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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55화 (55/230)

55화

【당연히 도와야지요】

연천이 수련을 돌아보자, 수련의 두 볼이 수줍은 복숭앗빛을 띠더니, 이내 붉은 사과색으로 변했다.

주저하던 수련이 크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그…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은… 대협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수련의 얼굴이 불붙은 것처럼 붉어졌다.

수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연천의 얼굴도 수련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당상만이 말한 약혼은 연천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은 좋으니 연천에게 결정을 내려달라는 의미가 있었다.

붉은 얼굴로 서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두 남녀를 보는 걸화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무엇 때문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묘한 기류가 오가는 두 사람이 엄청나게 꼴 보기 싫었다.

짜증스러운 콧김이 훅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갔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연천이 급히 인사를 하고 말에 올라탔다.

팽호연과 이백, 걸화도 당지상과 당수련에게 인사를 하고 말에 올랐다.

또다시 먼 길을 급히 가야 했다.

수련은 연천을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고, 걸화는 그런 수련을 눈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도록 흘겨보았다.

그렇게 수련을 한껏 노려보던 걸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달렸다.

“으하하하하!”

말을 타고 신이 나서 달리는 것까지는 이해를 해보겠다만, 왜 저리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며 웃는 건지… 옆에서 보면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컥…켁…켁… 크어억… 퉤!! 캬악― 퉤! 퉤!!”

걸화가 바람과 함께 입 안으로 훅 들어온 뭔가를 뱉어 보겠다고 켁켁거렸다.

연천은 걸화에게 향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굳이 더러운 꼴을 지켜볼 필요는 없었으니.

팽호연과 이백은 숨넘어갈 듯 요란한 소리에 걸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구겼다.

팽호연은 산서의 객잔에서 전낭을 내밀었던 것을 가슴 아리도록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저 두 사람을 따돌려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의원도 아니고 해독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면서, 저리 서둘러서 남의 집으로 가는 이유는 뭔지…….

파리한 얼굴로 누워있던 누이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답답했다.

팽호연과 같이 집을 나섰던, 형님이나 누이의 약혼자가 해결책을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워! 워! 워!”

앞서 나가던 걸화가 고삐를 급하게 잡아당겼다.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던 말이 급격하게 속도를 줄이면서 바닥의 흙이 패고 자잘한 돌멩이와 흙가루가 튀었다.

팽호연은 걸화의 말 엉덩이에 부딪히기 직전에 겨우 멈추었다.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깜짝 놀란 연천과 이백도 급히 말을 세웠다.

서둘러 말에서 내린 걸화는 팽호연을 지나쳐 왔던 길로 뛰어갔다.

쫄래쫄래 뛰어가더니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육포를 주워 툴툴 털더니 입에 물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씹으면서 달리던 육포가 바닥에 떨어지자 급하게 말을 세웠던 것이었다.

팽호연의 이마에 핏대가 불뚝 솟아났다.

걸화가 무심하게 말을 달려나가자, 연천이 따랐고 한숨을 내쉰 팽호연과 이백도 뒤를 따랐다.

누이 때문에 속이 타는 팽호연과, 함께 걱정해주는 연천과 걸화는 저녁이 되어도 쉬지 않고 달렸다.

팽호연은 대책 없는 그들의 염려에 고마워해야 하는지 마는지 혼란스러웠다.

“으아아악!”

꾸벅꾸벅 졸던 걸화가 말의 꼬리 쪽으로 헤까닥 넘어갔다.

낮보다는 느려졌지만, 말이 달리는 속도는 무시할 수 없었다.

걸화 옆에 있던 연천이 상체를 쭉 뻗어 말에서 떨어지는 걸화를 잡았다.

팽호연은 세상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크어엉… 드렁… 크러렁… 크으응…….”

잠시 들렸던 식당에서 요기하고, 걸화의 말을 처분했다.

연천과 같은 말을 탄 걸화는 연천에게 반쯤 드러누워서 코를 골아댔다.

아래, 위로 쉼 없이 움직여대는 말 위에서 잠든 걸화는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어찌 저리도 잘 자는지…….’

연천은 걸화가 신기했고, 팽호연은 걸화와 연천이 꼴 보기 싫었다.

연천과 걸화가 심성이 나쁜 이들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팽호연은 마음 좋은 이들의 오지랖을 받아줄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저들의 무심한 행동이 눈에 거슬리고 언짢았다.

어디다 버려두고 가고 싶었지만, 자기들이 돕겠다고 앞장서서 가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하북팽가에 도착했을 때, 일행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씻지 못해 꼬질꼬질 한 것은 물론이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아이구… 허리야… 아구아구… 내 허리…….”

달리는 말 위에서 절반쯤 드러누워 자던 걸화가 허리를 부여잡고 어기적대며 말에서 내렸다.

돕겠다는 마음만은 감사히 여겨 오는 내내 꾹꾹 눌러 참았던 팽호연은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엄청난 사자후를 토해낼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집에는 아버님도 계시고 무엇보다 아픈 누이가 있으니 참아야 했다.

혹여, 연천에게 잘못했다가 당가와 척을 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중독된 누이가 있으니 또다시 당가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으니.

