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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56화 (56/230)

56화

팽이령의 심장 주위를 관찰하던 연천은, 심장의 측면에 이상한 것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아있는 벌레 같은 것이 심장에 박혀 박동을 옥죄이고 있었다.

연천이 미세한 뇌전을 자신의 기운에 실어 보냈다.

벌레가 찔끔하더니 자세를 바꾸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으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천은 조금 더 강한 뇌전을 정확하게 벌레를 향해 쏘았다.

벌레가 진저리를 쳐대더니, 심장을 잡고 있던 갈고리 같은 열 개의 발이 심장을 놓아버렸다.

어두운 기운을 가진 벌레가 이령의 기운을 따라 커다란 대맥으로 둥둥 흘러갔다.

연천이 한 번 더 뇌전을 흘려보내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이령의 심장을 옥죄던 것이 사라지자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며 혈류를 밀어 보냈다.

막혔던 혈액이 몸 구석구석으로 휘몰아쳤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은 일정한 속도로 힘차게 자신의 일을 해댔다.

몸의 저 끝에서 밀려 들어온 찌꺼기를 정화해 다시 흘려보냈다.

푸릇하던 피부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연천은 이령의 몸을 한번 훑고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연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팽청강이 눈을 크게 뜨고 팽이령과 연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팽호연은 연천을 향해 뚫어버릴 듯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어떻소?”

팽청강이 물어보았지만 팽이령의 혈색과 숨소리, 옆에서 느껴지는 박동만으로도 몸이 회복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팽호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연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조용히 말씀을 올려도 될는지요?”

연천이 작게 물었다.

“그러시오, 그러시오.”

팽청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답했다.

팽청강의 방 한쪽 벽면에는 수많은 책과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도자기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제각각의 모양을 가진 도자기는 값비싼 가구와 어우러져 한층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차를 즐기는 그의 방 안에는 따뜻한 다향이 풍겨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연천의 만류에도 팽청강은 차를 내밀었다.

차가 필요한 것은 연천이 아닌 팽청강 자신이었다.

그에게 차는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친구이자,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는 의원의 약재와 같았다.

“대협, 정말 고맙소. 고맙소. 고맙다는 말은 수만 번 해도 모자라오. 내가 지금 대협께 할 수 있는 것은 그 말뿐이오. 허나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고맙소. 대협.”

팽청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포권했다.

“부끄럽습니다. 어르신, 그만하십시오. 그리 감사를 받을 일이 못 됩니다.”

그를 따라 일어난 연천의 만류에 팽청강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두 눈에는 연천에 대한 신뢰와 감사함이 가득했다.

“차를 드셔 보시오, 차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 것이오. 똑같은 차를 똑같이 우려내어도,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쓰고 어떨 땐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지요. 이령이 저리되고 소태 같던 차 맛이 오랜만에 아주 달구려, 내 어찌 대협께 감사하지 않겠소?”

연천은 팽청강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차를 들었다.

부드럽고 향긋한 차 한 모금에 긴장이 풀렸다.

“내가 워낙 경황이 없어 실례한 것이 많았소. 결례가 있더라도 이해해주시오.”

팽청강이 훨씬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리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실례하신 것도 없으시고요.”

연천도 편하게 말했다.

“이령이의 혈색이 확실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소. 그리 수많은 의원이 다녀가도 해독하지 못한 것을 어찌 한 것이오?”

팽청강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것이…….”

연천이 곤란한 낯으로 말을 멈추더니, 숨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독은 아닌 듯싶습니다.”

연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독이 아니라? 독이 아니면 뭐라는 말이오?”

팽청강의 얼굴에 의문이 담겼다.

“저도 스승님께 말씀으로만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혈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혈고?”

“네, 심장을 옥죄고 있는 벌레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거했더니 혈색이 돌아왔습니다.”

“혈고를 제거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오?”

찻잔을 내린 팽청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딸 아이의 몸 안에 혈고가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이 청년이 그것을 제거했다는 것 또한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혈고라는 것이 아무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에서 혈고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리 평범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혈고를 제거했다니 믿기가 힘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 생각입니다. 이령 소저의 몸에 어찌 그런 벌레가 들어간 것인지…….”

“으흠…….”

연천의 말에 팽청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

연천은 조용히 차를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따뜻한 액체가 기분 좋은 향을 남기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아! 혹여….”

팽청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잔을 내려놓은 연천이 고개를 들어 팽청강을 쳐다보았다.

“두어 달 전쯤이었나? 내 친척 아우가 찾아왔지요. 말이 좋아 아우지 방계에다가 촌수가 꽤 멀어 일 년에 두어 번 얼굴 보는 게 고작인 아우요. 지나가다 내가 생각나서 들렀다더구먼.”

