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놈】
걸화는 침상에 누워서도 비도를 조몰락조몰락거렸다.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애병이 생겼고 무공도 배운다.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잠이 안 온다는 건 그냥 말이고, 너무 좋아도 잠은 온다.
걸화는 기분 좋게 비도를 쥐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걸화가 인상을 팍 쓰고 눈을 떴다.
아직 잠이 완전히 든 건 아니지만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왔기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 불쾌했다.
누군가가 느껴졌다. 자신의 코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걸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깜한 밤 어렴풋한 달빛 속에서도, 걸화는 그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잠이 덜 깬 중에도 언짢은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쏘아보다, 결국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씨…….”
사내를 보는 걸화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너는 오랜만에 오라비를 보고 그리 인상을 쓰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걸윤이 걸화 앞에 서서 떨떠름하게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나 잡으러 온 건 아니지? 나 아버지한테 서찰 보냈어, 나 찾아다니면 진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릴 거라고 했다.”
걸화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너를 찾으러 오냐?”
걸윤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걸윤의 말은 거짓이었다.
걸화가 집을 나간 직후, 걸부가 무림행을 간 걸윤에게 걸화가 없어졌다고 연락했다.
걸윤은 당장 개방으로 돌아와 개방 총타 인근 마을부터 걸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다니던 중, 걸화가 서찰을 보냈다는 전갈을 받고 동정호로 가게 되었다.
그 사이 사덕의 도움으로 새로운 용파가 내려왔다.
새로운 걸화의 용파는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몇 달간 누이를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성도에서 찾은 것이었다.
“그럼 왜 왔어?”
걸화가 사납게 물었다.
“영친왕 호위 무사 뽑는다기에 구경 왔다!”
걸윤도 삐딱하게 답했다.
“그럼 구경하고 가지 왜 아는 척이야!”
“아는 척 좀 하면 안 되냐!”
“쯧… 잘 자고 있었는데 깨우고 그래! 아버지 소식은 알아? 잘 계신데?”
있는 대로 짜증을 내던 걸화는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했다.
“철들었다, 그런 것도 물어보고.”
“씨이…….”
걸화가 눈을 부라리며, 입 모양으로 욕을 해댔다.
걸윤은 짐짓 걸화를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건강하게 계시단다. 너 안 보니깐 속이 시원해서 ‘진즉에 무림으로 보낼 것을’ 하고 후회하시고 계신데.”
“진짜?”
걸화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몰라!”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형도 잘 있지?”
“나야 보다시피 잘 있…….”
“너 말고 걸부형! 네가 무슨 형이냐?”
걸화가 걸윤의 말을 톡 자르고 쏘아붙였다.
“저건 아무튼…….”
걸윤이 오랜만에 보는 누이동생에 대한 짜증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이 다니는 그 비리비리한 녀석은 뭐냐?”
“그 형님? 나한테 무공 가르쳐줄 형님이야.”
걸화는 걸윤과 얼굴을 마주한 후, 처음으로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뭐어? 형니임? 무고옹?”
걸윤이 말끝을 심하게 비틀어대며, 빈정댔다.
“뭐? 뭐? 뭐?”
결국, 걸화는 침상에서 아예 일어나서 걸윤에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냈다.
걸윤의 눈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연천은 걸화에게 다시없을 은인이고 호인이었다.
막무가내인 자신을 항상 좋은 말로 달랬고 믿어줬고, 돌보아주었고 거기다 무공까지 가르쳐줄 참이었다.
한 핏줄이라고 같이 살았어도 얼굴만 보면 놀리고 무시하고, 빈정대던 걸윤과 달랐다.
여기서 저 얼굴을 보는 것도 불쾌한데, 자신의 은인까지 무시하고 있었다.
걸윤의 면상에 돌팔매질을 해대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지만, 정말 간절하게 패주고 싶었다.
걸화는 이 순간 무공을 열심히 배우겠노라 다짐했다.
꼭 고수가 돼서 이놈을, 이 오라비 놈을 패리라.
“야! 너 아무리 무공을 배울 곳이 없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얼빵이한테 무공을 배운다는 거야?”
걸윤은 어젯밤이 떠올랐다.
한밤중에 자신의 방에 몰래 든 자였다.
중요한 뭔가를 훔쳐 갈 수도 있었고 위협을 할 수도 있었고, 심한 경우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조건 강경하게 대처해야 했다.
잡아서 주리를 틀건 머리털을 뽑건, 최소한 방에 든 이유는 알아내야 했다.
물러터진 그 자는 위해를 가할 공격을 하지도 못했고, 멍하게 있다가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까지 주었다.
딱 봐도 경험이 부족하고, 강단 있지 못했다.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들이 다 부족했다.
걸윤의 기준에서 아무리 잘 쳐줘도 이류 무사가 될까 말까 했다.
누이동생을 맡길만한 인재가 못되었다.
“남이사! 내가 그렇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는 안 가르쳐 주더니 이제 와서 왜 신경 쓰는데?”
성질이 났다.
그렇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려도 무시하더니, 겨우 스승을 만나 무공을 배워보려는데 방해는 하는 것이 아닌가?
