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사덕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심부름이고 뭐고, 그냥 멀리 도망을 가버릴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대체 개방은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를 이렇게 사지로 밀어 넣는 것인가?
그 편지가 문제고, 사달이었나 보다.
‘아… X됐다…….’
사덕의 오른편에는 개방의 동정호 분타주가 왼편에는 부분타주가, 뒤편에는 한 떼거리의 개방도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사덕을 완벽하게 포위한 배치는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앞은 비었는데… 잽싸게 앞으로 튀면 도망갈 수 있을까?’
무공을 익힌 개방도들이 이리도 버글거리는데?
이 방법 저 방법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걍 X됐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서찰을 전해줬으면 됐지!’
거기다가 용파를 보고 서찰을 전해준 이까지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럼 안녕히 가세요는 못할망정, 나를 악의 손아귀에 갖다 바치다니!! 사악한 개방 놈들! 이놈이고 저놈이고 역시 거지 놈들은 믿을 것이 못 돼!! 빌어먹을 거지 새끼드을!!’
사덕은 속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욕설을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분타주와 부분타주까지 합류한 개방도들의 무리와 함께 가는 곳은 자신이 살던 다리 밑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개방 놈들이 자신을 왕초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겨우 인생 십 년 살았지만, 남한테 해 끼치고는… 끼치고 살았구나…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것인가, 그게 다 먹고살자고 한 일이었는데…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다, 아이고… 불쌍한 사덕이…….’
사덕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삶을 위로했다.
‘대체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은자 한 냥에 서찰 심부름을 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나? 은자가 손에 들어왔을 때 그냥 튀었어야 하는데…….’
개방도가 되게 해주겠다는 말에 조금 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에휴… 그놈의 욕심이 문제야…….’
이렇게 된 이상 맞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죽도록 맞을 거 은자라도 지켜야지.’
사덕은 옷 위로 품에 넣어둔 은자를 더듬으며 다짐했다.
한데 다짐을 하면 뭐하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은자를 숨길 곳이 없는데.
‘이런 거지 같은 개방도 새끼들!!’
다리 밑에 있는 거지 굴에 도착하면 앞뒤 볼 것도 없었다.
못해도 반 시진은 흠씬 두들겨 맞고, 탈탈 털어 구걸한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다.
맞는 것은… 맞는 것도 무진장 무섭지만… 은자만은 절대! 절대 내어줄 수가 없었다.
사덕은 걸으면서도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은자를 숨길 방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 숨기겠는가? 분타주와 부분타주가 사덕의 양쪽에 있고 뒤로 개방의 거지들이 줄줄이 따라오는데…….
사덕은 입을 쩝쩝거렸다가 쫙 벌렸다.
다물었다 벌리기를 계속 반복했다.
‘삼키기에는 너무 큰가? 크다, 너무… 물도 없는데 이걸 삼킬 수 있을까? 살다 살다 은자가 너무 크다고 불평해도 해보는구나… 그래도 삼켜야 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삼켜야 한다.’
‘그런데 언제? 버글버글한 개방도들이 이리도 찰싹 붙어있는데, 미치고 팔딱 뛰겠다.’
저 멀리 거지 굴이 보였다.
사덕의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은 급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왕초 놈에게 꼼짝없이 은자 한 냥을 갖다 바치게 생겼다.
원통하고 억울하다.
‘이 더럽고 추잡스러운 거지 생활 청산해보나 했는데…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이런 기회를 날리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불쌍한 사덕이 팔자야……. 이놈의 팔자는 평생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 아이고…….’
* * *
왕초 두침은 늦은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드러누웠다.
점심으로 같이 먹은 막주가 오늘따라 입에 짝짝 붙었다.
얼빠진 놈 하나 붙들어 은자를 자그마치 여덟 냥이나 얻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사덕이 도망친 건 아깝다.
수하의 거지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구걸하는 거지가 줄고 수입이 적어진다는 뜻이었지만, 사덕의 몸값은 아무리 잘 쳐줘도 은자 한 냥도 과했다.
남아도 크게 남는 장사를 했다.
가끔 그런 머저리 같은 놈들이 있었다.
어린 거지가 불쌍하네, 자유를 주겠네 하면서 몰래 도망가게 도와주는 멍청한 작자들.
그래 봤자 도망간 놈은 다른 곳에서 거지로 살 뿐이었다.
그런 놈들이 멍청할수록 좋았다.
이번에 걸린 놈처럼 무공도 할 줄 모른다면, 오랜만에 손맛도 보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였다.
두침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싸구려 막주 향이 쿠리쿠리한 움막의 악취에 조금 더 첨가되었을 뿐이었다.
“와앙~초오~ 왕초오~”
문에 걸어놓은 거적이 휘익 열리며 부봉이 달려 들어왔다.
“아하암… 왜?”
두침이 길게 하품을 했다.
“사덕이, 사덕이가 옵니다요.”
부봉의 말투는 쓸데없이 비장했다.
“오늘 몸 풀어주는 놈 많구나, 잡아 와!”
두침이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말했다.
“근데 개방 사람들이랑 같이 오는뎁쇼?”
부봉이 비장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뭣? 그 새끼 뭔 사고 친 것 아니야? 아씨!”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두침이 벌떡 일어나,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두침은 서둘러 거적을 걷고 달려나갔다.
