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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54화 (54/230)

54화

비쩍 마른 당상만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연천아! 수련이가 기억나지 않느냐?”

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 년 전, 당가에 왔을 때 같은 놀았던 조그만 여자아이가 있긴 했었다.

당과를 나누어 먹고 함께 마당을 뛰어다니고, 나무에 매달려 놀았던 기억이 있었다.

“허허! 사내가 이래서 되겠느냐? 네가 수련이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느냐?”

당상만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네? 네… 네? 제… 제가요?”

연천이 말을 더듬거렸다.

“…….”

눈을 내리깐 당수련의 두 볼이 수줍게 붉어졌다.

“그래, 당과 몇 개를 얻고는 좋다고 입을 맞추었지. 내가 그때 혼약을 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

당상만의 얼굴은 정말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고,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 무슨… 그…….”

연천의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허허허… 왜 싫으냐? 우리 수련이 정도면 정혼 하고 싶은 자가 어디 한둘인 줄 아느냐?”

당상만이 의뭉스럽게 물었다.

“…….”

연천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아버지! 어찌 이리 소녀를 놀리시어요!”

당수련이 붉어진 얼굴에 새치름한 눈을 하고 방을 나섰다.

연천은 벌게진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백회에 연기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도록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 * *

연천과 그의 숙부인 당상만, 두 사람만 방에 남았다.

고요한 방 안,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숙부님!”

연천이 묵직하게 당상만을 불렀다.

당상만은 그의 의형이 ‘상만아’하고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목소리의 높낮이와 음색, 묵직한 분위기까지 어찌나 닮았는지, 원…….

“그래, 연천아.”

비쩍 골은 당상만의 표정은 푸근했다.

의형을 떠올리게 하는 조카와 마주하는 것이 흡족했다.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렵게 입을 연, 연천의 얼굴은 어두웠다.

스승님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연천의 마음은 무거웠다.

스승님에 대해 물어볼 곳이 아니,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을 해줄 사람이 숙부뿐일 것 같았다.

제발, 아주 훌륭하고 좋은 분이라고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뭔가 엄청난 누명을 써서 세상에 나쁜 평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 스승님이야…….”

당상만이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네 스승님이야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것을 어찌 내게 묻는 게냐?”

당상만은 연천의 물음에 대한 답을 회피했다.

의형의 바람대로 연천이 의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더 이상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제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연천은 답답했다.

“무림행을 떠나기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더냐? 같은 답이다. 네 스승은 산골에 홀로 사는 촌부일 뿐이었다.”

당상만은 연천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숙부님! 스승님은 제게 그저 스승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부모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부모의 아픔을 어찌 자식이 함께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연천은 숙부를 설득시키고 싶었다.

“형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다. 형님이 원했다면 네가 형님께 그리 졸랐을 때 이야기해 주셨을 게야. 형님은 너를 키우고, 너를 보며 행복하게 영면하셨다. 그것으로 되었어, 너는 너의 삶을 살거라.”

당상만이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걸화와 함께 무림행을 하면서 연천은 여러 번 스승님의 과거를 캐는 것을 그만두는 것은 어떨까 하고 고민했었다.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희대의 악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스승님을 가슴에 묻어 둘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세상 사람들이 스승님을 모른다면 연천도 이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연천이 무림에 나와서 알게 된 것은, 연천 자신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스승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스승님은 살인귀였다.

“연천아!”

당상만은 혼란스러워하는 조카를 따뜻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의형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의형은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제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림행을 다니며, 스승에 대한 풍설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연천이 짊어지든 버리든,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었다.

“스승님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자식이 부모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모두가 스승님을 욕한다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발 제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연천아… 형님은 당신이 모욕이 아니라 더한 것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것과 상관없이 살기를 바라셨다. 나는 형님의 유지를 따를 것이야, 너도 그리하여라. 수련이와 혼례를 올리고 당가의 사람으로 살아라.”

당상만은 연천을 사위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형이 연천을 부탁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켜본 연천의 성품은 올곧고 심성은 유순했다.

독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해독 능력은 중원 누구보다 탁월할 터이니 당가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든든한 가문이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욕심을 내면 끝이 없다.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 데릴사위로 들이기에 연천만 한 조건도 없었다.

인물도 그만하면 나쁘지 않았고, 무공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연천 정도면 딸아이의 짝으로 적당하다 싶었다.

“숙부님…….”

연천은 간절했다.

