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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41화 (41/230)

41화

광대하게 탁 트인 동정호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햇살에 반짝이며, 일정한 속도로 출렁거리는 강물은 평화로웠다.

동정호를 바라보는 연천은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차 맛을 즐겼다.

깊으면서도 은은하게 풍기는 차향이 좋았다.

동정호의 평안한 풍경이 차를 더욱 향긋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스승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아낸 것이 없었고…….

아니, 알아낸 것은 있었지만 연천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연천에게는 알아내지 못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알아낼 만한 뾰족한 방도를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

왕성 어딘가에 나타났다는 천마검?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가졌다는 영친왕의 검을 볼 수나 있을는지…….

“으흠…….”

내뱉는 숨결에 찻잎의 그윽한 향취가 퍼졌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걸화를 만나기 전, 혼자 하는 여행은 단순했다.

지역의 큰 상점에 들러 푸대접을 받으며 버티고 서서 작은 정보를 모으고, 변두리 객잔에서 잠시 묵거나 야숙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저 목적이 하나뿐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걸아와 함께 하는 무림행은 생각할 것이 많았다.

무림인들이 즐긴다는 음식이나 술, 유람지나 시답지 않은 풍문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맛있고 신기했고, 의아하고 재미있었다.

걸아의 말대로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원하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있을까?

스승님에 대해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있었지만, 세상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너무도 가혹했다.

고개를 돌려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동정호는 편안했다.

어차피 답이 없었다.

연천은 차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속에 담긴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냈다.

차의 향기가 더욱 그윽하게 다가왔고, 햇살이 살갗에 닿는 감촉은 따뜻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연천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식당은 한가했고, 바람에 담긴 공기는 나른했다.

구석 탁자에 자리 잡은 점소이가 꾸벅꾸벅 졸아댔다.

폐부로 스며든 은은한 차의 향이 연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작은 찻잔을 입가에 대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려는 찰라.

쾅―

객잔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졸던 점소이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인이 많이 드나드는 객잔에서 그들끼리의 싸움은 흔한 일이었다.

객잔의 문이고 탁자고 성질 더러운 무림인 손에 남아 나지가 않았다.

그럴 땐 삼십육 계 줄행랑이 최선이었다.

점소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쌍코피를 줄줄 흘리는 쬐끄만 아이였다.

꼬라지를 보니 어디서 쥐어터진 모양이었다.

“하암…….”

점소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청했다.

동정호 바닥에서 까불어대다 두들겨 맞는 얼간이는 발에 채도록 많았으니.

한가로운 휴식을 방해받은 연천은 입맛을 다시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객잔 입구에는 걸화가 서 있었다.

잔뜩 독기를 품은 얼굴로 씩씩대며.

그 꼴은 어디서 넘어지거나 굴렀다고 보기 힘들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두들겨 맞은 꼬락서니였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잡아 뜯겨 산발이 되어있었고, 왼쪽 눈은 정통으로 주먹에 맞았나 보다. 시퍼랬다.

양쪽 콧구멍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바닥에 뒹굴었는지 흙투성이인 옷은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었다.

찢겨진 옷 사이사이에 살이 터져 피가 흐르고 멍 자국도 보였다.

“걸아야!”

연천이 급하게 걸화에게 다가갔다.

“어쩌다 이리되었느냐?”

연천이 놀란 얼굴로 걸화를 살폈다.

걸화가 연천을 보더니 끄억끄억거렸다.

그러다 그만 ‘어엉~’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연천이 걸화의 등을 다독였다.

걸화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으으으응… 응… 끅끅… 으응… 꺽… 으어헝…….”

“괜찮다, 이제 괜찮다.”

연천이 걸화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니임… 으으으응… 그 거지 같은… 으응… 것들이… 뒤에서 공격하고… 끄윽끅… 막 떼로 덤벼가지구… 으흐흐응… 비겁한 놈들… 큭… 내가 그놈들 가만두나 봐라… 이씨… 으흐흐흐흐응… 끅… 거지같은… 끄윽… 응…….”

그랬다, 걸화는 싸웠다.

거지 같은 것들이 아니라 거지랑.

십오 대 일로 장렬하게 엉겨 붙었다.

사덕을 보내고 그를 쫓는 세 명의 거지에게 신나게 짱돌을 던져대고 있는데, 어디선가 거지 패거리들이 몰려들었다.

패거리의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그 왕초 밑에 딸린 놈들 전부가 달려들어… 무작정 쥐어팼다.

뭐… 패니 맞을 수밖에.

맞으면서도 욕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그 덕분에 더 얻어맞긴 했지만…….

걸화는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맞았다는 것 자체가 분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꼴통 짓을 해도, 아버지 천상은 호통만 쳐댔지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개방의 거지들을 골려도, 누구도 걸화를 때리거나 괴롭힌 적이 없었다.

개방에서 누가 감히 방주의 딸에게 손을 대겠는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행을 나와서는 연천과 다니니 맞을 일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누군가에게 맞아본 걸화는 억울하고 원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작은 일에도 당하고는 못사는 걸화이기에 그 노여움과 분함은 극도에 달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기에 더욱 분통하고 속이 쓰렸다.