저 멀리 동정호 분타주와 부분타주가 보였다.
일도 보통 큰일이 아닌가 보다.
일 년에 손에 꼽을 만큼 볼 수 있는 부분타주도 그렇지만, 생전 가야 얼굴 한번 볼까 말까 한 분타주까지 같이 오고 있었다.
사덕이 일을 쳐도 크게 친 모양이었다.
두침이 급하게 달려가 분타주와 부분타주 앞에 철푸덕 엎드리며, 코가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인 두침이 분타주와 부분타주님께 인사를 드립니다요.”
두침 수하의 다른 거지들도 우르르 나와 두침을 따라 개방도들에게 예를 다했다.
이전의 개방은 개방도와 일반 거지와의 경계가 모호했다.
매듭이 있다면 당연히 개방도였지만, 매듭이 없는 거지들도 개방도와 같은 움막에서 뒹굴며 구걸을 하고 그것을 분타주에게 상납하고 그것이 총타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천상이 방주가 된 이후로 개방도와 그냥 거지의 선이 확실하게 나누어졌다.
비록 매듭 하나라도 개방도가 되기만 하면 먹고사는 것에 걱정 없고, 무공에 글까지 가르쳐 주니 거지 팔자 피는 것이었다.
개방도가 되지 못한 거지들은 자신들끼리 무리를 지어 살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개방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개방은 새로운 개방도가 필요했고, 새로운 개방도는 일반 거지들 무리에서 뽑아 갔다.
그리고 개방에서 돈을 주고 시키는 일은 그들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혹여 개방에 잘못 보였다가는 개방에 받는 일이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거지 인생도 종치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거지가 개방도는 아니지만, 개방은 모든 거지들을 거느렸다.
구걸해서 먹고사는 이상 개방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든 두침의 눈에 사덕이 분타주와 부분타주 사이에 있는 것이 보였다.
두침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사덕을 내 수하가 아니라고 딱 잡아뗄까? 도망간 놈이라 우리랑 상관이 없는 놈이라고 한다면 어찌 넘어갈 수 있을까?’
‘아니야, 그건 아니야… 분위기가 뭔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은데… 뭘까?’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일어선 두침이 허리도 펴지 못하고 굽실거리며 말했다.
“바빠서 길게 이야기 못 해, 간단히 묻지. 이 아이와 만났다던 사내를 봤어?”
분타주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하! 그놈이 개방에 가서도 얼빠진 짓을 한 모양이구나.’
답을 찾았다 생각한 두침은 마음이 놓였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이번이 개방에 잘 보일 수도 있는 기회다 싶었다.
“아이고~ 그 정신 빠진 놈이 개방에 가서도 미친 짓을 했구만요, 앞으로는 걱정 마십쇼.”
말을 하면서 뺏은 은자 여덟 냥과, 패는 대로 맞던 얼빠진 놈이 생각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두침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식솔들을 다 끌어모아다가 눈물이 쏙 빠지게 패서 쫓아내 버렸습니다요.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겝니다. 헤헤… 저만 믿으십쇼, 그놈도 어지간히 정신 차렸을겝니다.”
두침이 분타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손짓을 해가며 과장되게 말했다.
“어…으…….”
분타주가 뒷목을 잡고 휘청거렸다.
부분타주와 개방도들이 서둘러 분타주를 부축했다.
“분타주님 괜찮습니까?”
부분타주 감륜이 분타주에게 물었다.
분타주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내 구역에서 거지들이 개방주의 금지옥엽을 팼단다. 방주님이 이 사실을 알면…….’
허연 얼굴의 분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 성질대로 하는 양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일단 찾아야 한다. 내가 먼저 찾으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 어디로 갔는지 봤어?”
잠깐 사이 얼굴이 핼쑥해진 분타주가 노기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지금은 화를 낼 짬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했다.
거지 몇 놈을 족치고, 성질을 내느라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노기를 참는 분타주 왕하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방주가 이 사실을 알까 봐 무서워서 떠는 것은 아닌지 분타주 스스로도 헷갈렸다.
“동정호 근처의 객잔으로 갔습죠, 저희가 벌써 단단히 교육을 시켰는데… 헤헤…….”
두침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가자.”
분타주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사덕은 지금이 은자를 삼킬 기회인가 싶어 눈이 뺑글뺑글 돌아다녔다.
개방도들이 가고 나면 끌고 가서 패기부터 할 것이 뻔했다.
사덕은 죽더라도 은자를 삼키고 죽기로 결심을 했다.
입을 쫘악 벌리고, 품에 손을 넣어 은자를 꺼내려는 찰라,
분타주가 사덕을 보고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안 오고 뭐 해!”
“네?”
온통 은자에만 신경을 몰두하고 있던 사덕은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입을 벌린 채로 눈만 껌뻑였다.
“분타주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 어린 것보다야 제가 더 쓸모 있지 않겠습니까?”
두침이 비굴하게 웃으며 나섰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덕부터 잡아 족치라고.
“저 아이는 오늘부터 개방도다.”
분타주의 말에 제일 놀란 건 사덕이었다.
분타주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거지 굴을 떠났다.
사덕은 품에 손을 넣은 채로 개방도들을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