숙부가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한 마다만 해준다면, 그러면 좀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숙부는 답을 피할 뿐이었다.

숙부는 스승의 과거에 대한 말을 아끼는 대신, 연천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천을 아끼기에 그리하는 것은 알지만, 연천은 숙부에게 다른 말을 듣고 싶었다.

세상이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네가 당가의 사람이 되면 당가라는 이름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그 안전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너라, 너는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른다.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세상을 바꾸려 했다가는 너만 다치게 될 뿐이야.”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스승에 대한 애정이 과해 저리 고집을 피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당상만은 연천의 무림행을 찬성했다.

세상은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아이도 배워야 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기는 하겠지만, 어찌 처신하는 게 더 나은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수련이와 짝을 지어주면 잘 살 것이라 생각했다.

연천이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실컷 세상 구경을 하려무나,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경험해 보거라. 그리고 돌아와서 내 말대로 하여라.”

연천을 보는 당상만의 눈빛은 따뜻했다.

“…….”

연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천에게 대답을 한다는 것은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뜻이 된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일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무림행을 누리려무나. 세상을 보는 너의 눈과 귀가 열리게 되면, 그때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당상만이 연천을 달랬다.

“네… 숙부님…….”

연천은 고개를 숙여 당상만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연천은 울적했다.

연천 일행은 이른 새벽 하북 팽가로 갈 채비를 했다.

시종이 그들이 준비 중인 것을 알렸는지, 당지상이 연천이 묵는 방으로 들어왔다.

“아우! 벌써 준비를 하는겐가?”

“네, 형님. 준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연천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아버님께서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도 좋으니 꼭 뵙고 인사를 하고 가라 하셨네.”

연천을 보는 당지상의 눈빛은 따뜻했다.

“네.”

연천이 당지상과 함께 당상만의 방으로 향했다.

연천은 곤히 잠든 숙부를 깨우는 것이 영 마음이 불편했다.

몸도 좋지 않은 숙부는 계속 주무시게 하는 것이 옳을 듯싶었지만, 당지상은 부득불 아버지인 당상만을 깨웠다.

당상만의 성격상 연천을 그냥 보내면 나중에 당지상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기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금방 잠에서 깬 당상만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연천을 보았다.

“하북 팽가로 간다고?”

당상만이 물었다.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하여.”

“당가에는 또 언제 들르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몸 건강히 하고 꼭 당가에 다시 들르거라.”

“네, 숙부님.”

“그리고 내 이야기는 천천히 잘 생각해 보거라.”

“네…….”

“이것은 여비이니 챙겨두어라”

당상만이 묵직한 전낭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주신 것도 아직 다 쓰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쯧쯧, 사내는 무릇 주머니가 든든해야 쓰는 법이다. 받아 두거라.”

“감사합니다.”

“그래, 몸을 잘 챙기도록 하고.”

“네.”

연천은 숙부에게 큰절을 올리고 그의 방을 나왔다.

당가의 정문에서 배웅하는 당지상에게 연천이 인사했다.

“형님, 이리 융숭하게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가 아버님을 해독해 준 것이 고맙지, 우리 그런 인사치레는 그만하세. 몸 상하지 않게 다녀보고 꼭 다시 오게나.”

“네, 형님”

당지상과의 인사가 끝나자, 그의 뒤에 숨은 듯 서 있던 당수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화려한 꽃분홍의 유군을 차려입은 수련은 이른 아침인데도 머리 장식부터 화장까지 어디 하나 빠짐없이 곱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대협! 아버님을 구해주신 일은 소녀가 결초보은하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시고 꼭 다시 당가에 들려주시어요.”

고운 목소리로 연천에게 인사를 했다.

‘하! 꼭두새벽부터 머리에 꽃 꽂고 나와서 뭐 하는 짓이야? 눈두덩이는 얻어맞았나? 시퍼래가지고… 아침부터 고기 먹고 입도 안 닦았나 봐? 번들번들…….’

수련을 보는 걸화의 눈꼬리가 가늘게 찢어졌다.

수련의 치장이 손님을 배웅하기에 조금 지나친 면이 있기는 했지만, 한창때의 여인이니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많은 것이야 당연했고 잘 보이고 싶은 이가 있어 조금 과하게 치장한 것도 이해가 되었건만, 걸화는 그 하나하나가 꼴 보기 싫었다.

“제게는 숙부님이 되십니다. 그리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럼 소저도 안녕히 계십시오.”

연천이 예를 다해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수련이 돌아서는 연천을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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