웬수도 이런 웬수덩어리가 없다.
“신경 쓰는 게 아니고 골라도 좀 잘 고르라는 거야. 딱 봐도 비리비리한 게 쥐뿔도 없어 보이더구먼, 자기 무공이나 신경 쓰지 누구한테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건지 원…….”
걸윤은 그 물러터지고 경험 없는 작자에게 너나 잘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질인지.
“야! 너 자꾸 우리 형님 욕할래!”
걸화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난 네 오래비거든?”
오라비를 앞에 두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놈 편을 들다니.
“와… 꼴랑 세 해 일찍 태어났다고 엄청나게 유세야! 오라비고 뭐고 수틀리면 가만 안 놔둔다!!”
걸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협박이었고, 개방에 있을 때는 꽤나 먹히던 것이었다.
실제로 걸화의 괴롭힘에 두손 두발 다 든 거지들이 개방 총타에 수두룩했으니.
세 살이라는 나이 차가 결코 적지 않건만, 걸화에게 걸윤은 자기와 같은 급이었지, 결코 형이나 오라비로 보이지 않았다.
연천도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그는 항상… 아니, 거의… 아니, 많은 부분 어른 같았고 윗사람 같았다.
나이는 같지만, 배걸윤 같은 놈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휴… 그놈의 성질머리는 아직도 그 모양이냐? 여전한 것 보니 잘 있기는 한가 보네.”
걸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걸화랑 입씨름을 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걸윤 딴은 좋게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잘 있는 것을 확인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기에.
“엄청나게 잘 있거든, 무공 배워서 영친왕의 호위 무사가 될 거니깐 넌 구경이나 해라!”
걸화가 자랑처럼 말했다.
“뭐어?”
이런 말도 안 되는…….
“귀 막혔냐? 호위 무사라고!”
“…….”
잠시, 걸윤의 말문이 막혔다.
“흥!”
걸화가 걸윤을 향해 콧방귀를 뀌어댔다.
“하! 참 기가 막힌다. 너나 그 작자나… 철이 없으면 눈치가 있던지, 넌 어찌 골라도 너만큼이나 생각 없는 놈을 골라서 같이 다니냐!”
걸윤이 기함하며, 참고 있던 말들을 뱉어냈다.
어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겠다는 건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위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목숨 걸고 타인을 지켜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걸화는 무공에도 젬병이고, 누가 자신에게 지시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거기다 먹고 자고 입고 아무튼, 모든 생활이 다 제멋대로라서 누구와 맞춘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남한테 해코지를 했으면 했지, 누굴 지킬 성정이 못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주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자기부터 도망가고 볼 아이였다.
어떻게 하면 호위 무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기가 막혔다.
걸화야 원래 자기 분수를 모른다 치더라도, 옆에서 말리지 않은 그 얼빵한 작자에게도 화가 났다.
“너 한 번만 더 우리 형님 욕하면 죽는다!”
걸화는 걸화대로 자꾸 연천을 욕하는 걸윤에게 화가 났다.
“너야말로 호위 무사 시험에 나갔다가 죽는다. 그만해라.”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
호위 무사를? 배걸화가? 미치겠다.
“와… 내가 한동안 니 얼굴 안 봐서 속이 편하더니… 너는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사람 성질을 건드리냐!”
참다못한 걸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천을 만난 후로 모든 것이 즐겁고, 또 잘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찬물을 끼얹는 걸윤에게 화나고, 짜증 나고 성질도 났다.
“걸아야!”
밖에서 연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금방 깨서는 작게 이야기를 했지만, 걸윤과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걸윤도 마찬가지였다.
빈 객잔에 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천은 걸화의 유난한 잠꼬대를 알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려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니 걱정이 되어 찾아온 것이다.
“야! 숨어! 숨어!”
걸화와 걸윤이 허둥댔다.
걸화가 걸윤을 황급히 침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걸아야! 들어가마.”
연천이 걸화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걸화가 침상에 걸터앉으며, 침상 아래를 가렸다.
“누구와 이야기 하는 게냐?”
연천이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아! 참! 형님도 이 텅 빈 객잔에서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겠어요? 이… 이… 이! 비도랑 이야기했지.”
걸화가 손에 들려있는 비도를 내보이며 말했다.
연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다. 어서 쉬어라, 내일도 일찍 일어나려면 힘들다.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옆방에 있으니 소리라도 지르려무나.”
“에이, 당연한 소리를. 걱정 마요. 나도 이제 이 아이가 있으니깐.”
걸화가 기분 좋게 비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연천이 그런 걸화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방을 나갔다.
연천이 나가고 잠시 후, 걸화가 침상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작은 목소리로 걸윤을 불렀다.
“야!”
“아이고… 허리야. 아구구… 내 허리.”
걸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침상 밖으로 기어 나왔다.
“내 걱정은 그만하고, 본인 허리나 신경 쓰셔.”
걸화가 걸윤에게 빈정거렸다.
“아휴…….”
걸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저자와 다녀야겠냐? 차라리 나랑 다니자, 내가 더 좋은 비도를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