔뜩 독기를 싣고 삐딱하게 서 있는 걸윤이었다.
“주목해 주시오!”
바위에 선 자가 내공을 실어 크게 말했다.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