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사천당가에서……】
“당, 상자, 만자 쓰는 분입니다.”
연천이 또박또박 숙부의 이름을 말자, 위사가 심각한 얼굴로 연천의 위아래를 훑었다.
“네…? 그분을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제게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잠시 머뭇거리더니, 위사 중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천과 위사의 말을 듣고 있던 팽호연이 깜짝 놀라며 연천에게 물었다.
“뭐요? 당가에서 일하신다던 숙부님 성함이 당상만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놀란 팽호연에게 연천은 태연하게 답했다.
팽호연은 놀란 눈으로, 천연한 얼굴의 연천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안으로 들었던 위사가 나왔다.
“안으로 드시라고 합니다.”
위사의 굳은 듯한 얼굴에 경계심이 서려 있었지만, 피곤한 일행은 위사의 미세한 분위기를 파악할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연천을 필두로 걸화와 팽호연 일행은 위사의 뒤를 따라, 탁자와 의자가 놓인 제법 큰 방으로 안내 되었다.
위사가 방을 나가자, 일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들이 안내된 넓은 방은 문이 있는 쪽을 제외한 세 벽면이 화려한 족자와 휘장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천장까지 빽빽하게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팽호연은 그 곳곳에 당가의 위험한 장치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그런 팽호연의 생각과 상관없이, 연천은 오랜만에 숙부를 뵐 기대감에 차 있었다.
잠시 후, 일행이 앉아있는 방의 문이 열리고, 연천의 기대를 무너트리며 제법 나이가 있는 노인이 들어왔다.
그 뒤로 열 명 남짓한 무사들이 따라 들어와 노인의 뒤를 감싸듯 도열했다.
연천은 의아한 얼굴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옆으로 찢어진 노인의 눈은 일행을 향한 곱지 못한 시선이 더해져 섬뜩하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노인은 연천과 일행을 천천히 훑으며, 그들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가의 총관 당시월이라 하오. 누구를 찾아오셨다고 하시었소?”
당시월이 생김만큼이나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상만이라는 분입니다.”
연천이 또박또박 숙부의 이름을 대었다.
이미 내천자가 새겨진 당시월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
“그분을 왜 찾는 것이오?”
연천을 향한 당시월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당시월의 날 선 말투에도 연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분이 제 숙부 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일한다고 하셔서 찾아뵈러 왔습니다.”
“무어라? 그분이 숙부라고? 여기서 일을 한다라, 허! 참!”
당시월이 연천의 말에 어이없어했다.
“……?”
연천은 실소를 터트리는 당시월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연천을 살피던 당시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네를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 자네 이름이 뭔가?”
“백연천이라고 합니다. 숙부께서는 여기서 일을 하신다고 제게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연천은 당시월의 물음에 자신이 당상만에게 들은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 백? 연천? 그런데 그분이 숙부라고?”
당시월은 기가 찬 표정으로 연천을 뜯어보았다.
당시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뭐… 사기꾼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조카라고 우기려면 최소한 집안사람인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름이 백? 뭐라고?
당당한 얼굴로 헛소리를 해대는 놈 때문에 기가 막혔다.
‘당상만? 당상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걸화가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서 듣던 팽호연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당상만이라니?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당상만이라면 당가의 전대 가주가 아니던가?
팽호연은 당가 총관 앞에서 그 이름을 불러대며, 자기의 숙부를 찾는 백연천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가 총관의 얼굴을 보건데 아무래도 잘못 엮인 것 같았다.
연천을 믿고 기다릴 수만 없었던 팽호연이 급히 나섰다.
“소인은 하북팽가의 차남 팽호연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독에 당한 사람이 있어 당가에 부탁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당시월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무어라! 부탁이 있어서 왔으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어디서 숙부니 조카니 하는 거짓을 늘어놓는 게요!”
당시월이 역정을 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천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신경이 예민해진 터라, 그의 일행인 팽호연의 말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연천은 자신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당시월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숙부가 일하는 곳이라, 불편한 감정을 누르고 최대한 공손하게 다시 말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숙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뭐라!! 이런 사기꾼 같은 놈들! 더 들을 것도 없다! 거짓을 늘어놓는 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니, 당장 이곳에서 꺼지거라!”
당가 내에서도 몇몇만 아는 비밀이지만, 태상가주인 당상만은 지금 중독되어 위독한 상태였다.
당시월은 이런 시기에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들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얼른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팽호연과 연천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우리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이 사천당가라는 곳은 뭐가 어찌 된 곳이기에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못 하게 막는 것인지, 연천은 숙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순순히 나가거라.”
