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영친왕의 호위 무사】
영친왕은 화려하게 장식한 커다란 용교의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톡… 톡… 톡… 톡…….
영친왕 앞에는 모사와 군사, 장군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영친왕의 최측근만 자리했음에도 그 수는 스물이나 되었지만, 장정 스물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과도하게 넓은 집무실에는 영친왕이 교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만 거슬리도록 크게 울렸다.
“감히 내 물건을 넘봐?”
허공을 향해 내뱉은 영친왕의 한마디는 서늘했다.
“…….”
또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심기가 불편한 영친왕이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두들겨대는 소리가 빨라졌을 뿐이었다.
톡… 톡… 톡톡.
“…무림인들이란 그렇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놓는 자들입니다. 천마검을 노리는 무림인이 한둘은 아닐 겁니다.”
호위대장인 위적훈이 말했다.
그는 무림 출신으로 이 자리의 누구보다 무림인의 습성에 대해서 잘 알았다.
“흥! 어리석은 것들. 감히… 내 것을…….”
영친왕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제는 아니지만, 황제라는 이름 그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를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실의 모든 재산은 물론이요, 황제의 여인이라는 궁녀도 영친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못 가질 것이 없었다.
온 나라가 영친왕의 손에 들어왔건만, 무림인이라는 것들은 어찌해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나 간이 배 밖으로 나왔으면, 영친왕이 얻은 검을 훔치러 성에 잠입까지 했겠는가.
뜻대로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영친왕의 무서움은 알게 해야 했다.
그놈들을 잡아 주리를 틀고 사지를 찢어놓아도 성이 차지 않을 텐데, 성에 잠입한 놈들을 놓치고 말았다.
영친왕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성내의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하고, 귀원각은 경비 인원을 두 배로 늘려라!”
“전하! 이번 기회에 무림에도 전하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사인 좌사종이 깍듯하게 말했다.
“나의 위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던 영친왕의 시선이 좌사종에게 향했다.
“네, 아예 멍석을 깔아서 천마검을 노리는 자들을 불러 모으는 겁니다.”
좌사종의 말에 영친왕의 눈매가 흥미롭게 빛났다.
“호랑이굴로 쥐새끼들을 모아 그 본보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전하의 것에 욕심을 내면 어찌 되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요.”
말을 끝낸 좌사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영친왕의 눈에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 * *
사천, 성도로 들어선 연천과 걸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친왕의 성이 있는 성도에는 각양각태의 무인들이 벅적댔다.
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는 원래 이렇게 무인이 많은가…?”
“형님! 성도에 처음 와봐요?”
“응…….”
연천이 바로 앞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무인들을 보며 답했다.
“어쩜 그렇게 다녀본 데가 없어요…?”
걸화가 구시렁거렸다.
“아무래도 저 무인들이 이곳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저 말투를 들어보거라.”
연천의 말에 심드렁하게 앞을 보던 걸화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겠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 중에 꽤 많은 이들이 바랑이나 주머니를 지거나 매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글쎄…….”
연천이 주억거렸다.
“우선은 밥도 먹고 쉬어야 하니 객잔을 찾아보자꾸나.”
말을 하는 연천과 걸화 앞으로 회백색의 무복을 차려입은 한 떼의 무인들이 지나갔다.
“배고파요… 아!”
걸화보다 몸집이 두 배쯤 큰 사내의 옆구리에 걸화의 어깨가 부딪혔다.
연천이 휘청대는 걸화를 잡았다.
“얼른 방을 잡아야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연천이 걸화를 치고 지나가는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에? 방이 없어요? 에휴…….”
걸화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서 겨우 식당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객잔도 함께 운영하는 곳이기에 물었더니, 역시나 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곳이 벌써 네 번째 객잔이었다.
밥 먹을 자리를 얻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식당마다 바깥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로 미어터져서 지금까지 쫄쫄 굶었으니.
“원래 성도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걸화가 음식을 내어오는 점소이에게 물었다.
“아휴우~ 영친왕이 무슨 칼을 지킨다고 임시로 호위 무사를 뽑는대서 전국에 난다 긴다는 무인들이 다 모이는 바람에 아주 정신이 없지요. 듣자 하니 그 칼이 예전에는 천하제일이라 불렸다더구먼.”
점소이가 식사를 내어오며 흥에 겨운 푸념을 해댔다.
점소이의 말에 연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예전에 천하제일이었다던 칼이라…….’
백화루 은월이 영친왕의 성에 천마검이 나타났다고 했었다.
연천도 그 검을 보고 싶어 이곳까지 온 것 아닌가.
그는 점소이가 말하는 칼이 천마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친왕의 호위 무사… 거기 참가하려면 어찌해야 하오?”
연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점소이에게 물었다.
“영친왕의 성 입구에 가서 참가 신청을 해야죠, 거기도 사람들이…….”
