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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40화 (40/230)

40화

“스승님의 원수면 제가 갚아줄게요. 내가 원수 갚는 건 또 잘하거든요”

걸화가 헤벌쭉 웃었다.

걸화의 말에 연천도 피식 웃었다.

“스승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모르겠구나, 나를 아껴주는 유일한 분이셨는데… 세상 사람들 눈엔 다르게 보였나 보다…….”

연천이 천천히 홍주를 들이켰다.

“형님! 근데 대체 그 검은 왜 안 꺼내요? 검이 검집 안에 있는 건 맞죠?”

연천은 또 피식 웃었다.

“응.”

“내가 그 검 한번 볼 날이 있기는 한 거죠?”

“언젠가는 있겠지.”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왜 안 꺼냈어요?”

“사람을 해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를요? 그놈들을? 하! 그놈들을 해칠까 봐 검을 안 꺼냈다고요? 그러다 형님이 죽어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별로 안 해봤다.”

흥분한 걸화의 말에 덤덤히 대답하는 연천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어요?”

답답한 걸화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런 생각은 들지 않더구나.”

연천이 침착하게 답했다.

“하! 이 형님이 생각보다 자신감이 너무 넘치네, 제발 바보 같은 행동 좀 하지 마요. 같이 다니기 힘들어요.”

“누가 누구랑 같이 다니는지 좀 헷갈리는구나.”

“칫! 둘이 같이 다니는 거지, 누가 누구랑 다니는 게 어딨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연천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걸화의 말에 수긍했다.

“히…….”

연천의 말에 기분이 좋은 걸화였다.

“…….”

연천은 실실 쪼개는 걸화를 바라보며 웃었다.

“…형님은 더 드세요. 나는 배가 터지게 먹었으니 잠깐 나갔다 올게요.”

걸화가 두둑한 배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음식도 마다하고 어딜 가느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해결할 일이 좀 있어요.”

“그리 남의 방문에 머리 박고 자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수밖에,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느냐?”

“내가 앤가… 혼자 다녀올게요.”

“애보다 네가 더 불안해.”

“쳇! 다녀올게요.”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화가 객잔을 나간 후 연천은 물끄러미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동정호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뒤죽박죽 쌓인 생각들이 선명해졌다.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그분이 무고한 사람들을 살인멸구하였다 해도 난 지금처럼 그분을 그리워하고 존경할 수 있을까?

스승님이 그리운 마음과 그분이 악인일까 봐 두려운 마음, 아예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까 봐 이는 조바심까지 복잡한 생각들이 얽혀 혼란스러웠다.

* * *

강서의 동정호 주변은 번화가로, 사람이 많았다.

아름다운 동정호를 보기 위해 유람 오는 이들과 그들을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한 상인들이 바글거렸다.

걸화는 번화가를 따라 걸었다.

비단과 꽃신, 밥그릇과 노리개, 곡식을 파는 점포부터 쇠붙이를 두들겨 대는 대장간, 객잔과 음식점들이 줄지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제각각의 애병을 든 무인과 상인, 농부와 장을 보러온 아낙과 유람객, 그들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까지 시끄럽게 북적거렸다.

걸화는 배를 내밀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뒷짐을 지고 걷는 꼴은 마실 나온 동네 한량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거지도 많기 마련.

걸화는 천천히 걸으며, 구걸하는 거지들을 유심히 살폈다.

개방도와 일반 거지들이 구분이 되었다.

붉은 매듭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거지들에게 중요한 것은 구걸 수입이었기에, 최대한 불쌍하고 안타까운 꼴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방도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요지에 거지 꼬락서니로 자리 잡고 있음에도, 길가의 잡초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걸화는 매듭을 매고, 기척 없는 거지들을 요리조리 피해 걸었다.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더니, 중심가에서 벗어나 구석에 자리 잡은 거지 녀석을 유심히 살폈다.

개방도가 아닌 일반 거지에, 돈 안 되는 외곽에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서열에서도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어린 거지이니 당연했다.

거지가 빽으로 되겠는가? 돈으로 되겠는가?

그저 어릴 때부터 구걸하고 구르면서 점차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니 힘과 덩치, 성장 정도가 거지의 서열이라고 보면 거의 맞았다.

한 바퀴를 더 돌고 와서는, 그 녀석의 쪽박에 은자 하나를 소리가 나게 던져 넣었다.

탱그렁―

은자가 떨어지는 소리는 둔탁하고 묵직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작은 거지가 돈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쪽박 속의 은자를 보고 깜짝 놀란 어린 거지가 걸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넌 인사할 줄도 모르냐?”

걸화의 말에 그제야 거지 소년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였다.

“됐어, 그만해도 돼. 너 이름이 뭐냐?”

걸화가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열 살이 될까 말까 한 거지 소년은 눈이 맑고, 영특해 보였다.

딱 저 정도가 좋았다.

저기서 조금 더 가면 세상 물정, 거지 물정을 너무 알아서 꾀가 많아지고 슬슬 약아졌다.

그런 녀석들은 밑바닥부터 다지는 훈련도 힘들고, 머리 굵어지면 제멋대로 하려 들기 일쑤였다.

이 짓 저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평생 개방 총타에 살았다고 사람 골라내는 눈은 있는 모양이었다.

걸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덕이라고 합니다.”

사덕이 냉큼 은자를 집어 양손으로 꼭 쥐고 말했다.

“사덕… 그래, 사덕아! 너 개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냐?”

“예? 어느 거지가 개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겠어요?”

