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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38화 (38/230)

38화

은월이 침상에 그대로 앉았다.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사내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저 사내의 행동에 이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오.”

“아니면, 혹여 같이 오신 그 여… 아니, 그 일행분이 신경이 쓰이시는 겁니까?”

“그 녀석이야 원대로 한 상 차려 먹고 있는데 무엇이 신경이 쓰이겠소?”

“…아, 아닙니다.”

은월이 걸화에 대해 다시 물어보려다, 말을 흐렸다.

“어떤 사내가 그대를 마다하겠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을 무에 욕심을 내겠소, 나는 그대가 편안하길 바라오.”

그리 말하는 연천의 얼굴은 담담했다.

‘저런 등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건만 자신만 보면 그저 바지 내리기에 급급한 사내들만 보던 은월은 연천의 마음이 은혜롭게만 느껴졌다.

맑고 깨끗한 연천을 보는 것이 그리 눈부실 수가 없었다.

연천에 대해 알아내겠다 마음먹었던 것들은 이미 은월의 머릿속에 없었다.

일패라고는 하지만 기녀였다.

게다가 정보를 취급하는 하오문의 한 분타를 맡고 있는 백화루의 수장.

무림에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 그랬다.

추잡하고 구린 어둠 속을 헤집어 그것들을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곱게 꾸민 낯 속에 얼마나 매서운 독기를 품고 살았는지 새삼 느끼며, 연천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핏한 그의 미소에 켜켜이 쌓인 피로가 씻기는 것 같았다.

기녀가 된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과 안정감이었다.

은월은 침상에 모로 누워, 가만히 연천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미소를 띤 채 잠이 들었다.

* * *

“아… 씨…….”

걸화는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손도 대지도 않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뭐! 뭐! 뭐!”

갑자기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큰소리를 쳤다.

들어온 기녀도 물리고, 혼자 고급진 백주에 화려한 안주를 친구삼아, 밤을 보내려던 걸화는 이상하게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잇… 그냥 쳐들어가서 데리고 와? 그러게 왜! 왜?!”

걸화가 자기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니 그런다고 좋다고 넙죽 따라가?”

“쳇!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기녀 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는 꼴이란…….”

“그렇다고 왜! 상사병이니 어쩌니 해가지고.”

걸화는 다시 자기 머리통을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아! 뭔 상관이야!!”

걸화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쥐어뜯어 헝클렸다.

“아… 진짜! 신경 쓰여 미치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어쩌겠다고!”

걸화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넓은 방, 커다란 탁자 위에 어머어마하게 많은 양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 걸화는 혼자 머리를 쥐어박았다가 일어섰다 앉았다 화를 냈다 체념했다 하는 중이었다.

은월과 연천이 신경이 쓰여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의 걸화를 보면 그냥 돌았다.

* * *

밤새 왁자지껄하던 기루의 이른 아침은 적막했다.

술에 취해 악을 쓰던 손님도, 섬섬옥수로 악기 줄을 튕기던 기녀도, 흥에 겨워 몸을 들썩이던 사내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여염집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이곳의 짧은 휴면시간이었다.

조만간 잠이 깬 기녀들은 요란스럽게 단장을 하고, 제집을 찾아가는 손님을 배웅하느라 떠들썩할 것이다.

하인들은 뻔히 아는 길을 안내하고, 부엌에서는 늦은 아침을 챙기기 위해 갖가지 음식 냄새를 풍겨댈 것이다.

남들과 다른 기루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볕은 따뜻했다.

포근한 온기와 빛깔이 커다란 방을 감싸 안았다.

길게 차려진 상 위에 윤기가 좔좔 흐르던 음식들은 차갑게 식어 제맛을 잃어버렸다.

커다란 방, 훌륭하게 차려진 상 옆에 쭈그리고 자는 작은 아이의 모습은 가여워 보이기도 하고 호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기루가 그렇다, 모두가 이부자리를 펴고 곱게 잠드는 것은 아니었다.

술병을 끌어안고 기절한 놈부터 술에 취해 마당에서 대자로 뻗은 놈, 제집으로 가던 길에서 곱게 잠드는 놈도 있었다.

술상 옆, 방 안에서 잠드는 것은 예사였다.

“허억!”

무언가에 깜짝 놀란 듯 걸화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혼자서 앉았다 일어섰다, 화를 냈다 소리를 질렀다, 머리를 쥐어뜯다 씩씩대다, 그렇게 발광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든 것이었다.

“아구구구구…….”

쭉 기지개를 켰다.

돌멩이가 나뒹구는 길바닥에서 잔 것보다 더 삭신이 쑤셨다.

혼자 주접을 떨어대더니, 몹시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응?”

걸화의 몸에는 연천의 윗옷이 덮여있었다.

연천이 새벽 수련을 나가기 전, 걸화를 보러 왔다가 바닥에 자는 그녀에게 덮어주고 간 것이었다.

“이 형님은 왔으면 깨우지…….”

혼자 실실 쪼개며, 연천의 옷을 들고 일어났다.

해가 뜬 지 제법 된 시간이었다.

걸화는 서둘러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형님 어딨소?”