“여기!”
말 많은 점소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뭔가 더 아는 척을 하고 싶은 듯했으나,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아쉬운 얼굴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방이 없어서 어찌한담…….”
연천은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반나절이나 있었더니, 온몸에 기운이 쫙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칫! 숲에서 자도 좋고 사냥을 해서 먹어도 좋다고 하시던 양반이… 나는 거지라 길바닥에서도 잘 자요. 우선 참가 신청부터 해요.”
“너는 먹고 있거라, 나는 가서 얼른 신청하고 오마.”
연천이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은 식당은 밀려드는 손님을 최대한 받으려고, 빈틈없이 탁자와 의자를 밀어 넣어 놓았다.
시끄러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옆 탁자에 앉은 사람에게 부딪힐까 걱정되어 젓가락질하기도 조심스러웠다.
“나도 갈래요, 나도 신청할래요.”
걸화가 연천의 소매를 급하게 잡으며 말했다.
“네가 가서 어찌하겠다는 거냐? 무공도 못 하는 녀석이.”
연천은 걸화가 호위 무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혹여, 연천이 호위 무사가 되면 걸화에게는 돈을 넉넉히 쥐여주고 시설이 괜찮은 객잔에서 묵게 할 생각이었다.
“설마 또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죠?”
“너 그 소리 좀 그만하여라, 내가 언제 너를 버렸다고…….”
“난 무조건 형님이랑 같이 갈 거예요. 나 못 가면 형님도 못가요.”
걸화가 연천의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허…….”
헛웃음을 터트린 연천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님이 나 무공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말을 꺼낸 걸화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연천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으흠…….”
걸화가 큰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데 그만 침음이 터져 나왔다.
연천의 침음은 시끄러운 식당의 소음에 묻혔다.
무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걸화가 고집을 부리면 말리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앞서는 연천이었다.
연천은 언제나처럼 촐랑거리며 앞서 나가는 걸화를 잡아 세웠다.
많은 인파에 걸화를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묵고 있는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헤어지면 어찌하자고 약속도 해놓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밀려 걸화를 잃어버리면 찾기 곤란했다.
영친왕의 성을 중심으로 성도 전체에 버글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걸화를 찾지 못하면, 연고 없는 두 사람은 영영 이별을 맞을 수도 있었다.
걸화를 꽉 잡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임시임에도 불구하고 호위 무사 신청을 위한 줄은 길었다.
한 무더기의 인파가 뒤에서 밀어댔고, 신청을 끝낸 이들이 자신의 길을 가다 또 다른 옆 사람에게 밀려 몸을 쳐댔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지 연천에게 잡혀있는 것이 못마땅한 걸화는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뻗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걸화를 꼭 잡고 있는 연천의 몸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온몸에서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 기다리자 겨우 줄의 끝이 보였다.
성벽에 붙여 내어놓은 탁자의 수가 백여 개쯤 되어 보였는데, 모인 인파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기에 기다림은 길었다.
참가 신청이라는 것은 기다린 것에 비해 지나치게 간소했다.
이름을 받아 적고, 보름 뒤 시험을 치르기 위한 시각과 장소를 알려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연천은 기운 빠진 몸으로 허탈하게 걸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쉬운 대로 방이라도 잡아 쉬고 싶었다.
사람을 그만 보고 싶었다.
연천과 걸화는 일곱 번째 객잔에 들르면서 기대하지 않았다.
이 객잔에도 방이 없으면 야숙을 하기로 했다.
연천은 웬만하면 걸아를 밖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엔 어쩔 수가 없었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방 있소?”
연천이 기대 없이 물었다.
“네, 있습니다.”
점소이가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있어요?”
걸화가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있습죠,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작은방 두 개 있소?”
연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올라가시지요.”
점소이가 익숙하게 답하며 앞장섰다.
걸화와 연천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따랐다.
고요한 객잔에 세 사람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연천과 걸화는 뭔가 께름칙한 기분으로 점소이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들었다.
저녁을 먹으러 일 층 식당으로 내려와서도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객잔은 손님이 미어터지도록 버글거리는데 연천과 걸화가 묵은 이 객잔만은 휑하니 사람이 없었다.
“이 객잔에 귀신이라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뭔 객잔이 이리 조용해요.”
의자에 앉은 걸화가 텅 빈 식당을 두리번거리며, 속삭였다.
외관은 다른 객잔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손때 묻은 탁자와 함부로 다뤄 부서진 곳곳을 나무판으로 덧댄 의자, 기름에 전 주방 천장, 어둑한 객잔의 벽면.
모든 것이 중원에 흔해 빠진 객잔이었다.
딱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걸화와 연천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 묵을 곳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지.”
연천의 목소리도 낮았다.
그런데도 객잔이 너무 고요해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점소이는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