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가자! 사천으로!】
걸화는 이틀을 꼬박 앓았다.
연천은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걸화 곁을 지켰다.
걸화는 악몽을 꾸다 벌떡 일어나곤 했는데, 연천이 토닥이면 금세 다시 잠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떼어내 버릴까 싶어 요리조리 도망을 다녔었는데….
지금은 이 아이가 잘못되거나, 옆에 없으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났다.
축 늘어져서 있던 걸화가 묵직한 눈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어렵사리 소리를 내뱉었다.
“형님… 나 배고파…….”
이틀 만에 의식을 찾은 걸화의 첫마디였다.
까칠한 얼굴의 연천이 피식 웃었다.
터실터실한 입술이 갈라졌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잠긴 목에서 나온 소리는 매끄럽지 못했다.
잠시 후, 연천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어 걸화의 입에 넣어주었다.
꺼칠한 연천이 환자인지, 날름날름 받아먹는 걸화가 환자인지 헷갈렸다.
그만큼 연천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꺼억… 형님… 살 빠진 것 같아……. 맨날 혼자 국수만 먹었죠? 우리 오늘 저녁은 오리고기에 죽엽청으로 든든히 먹을까요?”
죽 한 그릇을 먹고 기운을 차린 걸화가 말했다.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한 연천이 또 웃었다.
걸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틀 내내, 연천은 두려웠다.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무서웠다.
이 아이가 영영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겁이 났다.
걸화는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연천의 마음을 짓누르던 커다란 불안의 덩어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야 숨을 바로 쉴 수가 있었다.
“죽엽청은 빼고 오리고기를 먹자.”
연천이 무거웠던 마음을 숨기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치이… 형님은 뭘 몰라, 죽엽청 없이 오리고기를 뭔 맛으로 먹어요!”
걸화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이제 괜찮은가 보구나.”
연천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이틀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픈 사람이 걸화가 아니라 연천이라고 할 정도로 얼굴이 상해있었다.
* * *
걸화는 오리고기를 손으로 크게 뜯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손에 들린 커다란 덩어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하겠다.”
“배거 너머 거파서 도저이 천턴히 몬 먹게서요.”
걸화가 입 안 가득 고기를 넣은 채 말했다.
연천이 피식 웃으며 고기를 잘게 찢어 걸화 앞에 놓아주었다.
걸화는 잡히는 대로 입에 쑤셔 넣고 꿀꺽꿀꺽 삼켰다.
오리 한 마리와 만두 세 접시를 거의 혼자서 해치운 걸화가 기름이 번들번들한 입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기지개를 쫙 켰다.
“으아~ 배부르고 기분 좋다. 내일은 성도로 갈 거죠?”
걸화의 목소리는 아침까지 아팠던 사람이라 보기 어렵게 명랑했다.
“내일 하루만 더 쉬었다가 가자.”
걸화를 달래는 연천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하루를 더 쉬자고 하는 것이 걸화 때문인지 연천 자신 때문인지,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을 졸인 연천은 기운이 없었다.
“에이… 빨리 가야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일을 맞춰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서둘러, 하루만 더 쉬었다 가자.”
“웬일이래요? 하루도 안 쉬고, 바로 영친왕의 성 앞에 죽치고 있을 것처럼 하더니…….”
별것도 아닌 걸화의 말에 연천은 또 웃었다.
저러니 걸화가 모자란 사람 같다고 놀리지.
* * *
걸화가 의식을 차린 후 이틀이 지났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은 객잔에서 묵고 있었다.
걸화는 개방에서 쫓아올까 싶어 계속 연천을 재촉했지만, 연천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어 이틀이나 객잔에 더 묵었다.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채로 움직였다가 탈이 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잘 먹고 푹 쉰 연천의 낯도 제법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현닌! 인제는 가오.(형님! 이제는 가요.)”
걸화가 앞에 보이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속으로 욱여넣으며 말했다.
커다란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걸화를 보며 연천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아침에 나서 보자꾸나.”
이제는 길을 나서도 될 듯싶었다.
“이히히히히.”
걸화가 돼지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을 활짝 벌려 웃었다.
입속에 씹다 만 회백색 고기가 훤히 드러났다.
밥맛이 뚝 떨어지도록 지저분한 그 모습을 보고도 연천은 빙그레 웃으며 국수에 젓가락질을 해댔다.
열린 객잔 입구로 두 사내가 들어섰다.
“도련님! 잠깐이라도 쉬었다 가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지만 말들이 쉬어야 합니다.”
수수한 차림의 사내는 눈매가 날카롭고, 걸음이 반듯하고 자세가 곧았다.
무공을 익힌 자였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내의 시종이나 호위쯤 되는 듯싶었다.
“안다, 알지만 잠시도 마음이 편치가 못해 그런다…….”
마지못해 객잔으로 들어서는 사내의 경장은 꽤나 비싼 옷감으로 지은 것이었다
대충 보아도 돈 많은 집 도령이었다.
“어……?”
