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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57화 (57/230)

57화

한참을 고민하던 연천이 입을 열었다.

“저의 스승님은… 저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셨습니다.”

지켜보던 팽청강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리도 뜸을 들이다 하는 말이라는 것이 참…….

신의가 묻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혈고를 제거할만한 기술을 전수해준 그 대단한 분의 이름, 그게 아니면 별호나 아무튼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만한 뭔가를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웃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닌가 싶던, 신의가 연천을 보며 작게 미소를 띠었다.

“젊은 사람이 과하게 신중하구먼, 상황이 어찌 되었든 나는 그저 의원이네. 환자가 없으면 있을 필요가 없지.”

“바쁘신 분을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 대협이 오기 전까지는 정말 상태가 심각하였습니다.”

팽청강이 죄송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알겠네.”

신의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

“이리 걸음하여 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팽청강이 포권하며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거… 한 것도 없이 인사를 받는 것도 민망하구먼.”

신의가 전혀 민망하지 않은 얼굴로 느긋하게 말했다.

“가주님! 미충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손님들과 이야기 중에 방해를 받은 팽청강이 얼굴을 찡그렸다.

팽청강의 심복인 미충도 그가 누구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들어오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들어오너라.”

미충이 들어오자 팽청강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미충이 팽청강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팽청강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신의와 연천은 팽청강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잠자코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팽청강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게 환단을 선물했던 아우가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 환단이 원인이었던 듯싶습니다.”

“아…….”

연천은 새삼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이 무림이라는 것… 살해, 죽음이라는 단어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혹시, 환을 통해 혈고가 몸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까?”

팽청강이 어두운 얼굴로 신의에게 물었다.

“가능하지, 혈고가 자리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릴 뿐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신의는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 그런 것인지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대체 누가? 왜? 이령이에게…….”

팽청강의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연천은 신의와 함께 팽청강의 방을 나섰다.

하북팽가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변하고 있었다.

혈고를 전해준 것으로 의심되는 집안사람이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연천은 하루를 더 쉬고 하북팽가를 나섰다.

팽이령의 몸도 나았고, 무엇보다 연천은 할 일이 있었다.

정신없는 남의 집에 계속 죽치고 있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 팽호연이 연천의 손을 붙잡고 연신 감사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한참이나 연천을 믿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마저 더해져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손이 잡혀있던 연천은 걸화 덕에 겨우 팽호연의 손아귀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팽가에 온 이후로 꼼짝 않고 먹기만 한 걸화는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두 사람은 다시 성도로 향했다

* * *

높고 깊은 산의 능선을 따라 늘어선 나무에는 하얗고 동글동글한 꽃망울이 소담하게 달려 있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빽빽하게 매달린 나무가 산 지천에 널려있는 모양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장에 나가기 직전의 군사무리를 보는 듯, 어수선하면서도 정렬되어 있었고 가벼운 듯 묵직했다.

폭발 직전의 고요함을 간직한 작은 알갱이는 머지않아 활짝 개화하여 자신의 존재를 멀리 퍼트릴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아찔한 향을 머금은 하얀 꽃잎은, 한겨울 눈발처럼 온 산을 뒤덮을 것이다.

따뜻한 봄, 깨끗한 햇살을 담은 매화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화산은 절경이었다.

중원에서 화산의 위상을 나타내듯, 범접하기 힘든 고매함과 숭고함이 농밀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꽃 피울 준비가 한창인 화산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홍매원.

수일검 운호는 탁자를 부러트릴 듯 내리쳤다.

“무어! 벌써 혈고를 제거해! 대체 일을 어찌 처리했기에 혈고가 제거돼! 중원에서 혈고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대체 누가 제거했단 말이냐!!”

운호는 노여움이 가득 찬 노성을 터트렸다.

“그게… 이름 없는 의원이라 합니다.”

운호 앞에 죄를 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제자 청해가 겨우 입을 뗐다.

“이름이 없어? 이름도 없는 의원 나부랭이가 혈고를 제거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혈고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게 아니야?”

운호가 제자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신의가 왔다면서 신의가 제거한 것이 아니냐?”

운호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신의가 나타났다면 방법이 없었다.

신의에게 혈고 제거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일이 그르치려니, 삼대가 덕을 쌓아야 얼굴 한번 볼까 말까 한다는 신의까지 나타났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잘못되어 화가 나는데 제자는 자꾸 이름 모를 의원을 들먹이며 그의 성질을 더욱 돋우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눈치 없이 우직한 제자는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고 알아 온 바를 계속 피력했다.

