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숙부를 만나다 (下)】
“으아아아악!”
“아악!”
“으헉…….”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사내의 새하얀 검이 눈부시게 환하고 밝은 빛을 발했다.
검을 감싸던 자잘한 뇌전이 번쩍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덮쳤다.
포졸들은 제자리에서 몸을 부르르 떨다 하나둘 바닥으로 쓰러졌다.
백 명이 조금 못 되는 포졸들이 모두 바닥과 조우하는 데는 일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
현령은 후회했다.
‘끝까지 살살 달래서 보낼 것을…….’
마지막으로 쓰러진 포졸의 떨림조차 사라지자 꽤 큰 공터에는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현령도 마을 주민도, 사내도 포두도 꼼짝하지 않았다.
기둥에 묶인 사내들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린아이 하나가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외치더니, 기둥에 묶여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비단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현령도, 그 옆에 서 있던 포두도 아이를 말리지 못했다.
아이는 아비의 몸을 묶은 새끼줄을 작은 손으로 풀려고 낑낑거렸다.
망설이던 아이의 어미가 함께 달려들어 줄을 풀었다.
그것이 시작인 듯, 묶인 사내들의 가족들이 뛰어들어 줄을 풀기 시작했다.
공터를 에워싸고 있던 주민들의 눈빛이 변했다.
사내 하나가 현령에게로 뛰어나가자, 연이어 현령과 포두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몽둥이를 주워서 현령의 몸뚱이를 두들겨 대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되는대로 내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뭉쳐진 곳을 비집고 들어가 손톱자국 하나라도 내보려는 마을 사람들이 현령과 포두를 겹겹이 에워쌌다.
공터는 순식간에 비명과 악다구니, 땀과 열기로 가득 찼다.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사람 몇이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광기였다.
상황을 보던 몇몇이 포졸들이 흘린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때, 사내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인명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많소. 그 긴 날 동안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로 남고 싶거든 말리지는 않겠소. 허나, 인간답게 살고 싶거든 살인만은 참으시오.”
“저자가 내 아비를 죽였습니다!!”
누군가가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그대의 아비가 그대 손에 피를 묻혀 복수하기를 원할 것 같소? 아니면 그대가 인간답게 살기를 원할 것 같소?”
질문하는 사내의 낮은 목소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 확고했다.
“…….”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그대들이 결정할 일이오.”
사내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공터와 사람들의 마음에 울렸다.
그 후, 뇌전에 맞아 기절한 포졸들은 옥에 밀어 넣었고, 되는대로 쥐어터진 현령와 포두는 마을 빈터의 기둥에 묶어 두었다.
당상만은 사내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그 주변을 얼쩡거렸지만, 사내 주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득실거려 쉽지 않았다.
사내는 현령의 곳간을 열어 오랫동안 주렸던 마을 사람들의 배를 채웠다.
마을은 오랜만에 주어진 풍족한 음식에 잔치를 여는 것처럼 흥겹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리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을에서는 중앙으로, 중앙에서 궁으로 상납해야 하는 돈과 물자가 있었다.
세가 끊기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갑자기 현령과 포두가 보이지 않으면 의문을 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관리 중에는 다른 지역에 처자식이 있거나 첩이 있는 자들도 있었다.
계속 나타나지 않으면 누군가 찾으러 올지도 몰랐다.
마을의 대표는 사내와 오랫동안 논의했다.
당상만은 포기하지 않고 사내의 주변을 배회했다.
며칠 뒤, 관과 현령의 집, 포두와 포졸의 집까지 탈탈 털어 돈이 되는 물건은 모두 긁어모은 마을 사람들은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갈 곳이 있는 자들은 돈을 나누어 받고 먼저 떠났다.
이 마을이 아니고는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사내와 함께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당상만이 거대한 무리를 이끌 준비를 하는 사내 앞을 막아섰다.
“어디로 가시오?”
사내가 웃었다.
“그것을 알려주면 어찌하겠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상만은 사내와 헤어지기 싫었다.
제대로 통성명도 못 했는데 이리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도 없었다.
“내 당상만이라고 하오. 대협과 이야기 좀 나누고 싶소만, 나도 데려가면 안 되겠소?”
“미안하오, 이들의 안전을 위해 그것은 좋지 않을 듯싶소.”
사내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 그저 대협의 무공과 그대의 협의를 흠모해서 그러오. 나도 좀 데려가 주시오.”
당상만이 사정조로 말했다.
저렇게 가버리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사내가 웃었다.
“고맙소.”
“대협!”
당상만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눈앞의 사내를 정말로 존경했고, 가까워지고 싶었다.
젊은 당상만의 눈에는 그 진심과 절절함이 담겨있었다.
“…….”
사내가 당상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마주 보는 당상만도 사내를 경애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석 달 뒤, 사천의 자화루에서 봅시다.”