두 사내를 보던 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구로 들어서는 사내 중 한 명의 낯이 눈에 익었다.
미간을 좁혀 사내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연천은 거의 평생을 스승님과 단둘이 산속에서 살았다.
가끔 찾아오는 숙부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다.
숙부와 스승님이 아닌 사람은 만난 것은 산을 나온 요 몇 달이 고작이었다.
저 사내와의 인연은 그 몇 달 속에 있을 터였다.
“아……!”
문뜩 한 장면이 떠오르며 훈훈한 미소가 연천의 입가에 걸렸다.
팽호연은 힘없이 의자에 앉았고 그의 호위인 이백이 음식을 주문했다.
연천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팽호연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인사를 하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 여겨 그에게 다가갔다.
“그간 안녕하시었소?”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은 자리에 연천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팽호연과 이백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팽호연이 연천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인사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객잔에서 스치듯 전낭과 훈계를 건넨 것뿐이었으니.
연천은 자신을 누구라고 말해야 되나 고민했다.
“산서의 객잔에서 제자를 버리려던 그 스승이외다.”
고민하던 연천은 참으로 알기 쉽게 자신을 소개했다.
어찌나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을 했던지, 그 한마디에 팽호연은 연천이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아! 그러시구려, 안녕하시었소.”
팽호연도 인사를 건넸다.
걸화가 엉덩이에 기름 묻은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연천이 끼어든 것이 걱정이 되어서였다.
연천이 다가오는 걸화에게 말했다.
“걸아야! 기억나느냐? 산서의 객잔에서 내게 제자를 버리지 말라고 전낭까지 내어놓으셨던 그 대협이시구나.”
“아! 안녕하세요.”
걸화는 딱 봐도 안녕하지 못한 팽호연에게 인사를 했다.
“스승과 잘 지내는 모양이구려.”
팽호연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승님 아니에요. 제가 혼자 스승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고 주정을 한 것이라, 형님이 많이 곤란했을 겁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거지인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걸화가 그때의 상황을 짧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연천이 그리도 애를 먹으며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던 것을 걸화가 한 번에 정리해서 전달했다.
하긴, 그 당시에 연천이 똑같은 말을 했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한번 굳으면 다시 되돌리기가 힘든 것이었으니.
“아… 그랬소? 미안하오, 내가 그때 오해를 했구려.”
팽호연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오, 덕분에 이 아이랑 호형호제하게 되었소. 좋은 아우를 만들어 주어 내가 고맙소.”
연천이 정말 고맙다는 듯 말했다.
“형님… 이제 그만 자리로 가요. 이분들이 불편하신 거 같은데….”
걸화가 연천의 소매를 끌며 말했다.
남의 분위기, 눈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걸화의 눈에도 팽호연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오, 그대들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니 괘념치 않아도 되오. 내 길을 서두르고 싶은데 꼭 쉬어야 한다는구먼. 말도 힘들어하고 나도 피곤해 어쩔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쉬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렇소.”
팽호연이 자신의 앞에 앉은 이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지요, 이리 만나서 반가웠소. 부디 편히 쉬었다 가시길 바라겠소”
연천이 인사했다.
“대협과 소협도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오.”
걸화와 연천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의 자리에는 걸화가 먹고 남은 빈 접시뿐이었다.
“형님! 우리도 말 타고 갈까요?”
걸화가 자신도 말을 타고 싶어 물었다.
“말? 너 말을 탈 줄 아느냐?”
“당연히 모르죠, 거지가 말 탈 일이 어디 있겠어요? 형님도 말 못 타요?”
걸화가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탈 줄 알지, 어릴 때 스승님께 배워 타보았다.”
“그럼 잘 됐다. 나도 말 타는 것 좀 가르쳐줘요. 우리도 말 타고 가요오. 말! 말! 말! 말!”
걸화가 떼를 써댔다.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한번 타 보자꾸나.”
“이히히히히! 나도 내일은 말 탄다!!”
걸화가 신이 나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 * *
연천은 이른 아침 말 두 필을 구했다.
말 위에 훌쩍 올라타서 걸화에게 말 타는 방법을 설명했다.
선천적으로 무공이나 운동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 그런지 걸화는 쉽게 말 타는 것을 배웠다.
“이야! 신난다!! 으하하하!!”
좀 익숙해지자 뒤따르는 연천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을 내서 달려나갔다.
“이 녀석아! 천천히 좀 가자!”
연천이 박차를 가해 앞서 달려가는 걸화를 쫓으며 소리 질렀다.
“말 타고 그리 굼벵이처럼 기어서 되겠어요? 빨리 와요! 빨리!! 빨리 달려야 바람도 느끼고 풍광도 확확 지나가고 좋죠. 와~ 너무 신난다아!!”
걸화는 신이 나서 말을 달려나갔고, 연천은 걸화를 쫓았다.
연천은 힘껏 말을 달려 걸화와 속도를 맞추었다.
뒤에 있던 연천이 옆으로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걸화는 속력을 줄이지 않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