이곳은 무림,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힘없고 약한 자가 당하고 얻어맞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나마 번화가에 끼지도 못하는 변두리 얼뜨기 거지한테 당했으니 그 정도로 넘어갔지, 운이 나빠 제대로 미친 무림인이라도 만났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곳이었다.

“되었다, 괜찮아.”

연천이 그리 말을 하며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너무 편하고 위로가 되었다.

머리가 띵하도록 눈물을 쏙 뺀 걸화가 연천을 쳐다보았다.

“아파요…….”

속상함이 너무 커서 맞은 곳이 아픈 줄도 몰랐다.

속 시원하게 울고 보니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 올라가서 약을 바르자.”

연천이 걸화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깨끗한 천에 물을 적셨다.

상처를 닦아내기 위해서였다.

“아야야야… 아파요…….”

연천이 천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는 걸화였다.

“입은 안 다쳤구나.”

걸화의 호들갑에 마음이 놓이는 연천이었다.

“치… 형님은 그런 말이 나와요? 아얏.”

“으이그… 엄살은…….”

“엄살 아니에요, 진짜 아파요. 아야야.”

찡그리는 걸화를 보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디서 얻어맞고 온 걸화를 보고 연천은 너무 놀랐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걸화가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이 층으로 올라와 물을 뜨고 약을 준비하는 내내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리 큰 상처도 아니고, 살짝만 건드려도 아프다고 자지러지는 모습에 연천의 놀란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음이 누그러지니 걸화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남은 아프다는데 웃음이 나와요?”

한쪽 눈탱이가 시퍼런 걸화가 인상을 썼다.

“그러게 난 너만 보면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네가 좀 웃기잖느냐.”

“내가 뭐가 웃겨요? 난 형님이 더 웃겨요. 멀쩡하게 생겨서는 하는 것 보면 모자란 사람 같다니깐요.”

“난 너처럼 맞고는 안 다닌다.”

“난 내가 때려눕힌 놈한테 사과는 안 합니다.”

연천이 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금창약을 살살 발랐다.

“아야야, 살살 해요.”

“살살하고 있다.”

얼굴을 찡그리는 걸화를 보고는 조심스레 약을 발랐다.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 상처가 많았다.

연천은 약 바른 자리를 호호 불었다.

“나 없을 때 뭐 맛있는 것 먹었어요? 입에서 달달한 향이 나는데…….”

연천의 입김에서 달고 향긋한 차향이 폴폴 품어져 나왔다.

“하!”

연천이 또 피식 웃었다.

“그만 좀 웃으시오, 자꾸 그리 실실 웃으니 더 모자란 사람 같잖아요.”

그 말에도 연천은 씩 웃었다.

항상 진중하기만 한 연천의 얼굴이 천진함으로 똘똘 뭉친 장난꾸러기 같이 변했다.

“아닌데? 형님 혼자 뭐 먹었죠? 몸에서도 뭔가 좋은 향이 나는데…….”

걸화가 연천의 몸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허허허! 씻으면 된다.”

연천이 또 웃는다.

“나도 요즘은 매일 씻어요.”

걸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가락에 물 묻혀서 찍어 바르는 건 씻는 게 아니다.”

말을 하는 연천은 자신에게 코를 박고 가만히 있는 걸화를 보며 스승님이 떠올랐다.

스승님은 그랬다.

밤에 악몽을 꾸어 잠이 달아나면 연천을 안고 등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다시 잠이 쏟아지곤 했다.

연천은 종종 궁금했다.

혼자 살기도 버거운 스승님은 왜 자신을 주워 와서 키웠을까?

다 죽어가는 아이를 데려다 왜 그리 정성을 쏟았을까?

왜 그리도 아껴 주셨을까? 하고.

걸화의 등을 쓰다듬으며 스승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등을 쓰다듬어 주는 스승님도 자신이 느꼈던 따뜻하고 포근한 행복을 똑같이, 어쩌면 더 크게 느꼈을 것이라는 걸….

“드르렁…….”

걸화의 고개가 뒤로 팩 넘어갔다.

“걸아야, 여기서 자면 안 된다.”

“쓰으읍…….”

걸화가 침을 쓱 닦았다.

“방에 가서 좀 쉬어라.”

“안 돼요, 지금 가야 돼요.”

걸화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어딜?”

“왕성으로 가야죠. 영친왕의 성 근처에서 구걸을 하든 뭘 하든 가야죠!”

“네가 이런데 지금 어찌 가느냐? 며칠 쉬었다 가자꾸나.”

연천이 걸화를 말렸다.

“아이참… 뭘 이 정도 가지고, 걱정 마시고 얼른 준비하고 가요! 네? 가요오. 빨리! 빨리!”

걸화가 연천을 재촉했다.

“흠… 그럼 약을 마저 바르고 네 옷도 좀 갈아입고 가자.”

연천은 걸화가 저리 재촉하면 말리기 힘들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면, 그냥 체념하고 맞춰주는 것이 속이 편했다.

“약 아직 다 안 발랐어요? 와~ 형님 되게 굼뜨다.”

“하!”

역시!! 걸화의 적반하장은 자연스럽다.

연천은 ‘네가 졸았잖느냐’라는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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