지금 아쉬운 것은 팽호연이었다.

터질 것 같은 성질을 삭이는 팽호연의 호흡이 들쑥날쑥했다.

당가주의 쓸데없이 과도한 배려로 당가를 출발하기 전에 집으로 전서구를 보냈었다.

그 덕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팽가의 시종과 하북 팽가의 가주이자, 팽호연의 아버지인 팽청강까지 나와 있었다.

“아버님!”

팽호연이 팽가의 가주 팽청강에게 다가갔다.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쓸모없는 두 인간을 데려온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고생이 많았다. 그래, 이분들이시냐?”

팽청강이 연천과 걸화를 보고 물었다.

“네.”

팽호연이 짧게 대답했다.

당가주가 옆에 있는 통에 전서구에 웬 돌팔이와 함께 가게 되었다고 쓰지 못했다.

기대에 찬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팽호연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제 여식을 위해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팽청강이 연천과 걸화에게 예를 다해 인사했다.

연천과 걸화를 극진히 대하는 아버지를 보며 팽호연은 생각했다.

‘그냥 혀 깨물고 죽자, 이 자리에서 확!! 죽자 죽어.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당가까지 갔다 온 것이 아닌데… 아버지 죄송합니다. 누이! 내가 미안하오.’

사내의 체면이고 뭐고 울고 싶었다.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백연천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아우 배걸아라고 합니다.”

연천이 팽청강에게 공손하게 자신과 걸화를 소개했다.

연천 옆의 걸화도 그럴듯한 얼굴로 포권하며 예를 다했다.

팽호연은 두 사람이 멀쩡한 척하는 것도 보기 싫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팽청강의 말에 걸화가 입을 쩍 벌리고 웃었다.

“아닙니다, 우선 씻고 소저부터 보겠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목욕물과 깨끗한 옷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픈 소저를 보는데 이런 행색은 좋지 않을 듯싶어서….”

연천이 먼지를 뒤집어쓴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천은 표정 없는 팽청강의 얼굴에 담긴 조바심을 읽었다.

딸자식이 사경을 헤매는데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 마음을 졸이면서도 차마 손님을 재촉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기에, 먼저 환자를 보겠다 한 것이었다.

연천의 말에 팽청강의 얼굴이 밝아졌고, 팽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누이를 치료하기 위해 모셔온 의원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해독에 성공하지 못했다.

연천도, 새로 모셔올 다른 의원도 해독을 못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뻔히 돌팔이인 줄 알면서 누이를 보이는 것에 마음이 쓰라렸다.

몸져누운 누이에게 미안했고, 기대하는 아버지에게 죄송했다.

팽호연이 어찌 생각하든 말든 연천은 서둘러 먼지를 씻어내고, 기다리고 있던 시종을 따라 팽이령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팽청강과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팽호연이 함께 있었다.

중독된 팽이령을 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참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팽이령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는데, 얼굴과 몸 전체의 살결에 푸릇푸릇한 빛이 섞여 있었다.

숨이 고르지 못하고 상당히 미약했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나빴다.

팽호연이 왜 그리 서둘렀는지 이해가 되었다.

연천이 심호흡을 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팽이령의 손을 잡았다.

팽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놈의 멱살을 잡고 끌어다 집 밖에 패대기치고 싶었다.

쉬지 않고 당가까지 가느라 힘들었던 것부터 당가에서 위협을 받고 쫓겨났던 것, 집으로 오는 내내 사람의 성질을 벅벅 긁어대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기 입으로 어쩌다 보니 해독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저놈이 누이의 손목을 잡는 꼴을 보려니 복장이 뒤집혔다.

아버지와 누이를 생각해서 참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었다.

어서 이 짓거리가 끝나기를, 저 돌팔이를 한시라도 빨리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있기만을 바라는 팽호연이었다.

팽이령의 손목을 잡은 연천이 조심스레 기운을 밀어 넣었다.

팽호연이 연천을 노려보았다.

연천의 미간이 패였다.

‘……?’

팽이령의 몸속에 독이 없었다.

연천에 비하면 팽이령의 기운이 탁했기에 기운을 정화하고 있기는 했지만, 독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의 기운이었다.

연천은 눈을 감고 신경을 더욱 집중시켜 내공을 돌렸다.

대맥을 훑고 미세한 세맥, 그것보다 더욱 가늘고 여린 맥까지 훑으며 감각을 돋우어도 독은 없었다.

연천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독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연천은 독을 배제하고 이령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기운이 부족했다.

무언가가 기운의 흐름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연천의 맑은 기운이 팽이령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폈다.

머리끝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관찰했다.

‘……?!’

연천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령의 심장 부근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기운을 심장으로 밀어 보냈다.

팽이령의 심장박동은 심하게 미약했다. 심장을 꽉 죄어놓은 것처럼 제대로 뛰지 못했다.

힘에 부쳐 겨우 허덕이는 심장박동으로 인해 혈액이 제대로 돌지 못했고, 고인 기운과 미세하게 흐르는 혈류가 팽이령의 피부를 거뭇하게 만들고 호흡을 약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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