“이,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신의가 나타났다는 말에 감정이 수그러들던 운호는 다시 성질이 뻗쳤다.

신의가 아니고 뜨내기 의원이 혈고를 제거했다?

그건 말도 안 되고 그랬다면 이쪽에서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밖에 볼 수밖에 없었다.

혈고가 잘못된 것이다.

“송구합니다.”

청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흐음…….”

수일검 운호가 침음을 흘렸다.

“일단 하북팽가는 미루어 두고 다른 문파를 알아보아라.”

운호는 화가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들이 워낙 앞뒤가 꽉꽉 막힌 자들이라 쉽지가 않습니…….”

청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쾅―

수일검이 다시 탁자를 내려쳤다.

“그러니 이런 일은 만든 게 아니냐! 죽어가는 자식을 구원해주는 것만큼 큰 빚을 지우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분위기를 보고 안 될 것 같으면 혈고를 사용하던 안 되면 가주를 없애 버려!! 어린 가주는 구슬리기가 더 나을 게다.”

운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청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어찌 그런 게야! 이것이 나 혼자 좋자고 하는 일이냐? 내가 무림맹주가 되면 우리 화산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 이름이 빛날 것이야! 앞으로 그 누구도 화산을 건드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언성이 높아진 운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알고 있습니다.”

청해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런 게야?”

운호가 날카롭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청해가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도, 장로도 화산의 그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돼!! 그 양반들이 알았다가는 너와 나는 끝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운호의 말에 청해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청해가 짧게 답했다.

“나가 보아라.”

운호는 성격이 모질지 못한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더 큰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제자 청해는 작은 희생을 두려워했다.

운호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청해가 무거운 얼굴로 홍매원을 나섰다.

* * *

영친왕의 사천성은 황궁보다 웅장하고 거대했다.

그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제가 황궁이 아닌 영친왕의 성에 머문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한 결과였다.

황궁이라는 이름뿐인 껍데기보다, 황제와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영친왕이 머무는 곳이 중요할 테니.

영친왕은 황제의 나이가 스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나라의 모든 대소사를 도맡고 있었다.

거기다 황제를 황궁에서 지내지도 못하게 자신의 옆에 딱 잡아두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황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권력이 탐이나 어린 조카를 누르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려는 것일 테지.

속으로야 그리 생각하겠지만, 군권까지 장악한 영친왕에게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진실을 고하겠는가?

성인이 된 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을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힘없는 황제는 그저 모든 일을 영친왕에게 맡기고 바짝 엎드려있었다.

영친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허수아비 같은 황제를 제거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친왕은 모든 힘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도 그 일만은 하지 않았다.

영친왕의 형이자 전대 황제가 병상에 있던 어느 날, 영친왕이 전방에서 돌아왔다.

엄청난 수의 병력을 데리고서 말이다.

썩어 빠진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이유로 당시의 황후와 그 집안, 그들과 엮인 모든 세력을 쳐내고 강보에 싸인 태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것에 대한 반발인지 정말 몸이 좋지 않은지, 황제는 근 이십 년 동안 공식 석상에 얼굴 한번 제대로 내밀지 않았다.

황제인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바가 아닐 테니 고개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이겠지만 황제가 병신이다 몹쓸 병에 걸렸다, 영친왕이 전각을 벗어나면 죽이겠다고 겁박했다, 절세가인을 만나 그녀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등등 소문만 무성했다.

황제의 집안 사정이야 이렇건 저렇건 영친왕이 권력을 잡은 이후, 백성들은 살기가 좋아졌다.

중간에서 세금 떼먹는 놈부터 돈 주고 관직을 매매하는 놈, 관리라 하여 여염집을 자신의 집처럼 함부로 뒤집는 놈들까지 모두 발붙이지 못하게 했으니.

승하한 태상황제의 아우이자 현 황제의 숙부가 되는 영친왕은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간신들이 은근히 황제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라는 의중을 내비쳤다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으니 그 말이 쏙 들어가긴 했지만, 실상 영친왕이 황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어떠하랴, 관리들이 설쳐대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과거보다 훨씬 나은데.

백성들은 누가 황제 자리에 앉아있는가는 중하지 않았다.

내 배부르게 해주는 사람이 최고지.

그런 면에서 영친왕은 황제의 역할을 훌륭히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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