사내의 말에 당상만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대협! 정말이지요? 그때 꼭 나오셔야 합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때 뵙는 겁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당상만이 몇 번이고 약속을 확인했다.
“잊지 않겠소.”
사내는 짧게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 * *
서안의 한 마을은 하루아침에 마을 주민이 모두 사라졌다.
아사 직전에 구조된 현령과 포두, 포졸만 있는 마을이 되어버렸다.
주민이 있어야 일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주민이 없으니 세금도 걷지 못했고, 현령도 포두도 포졸도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현령과 포두는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주민 모두를 잃은 마을의 관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꿀 사람이 없는 땅뙈기밖에 없었다.
일할 사람이 없는 마을의 논과 밭과 산은 쓸모가 없었다.
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치가 없었다.
다스릴 이가 없으니 더 이상 현령도 아니고, 지킬 이가 없으니 포두도 포졸도 아닌 그저 일개 백성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관직에서 깔끔하게 쫓겨났으니, 이제 그들은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야 했다.
남은 땅뙈기와 딸린 세금과 함께 말이다.
어설픈 농사꾼에게 하늘과 땅은 인정 따위를 베풀지 않았다.
그 대가는 굶주림으로 되돌아왔다.
현령과 포두와 포졸은 배곯지 않기 위해서 뼈가 부서져라 하루 종일 땅을 갈고, 김을 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게 백성의 삶이었고, 그들은 백성이었다.
* * *
당상만은 이름도 문파도 나이도 모르는 사내를 잊지 못해, 사내와 만나기로 한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만나기로 한 날짜보다 이레나 먼저 자화루에 도착한 당상만은 혹여 사내가 나오지 않을까 봐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했다.
다행히도 사내는 딱 약속한 날에 도착했다.
석 달을 목을 빼고 기다리던 그 맑고 청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대협! 약속을 지키셨구려, 그간 안녕하시었소.”
당상만의 반가운 인사에 사내는 미소로 답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어찌 되었소?”
당상만이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좋은 곳에 정착하였으니 걱정 마시오.”
사내의 잔잔한 미소는 맑았다.
당상만은 또래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것을 알고, 그가 말로만 듣던 반로환동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느낀 사내의 반듯한 됨됨이와 온유한 성품에 더욱 호감을 느꼈다.
당상만은 의형제를 맺자고 졸라댔다.
답 없는 사내에게 다짜고짜 형님이라 부르며 쫓아다녔다.
* * *
중독되어 달포 만에 주화입마에서 깨어나, 연천을 보는 당상만의 눈빛은 아련했다.
언제나처럼 연천을 볼 때면 의형에 대한 추억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의형을 보았을 때의 그 청명하고 맑은 미소와 협의 넘치고 당당하던 모습, 모든 것을 잃고 삶을 포기했던 그가 연천을 주워와서 다시 의욕을 가지던 모습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련하고 따뜻하고, 가슴 한편이 어릿해지며 의형에 대한 그리움이 일렁였다.
“으흠…….”
당지상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죽어가던 아버지가 해독되어 깨어난 것은 말할 수 없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당가 사람들의 수고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아버지가 잘못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할 수만 있다면 속을 끄집어내어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에게 느낀 작은 섭섭함이 당지상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켜 파도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찌 소자에게 백부님께 연통할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우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무섭습니다.”
당지상이 이번에는 적당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물었다.
해독에 관해서는 당가의 누구보다 백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당가주가 된 당지상에게 백부와 연통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네 백부는 돌아가셨고, 연천이는 무림행을 다니고 있어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당상만이 딱 잘라 말했다.
당지상은 다시금 긴 숨을 내쉬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당가주라면 마땅히 당산의 진법을 여는 방법을 알아야 했건만, 아버지는 그것 또한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주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섭섭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렸다.
한 해, 두 해 미루던 것이 벌써 다섯 해가 넘어가는데도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말이 없었다.
전대 가주인 당상만은 현가주인 당지상에게 당산에 들어가는 진법을 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곳에 의형과 연천이 숨어 살았다.
진법을 열 수 있는 가주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고는 하나, 그곳은 엄연히 당가에 소속된 산이었다.
외부인을 들여 살게 했다는 것을 알면 당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필요 이상의 정보를 주어서 모두가 위험한 상황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당지상은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섭섭한 말은 아버지가 회복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리라.
“아버지!”
당상만의 방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작고 하얀 얼굴을 가진 여인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당상만에게 달려들었다.
당상만의 딸 당수련이었다.
당수련의 새까만 눈동자 주위가 붉게 변했다.
“아버지! 괜찮으신 겁니까? 이리 앉아 계셔도 되는 것입니까?”
당수련이 당상만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연천이가 어찌나 깨끗이 독을 정리하고 몸을 정화 시켰는지 이리 가볍고 개운할 수가 없다.”
당상만의 말에 당수련이 고개를 돌려 연천을 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대협! 아버지를 치료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연천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