눈에 보이는 시녀를 잡고 물었다.

“대협께서는 후원에 계십니다.”

시녀의 말에 후다닥 뛰어서 후원으로 달렸다.

걸화와 연천은 몰랐지만 둘은 백화루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이 되어있었다.

그리도 골머리를 썩이던 곽엄택을 잡아 왔으니 말이다.

기녀들은 물론이고 비질하는 시종까지, 백화루에서 연천과 걸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직접 보지는 못해도 건너들은 인상착의만으로도 두 사람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눈썰미는 있어야 기루에서 밥 얻어먹고 살지 않겠는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무공으로 곽엄택의 진기와 혈액을 뽑아냈다는 낭설까지 더해져 그 둘은 아주 대단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곽엄택의 꼴을 보면 그런 말이 나돌 만도 했다.

걸화는 그 넓은 기루에서 후원을 기가 막히게도 잘 찾아냈다.

그게 걸화의 또 다른 능력 중 하나였다.

사람이건 장소건 뭘 찾아내는 능력은 탁월했다.

후원은 은월이 백화루에서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곳이었다.

작게 만든 연못에는 색이 고운 비단잉어가 헤엄치며 놀았다.

키 작은 나무와 모양과 색이 다른 꽃들은 은월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새하얀 눈발이 날리는 한겨울에도 은월의 후원에는 쉬지 않고 꽃이 피었다.

까만 밤, 눈부시게 화려한 기녀와 같은 꽃부터 그저 편안한 한때를 갈망하는 은은한 꽃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루주인 은월이 특별히 신경 쓰는 후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백화루에서 은월이 허락한 특별한 손님만이 걸음 할 수 있었다.

곳곳에 호위들이 있었지만, 후원으로 달려가는 걸화를 막는 자는 없었다.

멀리 연천이 보였다.

화사한 색의 꽃들 사이에서 새파란 하늘을 이고 선 연천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낯이었다.

그 익숙하고, 친밀한 얼굴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걸화의 걸음이 빨라졌다.

웃으며 뛰어가던 걸화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의 꽃을 꺾어서 일어난 은월이 작고 하얀 꽃의 향기를 맡더니 연천에게 사뿐히 다가가 연천의 얼굴 가까이 꽃을 내밀었다.

연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걸화가 입술을 비틀어 삐죽대며, 너털너털 걸어갔다.

“뭐가 그리 좋아요?”

괜스레 연천에게 톡 쏘아붙였다.

“이제 일어났느냐?”

연천이 미소를 걸친 얼굴로 물었다.

“네… 일어났으니 어서 갑시다.”

걸화가 밑도 끝도 없이 연천을 재촉했다.

걸화와 연천 사이에 은월이 끼어들었다.

“식사는 하고 가시어요. 대협께서 걸아 소협이 깨면 같이 식사를 하신다고 마다하시어 아직 식사 전입니다.”

붉고 도톰한 입에서 나온 말에는 연천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었다.

‘저게 뭔 소리야? 형님이 나 때문에 밥을 못 먹고 있으니 형님 밥은 먹고 가야 한다는 말이야? 쳇!’

“뭐….”

딱히 거절하기도 뭣한 걸화가 입술만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사월아!!”

은월이 누군가를 불렀다.

“네에.”

후원 구석에서 시녀가 뛰어왔다.

“어서 식사를 내어오너라.”

은월의 한마디에 시녀와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종들은 커다란 상을 후원의 정자로 옮겼고 시녀들은 끝도 없이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정말 걸화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린 듯 바로 준비된 상이 후원의 정자에 차려졌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음식을 보는 걸화의 입에 침이 고였다.

‘그래. 먹고 가자, 먹고 가. 먹고 얼른 가면 되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걸화가 연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걸화는 음식을 깨작대면서 앞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은월이 생선살을 발라 연천의 접시에 올려놓으며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고기 한 점을 올리고 속삭이고, 채소 한 점을 집어 올려놓고 또 속삭이고…….

소곤소곤 소곤소곤…….

‘밥 먹는데 뭐 저리 할 말이 많아? 어쭈? 왜 웃어? 뭐? 돼지고기가 웃겨? 닭고기가 웃겨? 당신네 둘은 밥 먹다가 대체 왜 웃는 거요?’

걸화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밥을 먹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고소하고 향긋한 음식들이 화려한 빛깔로 걸화를 유혹해 댔지만, 짜증이 솟구치며 영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식탐은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일도 있구나.

“어디 불편하냐? 네가 그리 먹는 건 처음 보는구나.”

연천이 음식을 앞에 두고 뚱한 걸화에게 말했다.

“흥!”

걸화는 연천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자신의 앞 접시에 코를 박았다.

‘승질 나! 짜증 나! 꼴 보기 싫어! 에이씨!!’

은월과 연천은 여전히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렸다.

결국, 걸화는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얼른 나가야지, 어우~ 밥맛 떨어져.’

“얼른 가요, 형님!”

걸화는 연천을 재촉해서 짐을 챙겼다.

두 사람에게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작은 바랑 하나씩을 등에 메고 연천은 낡은 검을 든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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