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걸화의 무림행은 여행, 그러니깐 유람 그 자체였다.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살랑살랑 걷고,
이곳저곳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며 기웃기웃.
당과도 사 먹고 만두도 사 먹고, 산도 보고 꽃도 보고 기분 좋게 촐랑거리는 여행.
그런 걸화가 지금 거의 뛰고 있었다.
옆에 뭐가 있는지, 끼니때가 되었는지 지났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렸다.
“걸아야! 천천히 가자꾸나.”
뒤따르는 연천이 걸화를 말릴 정도였다.
“뭐 그렇게 굼떠요! 빨리 와요! 빨리! 빨리! 성도로 갑시다.”
걸화는 걸음을 재촉했다.
전에 없이 서두르는 것이 이상했다.
‘쯧쯧… 대체 누구에게 그리 맞고 온 것인지……. 그자가 쫓아올까 봐 겁이 나는 것인가.’
“그리 서두를 것 없다. 요기라도 좀 하고 가자, 그러다 탈 나겠다.”
연천은 걸화가 걱정되었다.
“에잇! 뭘 또 먹어요? 아침에 대물 잉어찜 먹었잖아요. 형님 보기보다 식탐이 많다아~”
낭창한 목소리의 걸화였다.
“허!”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걸화의 자연스러운 억지에 말문이 막혔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평소의 걸화 같았으면 점심과 저녁은 물론, 그 사이사이에 간식을 두어 번은 더 먹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저 서둘러 걷기만 했다.
걸화는 마음이 바빴다.
사덕을 통해 개방에 서찰을 보내어 놓은 상태였다.
서찰이 총타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분타에서 자신을 찾으러 나설지도 몰랐다.
거지들에게 두들겨 맞느라 예상보다 시간을 지체했다.
‘그 거지 같은… 아니, 거지 놈들!! 가만두나 봐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복수를 하고 싶지만, 개방에 잡혀갈까 봐 다음으로 미룬다. 이 거지새끼들! 내가 은원은 확실한 사람이야. 특히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 반드시 돌아와서 복수할 테다. 떼로 덤비다니… 비겁한 놈들…….’
걸화는 서둘러 뛰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 *
동정호는 넓었다.
무림인은 많지만, 동정호에는 특히 많았다.
걸화의 말대로 동정호의 잉어찜과 홍주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동정호가 워낙 많은 무림인이 오가는 곳이라, 많은 이들이 먹어봤으니 유명해지는 게 당연했다.
개방은 동정호 분타 아래에 세 개의 소분타를 두고 있었다.
미어터지게 올라오던 소식은 소분타가 생기고 나서 조금 나아지긴 했다.
소분타주가 한번 취합하고 정리해서 분타로 올리니 말이다.
그렇긴 해도 동정호의 분타주 자리는 바빴다.
분타주 왕하적은 서류를 읽고 분류하고 있었다.
탁자와 바닥까지 널려있는 서류를 보면 서생의 방인지 거지의 방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분타주님.”
그를 부르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이는 부분타주, 감륜이었다.
왕하적은 대답 없이 감륜을 쳐다보았다.
바쁘니깐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나가라는 의미였다.
“분타 입구에 쪼끄만 거지 하나가 찾아와서 분타주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왕하적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뭘 그런 것까지 나한테 일일이 보고야, 쫓아 보내.”
무심한 목소리였다.
‘서류 속에 파묻혀 바쁜 것을 보면서, 부분타주씩이나 되는 녀석이 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니… 하루 이틀 하는 일도 아닌데 왜 저러는지 원…….’
왕하적은 손끝에 침을 묻혀 서류를 넘겼다.
“그 아이가 배걸화 아가씨의 심부름을 왔다고 말했답니다.”
“뭐어?”
감륜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서류에 눈을 처박고 있던 왕하적이 소리를 지르며 감륜을 쳐다보았다.
“어서 들여보내.”
왕하적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허둥대고 있었다.
무림인이 모여드는 곳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났다.
그 사이에서 개방은 어떤 입장을 취할지 결정하는 것은 중요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를 바로 팔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다면 어디에 파는 게 제일 돈이 될 것인지, 소문을 낼 것인지 쉬쉬하고 넘어갈 것인지, 총타에는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 서둘러서 알려야 하는지 천천히 시간을 가져도 되는지, 다른 분타에도 전달을 해야 하는지….
매 순간마다 빠르게 판단을 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게 정보 장사의 기본이었다.
어영부영했다가는 모처럼 들어온 정보가 순식간에 똥값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랬기에 분타주의 역할은 중요했다.
특히 무림인이 많고, 소문이 무성한 동정호 분타는 더 그랬다.
그랬기에 방주인 천상은 그 자리에 왕하적을 둔 것이었다.
오랫동안 거지로 굴러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것은 물론이고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다.
그런 왕하적의 마음이 급했다.
배걸화의 실종 소식은 특급 비밀이었다.
개방의 방주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무림에 퍼진다면, 개방을 이용할 목적으로 걸화를 찾아낼 놈들은 수레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것 말고도 개방에 원한이 있어 걸화를 잡아 죽일 수도 있었고, 돈을 목적으로 납치할 수도 있었다.
