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연천은 앉았다 일어섰다가 왔다 갔다, 다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가만히 있질 못하고 서성거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혈영천마에 대해 들은 이후부터 온통 신경이 그곳에만 팔려있었다.
그저 혈영천마에 대해 더 알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려한 여인의 침실이었다.
막연하던 불안감의 정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월은 기생이 되기 전부터 눈을 떼기 힘든 미모와 사내를 홀리는 색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은월이 일패 기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패 기생.
부르기야 쉽지, 일패가 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기에 일패 기생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도 모두 같은 급은 아니었다.
일패 중에서도 일류와 이류 그리고 나머지로 나뉜다.
이것은 누가 선을 긋듯이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일패 기생의 수는 정해져 있고, 그들을 찾는 손님은 많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일패는 한 기루에 많아봤자, 한두 명이 될까 말까 했다.
하나 하룻밤에 일패를 찾는 손님들은 수십이었다.
그러니 어떤 손님을 받을지는 일패 기생의 마음이었다.
어떤 기생이 돈 없고, 권세 없는 손님을 좋아하겠는가?
인기 있는 일패 기생이 돈 많고, 권세 높은 손을 우선으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고의 직위를 가진 손님을 기생의 마음에 따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일패 중 일류 기생이요.
고관대작이라면 대부분 다 상대하는 것은 일패 중에 이류 기생.
고관의 자식이나 부유한 상인을 상대하는 것이 나머지 일패 기생이었다.
백화루 은월은 일패 중에서도 일류 기생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트린다는 고관대작도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상대조차 하지 않는 은월이었다.
그것이 사내의 마음을 더욱 애달프게 했고, 은월의 값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은월을 한번 보고 잠 못 이루는 도령이 산서 바닥에 채이고 채였고, 돈을 수레에 쌓아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애걸복걸하는 이를 줄 세우면 백화루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다.
돈과 장신구부터 보석과 집… 온갖 값나가는 것으로 회유하는 수많은 사내들을 본체만체하던 은월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승낙했다는 것을 연천은 몰랐다.
그저 의아하고 뒤숭숭한 마음에 침실을 정신 사납게 오갔다.
연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오고 있었다.
사르락 사르락―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고, 공기의 흐름처럼 어렴풋한 소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연천의 심장이 제멋대로 가슴을 두드려댔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긴장감이었다.
연천의 눈앞에서, 새하얀 창호지가 발린 문이 가볍게 양옆으로 갈라졌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기녀가 양쪽에서 연 것이었다.
열린 문 앞에는 은월이 서 있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속이 훤히 비치는 침의장포를 걸치고, 아무런 장식 없이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은 가녀린 목선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은월의 살결은 도자기처럼 새하얗게 매끄러웠고, 크고 검은 눈동자는 영롱했다.
그런 은월을 바라보는 연천의 낯빛은 엷은 분홍빛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연천이 다급히 앞으로 팔을 뻗었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하긴 이 은월을 본 사내라면 그럴 수밖에…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사내군요.’
은월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쾅―
연천이 양쪽 문을 잡아끌어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이 껌뻑거리며,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문이 왜 닫힌 거지? 이 아이들이 지금껏 실수한 적이 없는데?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연천이 직접 문을 닫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은월의 뇌리에는 의문만이 가득 들어찼다.
아름다운 은월의 얼굴은 아니, 온몸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어. 이건 꿈이야! 아주 지독한 악몽!!’
은월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찰락대며 은근하고 향긋한 꽃내음이 풍겼다.
‘이런 굴욕이…….’
정신을 차리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이놈 저놈, 온갖 잡놈이 모여드는 기루였다.
기녀를 내치는 놈이야 하룻밤에도 허다하게 있었다.
술이 떡이 되어 안고 들어갔던 기녀가, 술 깨고 보니 마음에 안 든다며 방에서 쫓아내는 놈.
그저 변덕이 끓어 기녀를 바꾸라고 지랄하는 놈.
기녀 내치는 것을 재미 삼아 즐기는 놈.
기녀가 입에 넣어준 안주가 맘에 안 든다며 밀어내는 놈.
별의별 놈이 다 있었지만, 그건 은월과는 딴 세상의 일이었다.
은월뿐만 아니라 일패 기생에게 그런 일은 벼락을 맞는 것만큼이나 희박한 일이었다.
일패 기생이 상대하는 손님들은 워낙 체면과 남의 눈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기도 하거니와, 일패 기생은 존중받을 만한 기예와 글월, 그림과 기도, 미모와 교양 등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인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귀하게 대접받았다.
그런데 일패 중 일류, 아니 중원의 기생을 탈탈 털어도 한 손에 꼽힐 만큼 이름난 은월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머리가 어질하고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제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까? 그러다가 내쫓기면 그 수모는 어찌하지? 그냥 돌아갈까?’
