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동정호를 마주 본 자리에는 많은 객잔들이 줄을 서서 늘어서 있었다.
누구는 잉어찜이, 누구는 홍주가 원조라고 우겨대며 크게 다를 바 없는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동정호 분타의 개방도들은 동정호 앞 객잔을 하나하나 뒤졌다.
객잔 앞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놈들은 내쫓아야 할 대상이었지만, 개방도는 무시할 수 없었다.
중원에서 당과 하나라도 파는 장사치라면 구파일방의 하나인 개방의 영향력을 모를 리 없었다.
호의적인 객잔들의 도움으로 걸화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아이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만으로도 개방에서는 커다란 성과였다.
지금까지는 걸화가 있는 곳 근처도 알지 못했으니.
분타주는 걸화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총타에 보고했다.
단 한 가지, 걸화가 두들겨 맞았다는 것만 빼고.
동정호의 분타주 왕하적은 그날 이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 물세례를 맞은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벌떡 일어났다.
꿈은 언제나 비슷했다.
지저분한 다리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왕초 두침이 왕하적을 향해 양손을 비벼대며 헤헤거리다가 너덜너덜한 넝마의 소매를 쓱쓱 걷더니, 손바닥에 퉤―하고 침을 뱉었다.
그 손으로 뽀얀 얼굴의 걸화를 마구 쥐어박았다.
두침을 시작으로, 어디선가 나타난 패거리들이 떼로 몰려와 걸화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걸화가 노골노골해질 때까지 사정없이 난타했다.
그쯤에서 어디선가 방주가 나타났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고래고래 악을 써대면서.
격노한 방주가 펄펄 뛰며 분타주인 자신 앞에 떡하니 버티고서 서서 타구봉을 휘둘렀다.
꿈속에서도 ‘왜?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저 거지 놈이 그랬는데…’ 하는 생각과 ‘동정호 거지를 통솔하는 자가 바로 나 왕하적이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방주의 기세에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타구봉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견고한 타구봉은 방주의 분노가 더해져, 일격 일격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방주는 일순도 멈추지 않고 몸 곳곳을 작신작신 두들겨 댔다.
차라리 살수에 찔려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때쯤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면 진짜 몽둥이로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어디 한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땀범벅이 된 왕하적은 어디 가서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잠자다가 골병이 들 지경이었다.
‘내 그 거지 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같은 시간, 다리 밑 퀘퀘한 움막 안에서 잠을 자던 왕초 두침은 갑작스런 한기에 거적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 * *
“무어라고?”
기운 없이 침상에 누워있던 천상이 벌떡 일어났다.
“걸화 아가씨가 동정호 분타주를 통해 서찰을 보냈다고 합니다.”
염문강이 서찰을 건네며 말했다.
걸화를 놓친 후, 천상은 염문강에게 있는 대로 악을 써댔다.
쏟아지는 악다구니와 성질을 받아내면서도 염문강은 동요하지 않았다.
확고한 그의 얼굴을 보면 이런 일을 예상했던 것 같기도 했다.
보다 못한 장로들이 염문강에게 일을 쉴 것을 권했다.
자신의 전각에서 쉬든, 분타로 내려가 있든 방주의 성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집무실에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염문강은 꿋꿋이 천상의 옆을 지켰다.
“이리, 이리 줘 보거라.”
천상이 봉투를 받아 떨리는 손으로 입구를 찢었다.
누가 개방주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상에게 가지는 일관된 느낌은 호방하다는 것이었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호탕하고 시원시원했다.
대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명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호감이 가지만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걸 알기에 동정호 분타주도 밤잠을 설치는 것 일 게다.
그런 그가 딸아이 걱정에 자리까지 보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ㅇㅏㅂㅓㅈㅣ ㅈㅓ 걸화에요.
ㅈㅓ는 잘 지내고 있ㅇㅓ요.
개방에 있을 때 보 ㄷㅏ 훨씬 즐겁고 재ㅁㅣ있ㅇㅓ요.
걱정ㅎㅏ실까봐 ㅅㅓ찰 보내요.
일단은 걸부 형ㅇㅣ랑 걸윤이처럼 이 년을 계획하고 있ㅈㅣ만 어찌 될ㅈㅣ 약속은 못 해요.
절대로 저를 찾ㅈㅣ ㅁㅏ세요.
ㅈㅓ를 찾으면 ㄷㅏㅅㅣ는 ㅅㅓ찰도 보내ㅈㅣ 않고 꼭꼭 숨ㅇㅓ버릴 ㄱㅓ예요.
ㅇㅏㅂㅓㅈㅣㄱㅏ 보고 싶어요, 걸부형도… ㄱㅏ끔 걸윤이도 생각이 ㄴㅏ긴해요.
건강ㅎㅏ세요, 또 ㅅㅓ찰을 보낼게요.
참, 제 ㅅㅓ찰 심부름을 한 ㅇㅏ이는 개방 총ㅌㅏ에 넣ㅇㅓ주ㄱㅣ로 약속했으ㄴㅣ 꼭 그렇게 해주세요.
걸화 올림
천상은 떨리는 손에 서찰을 들고 읽어 내렸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옆에서 걸부가 같이 편지를 읽었다.
“걸화가 철이 들었나 보네요. 걱정하실까 봐 서찰도 다 보내고…….”
서찰을 다 읽은 걸부가 말했다.