방주의 여식을 이용할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랬기에 걸화의 실종은 분타주나 기껏해야 부분타주정도까지 아는 일이었다.
분타의 개방도들이 걸화의 용모파기를 보고 찾으러 다니기는 했지만, 그저 의뢰받은 일이거니 했지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런데 개방도도 아닌 동네 거지 아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면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왕하적은 앞에 선 아이를 가는 눈으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그냥 동네 거지 아이였다.
아이가 영민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보겠다고 하였느냐?”
왕하적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상이 방주가 되어 개방도와 일반 거지를 구분하면서 개방도와 일반 거지들의 거처가 확실하게 나뉘었다.
일반 거지들은 언제나 개방도가 되길 원했다.
개방도가 되면 무공과 글을 배우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 굶을 걱정을 덜어두어도 되었다.
총타에서 생활비가 나오니, 구걸을 못 한다고 끼니를 거를 일은 없었다.
그것 말고도 거지들이 개방도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왕하적도 어릴 때부터 거지로 길바닥을 굴렀으니, 거지들의 불합리와 억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린 거지들은 자신들이 먹기 위해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걸을 해서 놀고먹는 몇몇 어른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구조였다.
거기다 그 대우가 좋으면 또 모른다.
제 기분대로 쥐어패고, 구걸한 돈을 뺏고, 굶는 것은 그들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가끔 정신줄을 놓은 거지가 개방이 무슨 관아라도 되는 줄 알고 그 억울함을 털어놓기도 했고, 개방에 들어오고 싶다고 개방도의 바지 끄덩이를 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어디서 ‘배걸화’라는 이름 석 자를 듣고 온 거지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일일수록 냉철한 판단력과 침착한 상황 파악이 필요했다.
“배걸화 아가씨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사덕은 왕하적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얼굴도 간절한 표정도 아니었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배.걸.화’라는 세 글자에 왕하적의 가슴이 뜨끔했다.
“배걸화? 그게 누구냐?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다가는 네 두 발로 걸어 나가지 못할 것이야!”
왕하적은 짐짓 사덕에게 엄포를 놓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한 것이었다.
“네… 저도 그분이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웬 도령께서 그리 말하고 이것을 분타주님께 전하라고 했습니다.”
사덕이 품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에이… 내 이럴 줄 알았어. 개방도는 무슨… 서찰이나 전하고 얼른 벗어나자, 이 은자로 옷이나 온전히 갖춰 입고 어디 심부름꾼으로라도 들어가 볼까? 정말이지 거지 노릇은 더 이상 못 해 먹겠다.’
사덕은 사덕대로 생각이 있었다.
동정호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왕초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엔 지금까지 한 짓거리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 멀리 떠날 생각뿐이었다.
왕하적은 아이를 한번 보고는 봉투를 받아 열었다.
봉투 안에는 더 작은 봉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하나는 ‘개방방주 배천상 친전’이라고 쓰여 있었고,
하나는 ‘동정호 분타주 보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왕하적은 분타주 앞으로 쓰여진 봉투를 열었다.
나 개방방주 배천상의 딸 배걸화요. 이 편지를 아버지 배천상에게 전해 주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전해준 아이를 총타에 개방도로 키울 것이니 총타까지 무탈하게 데려다주시오.
배걸화 씀
“허!”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편지를 보았나.
거기다 삐뚤빼뚤, 어지간한 거지들도 이것보다는 필체가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 편지를 총타로 보내라, 최대한 빨리.”
감륜에게 ‘개방방주 배천상 친전’이라고 쓰인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봉투를 받은 감륜이 서둘러 분타주의 방에서 나갔다.
왕하적의 눈치를 보던 사덕은 고개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덕으로서는 왕초가 찾으러 나서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왕하적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저… 사덕이라고 합니다.”
“이 편지가 어떻게 네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얘기해 보아라.”
‘아… 이런…….’
의도치 않게 개방에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덕은 처음 걸화를 만났을 때부터 편지를 받아서 뛰어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은자 이야기는 쏙 빼놓고.
“편지를 준 자가 이리 생겼더냐?”
왕하적이 벽면 한쪽에 붙어있는 맑고 깨끗하게 생긴 여아의 용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가씨가 아니고 도련님이었습니다.”
“그럼 이리 생겼더냐?”
방금 가리킨 용파 옆의 더럽게 생긴 거지 용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덕이 용파를 보았다.
“아닙니다.”
“좀 더 자세히 보거라. 여기 이 용파도 상세히 보거라”
왕하적의 말에 여인의 용파를 다시 유심히 살폈다.
한참을 보던 사덕이 입을 열었다.
“아! 이것보다 낯빛이 어둡기는 했는데… 눈… 코… 입 모양은 맞습니다.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고 이렇게, 이렇게 머리를 뒤로 묶어 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덕이 걸화의 묶은 머리 모양새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설명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왕하적이 사람을 불렀다.
급했다. 본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했고, 걸화를 찾으러 나서야 하고, 용파도 새로 그려야 했다.
그보다 사덕의 마음은 더 바빴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동정호를 벗어나, 넝마 쪼가리를 벗어버린 사덕은 그저 개방을 나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왕하적의 눈치를 보건데 한동안은 잡혀있을 듯싶었다.
‘아이… 시간이 지체될수록 위험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