그 모멸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선녀가 시샘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의 은월은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이때, 창호지 발린 새하얀 문이 양쪽으로 슬그머니 열렸다.
은월은 닫힌 천상의 길이 열리기라도 한 양, 가슴이 떨렸다.
“…그… 미안하오.”
제 낯빛을 찾은 연천이 쭈뼛대며 사과했다.
반라에 가까운 은월의 차림에 우려했던 대로 그녀가 자신의 말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었다.
낮게 숨을 내쉰 은월이 다시 미소를 걸치고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은월의 뒤에 있던 시녀가 따라 들어와, 침상 옆의 탁자에 간단한 술상을 차려 놓고 사라졌다.
방으로 들어온 은월이 연천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껏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다채로운 장신구를 걸친 은월이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태양과 같다면, 지금의 화장기 없이 청순한 모습은 눈을 떼고 싶지 않은 달빛과 같았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은월이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그러지요.”
연천이 술상이 차려진 탁자의 의자에 앉았다.
은월도 옆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어 천천히 잔에 따랐다.
술을 받은 연천이 맑은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
향이 깊으면서도 깔끔한 백주는 뭣 모르는 연천의 입에도 좋은 술인 듯싶었다.
의도하지 않은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한 연천은 말없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제대로 상황이 파악된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이었다.
“…….”
“…….”
한참을 기다려도 연천은 그 자리에서 술만 마셔댔고, 계속 술을 따르기만 하던 은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협, 이제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말을 마친 은월이 살며시 일어나 걸치고 있던 밝은 빛의 장포를 벗었다.
속이 비치는 장포가 흘러내리자 희고 매끈한 목과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얀 살결이 시리도록 고와 바라보기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슴 아래를 겨우 가리는 아슬아슬한 침의를 통해 아스라이 드러나는 여인의 풍만한 굴곡은 아름다웠다.
연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은월이 침상에 올라앉아 가볍게 몸을 비틀자, 가슴이 도드라지며 탐스러운 원형을 만들어냈다.
잘록한 허리에서 쭉 뻗은 미끈한 다리는 여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아래로 살포시 내리뜬 눈, 말아 올린 은근한 입꼬리에는 사내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 사내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은월이 붉고 도톰한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어 후― 하고 등불을 껐다.
꽃봉오리가 터진 듯 마음을 들뜨게 하는 향이 흘렀다.
유난히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창문으로 은은하게 들이치는 달빛은 은월의 전신을 비추어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은월이 달빛 아래 비스듬히 누워, 육감적이고 관능미 넘치는 모습으로 연천을 기다렸다.
연천이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가, 하얗고 가는 은월의 손을 잡았다.
길고 여린 그녀의 손은 서늘했다.
연천이 따뜻한 손으로 은월의 양손을 꼭 쥐었다.
“몸이 차오, 감기에 걸리겠소.”
말을 마친 연천은 이불을 잡아 은월의 어깨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아련한 달빛 아래 비치던 여인의 아름다운 육신은 사라지고, 그저 두툼한 이불을 뒤집어쓴 한 사람만 존재했다.
“……?!”
은월의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어렸다.
연천이 일어서서 높이 난 작은 창문을 닫았다.
그 창은 특별히 실력 좋은 목수를 불러, 침상으로 달빛이 들어오도록 제작해 놓은 것이었다.
은밀한 달이라는 뜻을 가진 은월의 이름은 그 창과 그곳에서 비치는 달빛 덕에 얻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에 비친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기에, 은월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 창을 연천이 닫아버렸다.
지금까지 저 창문을 닫은 사내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은월이 침상에 눕기까지 기다린 사내도 손에 꼽혔다.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진 고관도 방에 들어서는 은월에게 달려들기 바빴다.
당황한 은월에게 연천이 다가갔다.
은월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사라지고, 다시 여유로운 미소가 흘렀다.
‘그래, 날이 차니 창문을 닫아주려 한 게지. 그럴 수도 있어.’
생각을 하며 덮여있던 이불을 어깨 아래로 슬며시 내렸다.
침상으로 다가온 연천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은월이 눈을 감고 도톰한 입술을 살포시 내밀었다.
“……?!”
포근하고 따뜻한 감촉에 은월이 눈을 떠, 연천을 바라보았다.
연천은 이불을 다시 은월의 목까지 덮어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편히 쉬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에 앉아 술을 따라 마셨다.
은월의 얼굴에는 다시 당황과 실망의 빛이 덮쳤다.
한번 바라보면 눈을 떼기가 어려운 아름다움에 은월을 본 사내의 태반이 그녀에게 연심을 품는데 저 사내는 대체 어찌 생겨 먹었기에 저리 목석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