“그래… 그랬나 보다, 이 개발새발 글씨체는 변하지도 않았구나.”
천상은 목이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걸윤이 걸화를 찾는다고 섬서에 있습니다. 동정호로 가보라고 할까요?”
걸부가 물었다.
“찾지 말라고 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
“음…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알아놓고, 만약을 위해 호위를 붙여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몰래 쫓아다니기만 한다면 괜찮을 듯싶습니다.”
“훗! 걸화가… 이 아비가 보고 싶다는구나…….”
얼마 사이에 형편없이 살이 내린 천상이 작게 미소 지었다.
“걸화가 철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 호통을 치고, 야단을 해도 듣지 않던 녀석이 무림행을 나간 지 얼마가 되었다고 어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방주님도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걸화가 돌아왔는데 방주님이 이리 누워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녀석이… 참…….”
천상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쓴 서찰을 보낸 딸아이가 기특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동정호 분타에서 걸화를 만났다던 아이를 수일 내로 데려온다고 합니다.”
“그래, 그 아이가 봤는데 걸화가 남장을 했는데도 거지꼴이 아니었다고 하지?”
“네.”
걸부도 미소를 띠었다.
“철이 들긴 드나보다.”
* * *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저물었지만, 달이 밝아 길이 훤했다.
“밤길 걷기 참 좋은 날이죠? 이참에 쭉 왕도까지 걸어가요.”
걸화가 씩씩하게 앞서 걸으며 연천을 재촉했다.
“걸화야, 저기 객잔이 있지 않느냐? 오늘은 저기서 묵고 가자. 해가 저문 지 한참이 지났다.”
연천의 목소리에는 걸화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었다.
“그럼 더 걷다가 숲속에서 야숙하는 건 어때요?”
걸화가 명랑하게 물었다.
“저 객잔에서 쉬자, 네 몸도 성치 않은데…….”
“괜찮아요, 저는 끄떡없어요. 걱정하지 말고 계속 가요.”
거짓말이다. 온 삭신이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파 죽어도 개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멀리 가야 했다.
“걸아야.”
연천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더니 걸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연천의 부드럽지만 묵직한 눈빛, 그 속에는 걸화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흠… 알았어요….”
걸화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은 큰방을 하나를 잡아서 같이 잘까?”
연천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걸화가 당황하며 두 손으로 앞섶을 가렸다.
사위가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가, 같이 자긴 뭘 같이 자요! 형님 잠버릇 고약해서 같이 못 자요!”
걸화가 버럭거리며 소리를 냅다 질렀다.
“누가 누구 잠버릇을…….”
역시 배걸화였다.
적반하장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다.
연천은 걸화가 쉬지 않고 계속 가려고 하는 것이 낮에 때린 자들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화의 수레 굴러가는 것 같은 코 고는 소리와 온 방을 돌아다니며 걸리는 건 다 걷어차는 잠버릇을 생각하면 같이 자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지만 걸화를 생각해서 크게 양보 것이었는데… 참…….
걸화는 단칼에 거절하고 객잔으로 총총총 걸어 들어갔다.
그날 밤 걸화는 객잔의 천정이 내려앉을 정도로 커다랗게 코를 골아댔다.
옆방에 누운 연천이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 피곤했구먼…….’
코 고는 소리도 계속 들으면 익숙해지는지 처음 같지 않게 잠이 잘 드는 연천이었다.
* * *
다음날 해가 하늘 꼭대기에 떴는데도 걸화는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불덩이처럼 올라, 의식이 깨었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연천은 객잔에 부탁해 급하게 의원을 불렀다.
허리가 구부정한 의원은 심각한 얼굴로 걸화를 진맥했다.
“몸이 쉬어야 할 때라고 신호를 보내면 쉬어야지 계속 무리면 이렇게 되지요. 지어드린 약을 먹이고 며칠 쉬면 나을 겝니다.”
늙은 의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연천은 별말도 하지 않은 의원에게 몇 번이나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걸화가 보았다면 또 얼빠진 짓을 한다고 놀려댔을 것이다.
‘내 잘못이지? 나 때문에 그런 거 맞지? 유모가 그렇게 된 거 나 때문이지? 그런 거 맞잖아!!’
걸화가 악을 써댔다.
‘…….’
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걸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유모, 미안… 으어어엉… 미안… 으엉…….’
걸화가 몸을 세게 뒤척이며 흐느꼈다.
“으흐흐흥… 으흥…….”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걸아야, 걸아야…….”
지켜보던 연천이 걸화를 흔들어 깨웠다.
걸화가 눈물과 땀이 뒤범벅된 얼굴로 눈을 떴다.
마음 깊은 곳이 갈라진 것처럼 진한 아픔이 남았다.
눈앞에는 연천이 걱정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냐? 물이라도 좀 줄까?”
걸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깊숙이 새겨진 아픔 때문에 물도 넘길 자신이 없었다.
흐느끼지도 울먹이지도 못하고, 텅 빈 얼굴에 눈물만 흘렸다.
연천이 걸화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연천이 무서운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스승님이 그랬던 것처럼.
“으흐흐흐흐… 흐흐흐으응…….”
그제야 걸화가 흐느꼈다.
한참을 서럽게 울어대다, 겨우 다시 잠이 들었다.
연천은 걸화를 조심히 침상에 눕히고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을 닦았다.
열이 많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