말을 하는 팽청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연천은 답 없이 팽청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아우가 무역 일을 하는데 아주 귀한 환단을 구했다며 선물로 주고 갔소. 아우 이야기로는 여인에게 그리 좋은 것이라더군. 혼사가 정해진 이령이를 위해 구해온 것이라며, 혼례 전에 먹여두면 도움이 될 것이라 하여 내 그리하였소…….”

팽청강의 말이 느려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

연천은 조용히 팽청강의 말을 기다렸다.

“그 아우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네만 지금으로서는 의심 가는 것이 그것밖에 없구먼, 그래… 아우가 그랬을 리는 없어……. 아우도 잘 몰랐던 게지. 아우에게 사람을 보내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봐야겠소.”

팽청강은 혼자서 결론을 내고 있었다.

“네. 그리고 의원을 불러 제대로 맥을 짚어보셔야 할 겁니다. 저는 의원이 아닌지라.”

연천이 겸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소식이 있소, 언우현이라는 진주언가의 차남이 우리 이령이와 약혼을 한 사이오. 그 아이가 조만간 신의를 모시고 올 수 있을 듯하다고 기별이 왔소. 우현이가 신의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 나서긴 했지만, 워낙 만나기 어려운 분이라 기대도 못 했는데… 그 아이의 지성이 통한 모양이오.”

“다행입니다.”

연천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오. 이령이가 저리 자리를 보전하였는데 오는 의원마다 고개를 젓고 돌아가는 통에 내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소. 대협께서 와주어 이리 호전이 되었는데 신의까지 오신다 하고, 화산에서도 사람이 온다고 하오.”

“화산…이요?”

“딸자식을 살려야 되지 않겠소? 우현이가 소식을 물어물어 신의가 있다는 곳으로 가고, 호연이는 당가로 갔지요. 소문에 화산에 비슷한 증상을 가진 자를 치료하였다 하여 맏이인 호준이가 화산으로 도움을 청하러 갔소.”

“네, 잘 되었습니다.”

“우리 이령이 살 운명이었나 보오. 대협도 그렇고 도움을 청하러 간 아이들 모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니 말이오. 그래도 대협에게 가장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그러겠소. 고맙소, 고마워…….”

팽청강이 연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신을 차린 팽이령의 얼굴은 아프기 전보다 좋았다.

피부는 환하고 눈빛은 맑고, 두 볼은 혈색이 잘 돌아 복숭앗빛을 띠었다.

신의가 팽이령이 손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환자가 다 죽어간다고 그리 쫓아다니며 보채어 왔더니 이리 혈색 좋은 환자도 있는가?”

신의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것이… 일단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시지요.”

팽청강이 미안한 낯으로 말했다.

중원에 실력이 대단하다는 의원이 손에 꼽힐 만큼 있기는 했지만, 그중 신의의 의술이 으뜸이라는데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황궁에만 있어도 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을 테지만, 신의는 감사하게도 전 중원을 돌아다녔다.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며 가난한 이들은 무료로 치료해 줬고, 신의가 절실히 필요로 한 환자를 도왔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그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소문해서 신의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도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려 만날 수 없는 일이 허다했고,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숨겨놓은 집에 들어앉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달씩 길게는 몇 년씩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그랬기에 신의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주 훌륭한 정보력과 하늘이 내린 인연이 필요했다.

그런 신의와 만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상황이 겸연쩍게 되어버렸다.

딸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만, 바쁜 신의께는 죄송한 일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려고 신의의 찾고 있을 테니.

“으흠…….”

신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팽청강을 따랐다.

팽청강의 부름으로 그의 방에 온 연천과 신의 세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느긋한 얼굴의 신의는 연천이 팽이령의 몸에 벌레를 제거한 것과 그것이 혈고라고 생각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허허… 혈고를 제거했다고? 허! 거참… 자네 나이가 어찌 되는가?”

신의가 반듯하게 앉은 연천에게 물었다.

“열아홉입니다.”

연천이 대답했다.

“나이 열아홉에 혈고를 제거했다? 중원에서 혈고를 제거할만한 자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허허! 이런 젊은이가 혈고를… 스승이 계시겠지? 누구신가?”

신의가 자신의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거리다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은…….”

연천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승님이 누구인지는 연천 자신이 제일 알고 싶은 것이었다.

신의는 느릿한 시선으로 백연천이라는 청년을 관찰하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를 가진 젊은 청년은 한마디 한마디가 진중했다.

꼭 나이 많은 노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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