당시월이 연천과 그의 일행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말했다.
팽호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 대협… 일단 나갑시다.”
팽호연이 연천에게 말했지만, 연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숙부님을 못 만나게 하는 당시월이 이상하기만 했다.
“대협은 나가시오. 나는 숙부가 걱정되어 도저히 나가지 못하겠소. 걸아를 데리고 나가 주시오. 염치없지만 부탁하오.”
연천의 말에 팽호연은 난감했다.
이곳에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당시월과 무사들의 행동으로 보건데 나가지 않으면 공격을 할 태세였다.
수적으로도 자신들이 약세이고 이곳은 당가였다.
어떻게 중독 된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대협! 대협의 마음은 이해가 가나 여기서 버티고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여기는 당가요! 그 당가란 말이오. 경거망동해서는 아니 되오.”
팽호연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팽호연을 보며 조롱이 담긴 웃음을 흘린 당시월의 시선이 연천에게 향했다.
당시월의 당당하면서도 비웃음이 섞인 얼굴은 ‘네 놈은 어찌할 테냐’라고 묻고 있었다.
연천과 당시월은 눈을 떼지 않고 상대를 응시했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당장 무슨 일이 터질 듯 고조되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쪽이 불리했다.
딱 봐도 비밀장치가 숨겨져 있는 방이었다.
당가에서 당가 총관의 성질을 건드려서 병신이 되는 정도로 끝날 리도 없었다.
일이 터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시신을 적당히 처리하고 입 닫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알고 있소, 하지만 숙부님은 내게 부모 같은 분이오. 그분의 안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소. ”
연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팽호연은 연천과 당시월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에잇! 소협, 어서 갑시다.”
연천을 쏘아보는 당시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걸화에게 말했다.
“난 형님 안 가면 안 가요!”
“하아…….”
팽호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팽가에서 왔다 하고 부탁을 하였으면 일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일이 생각과 다르게 꼬여가는 것도 속이 상한데 위험한 것이 뻔한 길 앞에서 두 사람이 버텨댄다.
짜증이 치밀었다.
“걸아는 무공을 익히지 못했소. 아우를 부탁하오.”
걸아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는 연천과 버티는 걸아, 당장 독을 쏘아댈 것 같은 당시월.
팽호연은 셋을 번갈아 보다 걸화를 잡아 끌어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당시월의 기세에 마음이 급했다.
이백이 팽호연을 도왔다.
“놔! 놓으라고! 놔! 형니임!!”
걸화가 나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팽호연과 이백은 버둥대는 걸화를 꽉 잡고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혀엉니이임! 이야……!”
걸화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더니 그마저도 사라졌다.
당시월이 연천을 쏘아보았다.
“훗! 아직 어려 세상을 모르는 모양이군, 이곳은 당가다. 너같이 치기 어린 녀석이 함부로 할 곳이 아니야! 어린 네 녀석의 목숨이 아까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가거라!”
당시월의 말에도 연천은 꼼짝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숙부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당시월의 매서운 시선에도 연천은 차분하게 부탁했다.
“하……!”
당시월이 코웃음을 치더니 작게 손짓을 했다.
연천을 향해 작은 비침 몇 개가 날라 왔다.
연천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당시월이 위협하기 위해 날란 비침에도 연천의 꿋꿋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당시월이 불쾌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당가에서 침이건 뭐건 날리면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우직하게 서 있는 연천이 불편해서 말이다.
“그 나이에 실력이 나쁘지는 않다만 너는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했어.”
당시월은 연천에게 더 강하게 말했다.
스스스… 스!
당시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천의 머리 위에서 침들이 쏟아져 내렸다.
연천의 머리 위에만 커다란 먹구름이 낀 듯, 비처럼 침이 퍼부었다.
연천이 급히 자리를 옮겼다.
연천의 신형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음에도 얼굴을 막은 그의 왼쪽 팔에는 두 개의 침이 박혔다.
연천은 팔에 박힌 침을 뽑아내서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당가에서 사용하는 침이다. 그리 뽑아낸다 해도 곧 네 몸은 감각이 사라지고, 점점 굳어 갈게야.”
당시월이 연천을 제압하기 위해 마비산이 발린 침을 퍼부었다.
마비산에 중독되면 몸이 굳고 의식을 잃어, 두세 시진 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월은 연천을 마비시켜 멀리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
연천은 침을 뽑아낸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난감해했다.
자신은 그저 숙부님이 잘 계시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당가 사람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