사덕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물었다.

“좋아, 내가 너를 개방 총타에 개방도로 넣어주지.”

걸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예에?”

사덕이 걸화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천상이 개방의 방주가 되고 거지들 사이에서 개방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무공과 글을 가르쳐 주고, 자기만 잘하면 점포에 떡하니 한자리 꿰찰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개방이라는 거대 방파의 소속이 되는 것은 두말하면 입만 아팠다.

그래서 한때, 어린 거지들에게 개방도가 되게 해주겠다고 꼬셔서 인신매매를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천상이 그 사실을 알고 길길이 날뛰며 놈들의 싹을 몽땅 잘라내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주 무림 전체가 시끌시끌했었다.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고 저런 사기를 치는 작자가 돌아다니다니.

사덕은 은자를 슬그머니 품에 넣고 걸화를 경계했다.

“아잇… 사기 치는 거 아니야, 내 심부름 딱 하나만 하면 넣어줄 거야.”

남들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걸화였다.

당당할 만도 하지, 아비가 개방 방주인데.

“무슨… 심부름요?”

어디서 나타난 작은 사내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영 불안한 사덕이었다.

가슴에 넣어둔 은자를 옷 위로 더듬어 만졌다.

“서찰 하나만 개방 분타에 가서 분타주에게 전해주면 돼, 그럼 그길로 넌 개방도가 될 게야.”

“진짜요?”

사덕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인신매매범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어린 거지들을 최대한 개방에서 먼 곳으로 데리고 갔지, 개방 분타에 심부름을 시킬 리는 없으니 말이다.

사덕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희 왕초가 여기 애들 구걸하는 걸 지켜보고 있거든요. 왕초한테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죽을 만큼 두들겨 맞습니다. 은전 들어온 것도 봤으려나? 아이… 그건 못 봤으면 좋겠는데…….”

뒷말은 심각한 얼굴의 사덕 혼잣말이었다.

“너희 왕초한테 딸린 식구가 많으냐?”

걸화가 물었다.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열댓 명 정도…….”

“너 뜀박질 잘해?”

“그거야 자신 있죠.”

사덕이 씨익 웃었다.

거지가 어디 정정당당하게 구걸만 하고 살겠는가?

스리슬쩍 주운(?) 물건을 들고 달려야 할 때도 있고 자리싸움, 손님(?) 싸움, 밥그릇 싸움 있을 때마다 힘없는 거지는 살려면 그저 뛰어야 했다. 멀~리.

“네가 뛰면 내가 잠깐 동안은 막아주지.”

걸화의 말에도 사덕은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하긴 하늘같은 왕초에게 죽도록 맞을 일인데 어디 쉽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됐다! 너 아니라도 하겠다는 놈은 천지다.”

걸화가 몸을 돌렸다.

“아니! 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해요, 합니다. 하겠습니다.”

사덕이 다급히 걸화를 잡았다.

걸화가 몸을 돌리며 씩 웃었다.

사덕이 걸화의 심부름을 하기로 한 것은 걸화를 믿어서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걸화에게 받은 은전이 불안하던 차였다.

왕초 몰래 은전을 챙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철전 하나도 숨겼다가는 죽을 만큼 맞는다.

은전을 숨겼다가 걸리면? 죽을 만큼 맞겠지.

정말 오갈 곳이 없어 있는 것이지 저 왕초 놈 밑은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

‘툭하면 쥐어패고 기분 나쁘면 밥도 안 주고, 길바닥에서 구걸한 사람이 누군데 그걸 아주 당연히 자기 것처럼 군다니깐.’

생각하니깐 열 받네, 은전 하나면 한동안은 먹고 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뭣 같은 왕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번에 은인이 나타난 것이다.

왕초에게 벗어나서 먹고살 은자도 턱 하니 내어주고, 왕초도 막아준다지 않는가.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개방도? 그것까지 욕심내면 도둑놈 심보지. 그거야 밑져도 본전이고, 어디 한번 해보자. 내가 도망을 가나, 왕초 놈이 나를 잡나.’

이러나저러나 얻어터질 각오만 하면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아니… 워낙 지독하게 패니 좀 무섭긴 하다.

사덕은 걸화 덕에 왕초에게서 벗어나기로 했다.

“자! 이거!”

걸화가 사덕에게 서찰을 내밀었다.

사덕이 과하게 결의에 찬 얼굴로 서찰을 받아 챙겼다.

“분타주님한테요?”

“그래!”

“그런데 분타주님이 저를 만나줄까요?”

“분타에서 누가 길을 막거든 배걸화 아가씨 심부름 왔다고 해라, 그리고 서찰을 꼭 분타주에게 전해야 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은전도 주었고, 왕초도 막아준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이니, 약속대로 서찰을 전해주겠노라 마음먹는 사덕이었다.

“그럼 사덕아! 부탁한다.”

걸화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뛰어!”

걸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덕이 몸을 날렸다.

사덕이 있는 곳에서 동정호 개방분타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면 반 시진?

‘반 시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어려울 텐데…….’

사덕이 다리에 힘을 실으며 생각했다.

우선은 왕초의 눈을 피해야 했으니, 젖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힘까지 끌어모아 달렸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달려 나온 거지 세 명이 사덕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쫓아갔다.

“야! 저놈 잡아!”

“저 새끼가 어디로 튈려고!”

“잡아! 오늘 뒈졌어!”

세 명의 거지 앞에 척하니 나타난 걸화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걸화가 자신의 유일한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지들을 향해 짱돌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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