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은밀한 달의 유혹!】
어린아이의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세상의 시름을 잊는다고 했던가?
은월은 투명하고 무구한 사내를 훑어보며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었다.
과한 시선을 느낀 연천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은월에게 향했다.
은월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하는 연천의 얼굴은 덤덤했다.
여유 있는 미소를 걸치고 있던 은월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고관대작부터, 비렁뱅이 거지까지 사내라는 족속들은 속속들이 안다고 자신하던 은월이 당황한 것이다.
은월이 이 정도의 눈빛을 보내면 사내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은월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족속이 대부분이고, 미인 꽤나 거느려 봤다는 인사들은 밤을 기약하며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해대었다.
은월은 자신을 마주하는 연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속내를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맑은 그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육감적인 여인을 보는 눈은 돌부처를 바라보는 것처럼 평온했다.
연천은 요 며칠 기생을 좀 보았다고 처음보다 여유가 생겼다.
드러난 살결에 시선을 피하지도, 눈을 바닥에 깔린 방석에 두지도 않았다.
기생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은월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미혹되지 않는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내의 맑고 깨끗한 그 무언가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담담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에 자꾸만 빠져들었다.
연천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깐, 은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이 온통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얼떨떨했다.
“우린 줄 것 다 줬으니 이제 자네가 줄 것도 내놓으시게.”
은월의 마음을 모르는 걸화가 서책 속 개방지존을 따라, 어울리지 않는 늙은이 같은 투로 말했다.
연천이 피식 웃었다.
그 짧은 순간, 연천의 순수하고 무구한 미소가 번개처럼 은월의 전신을 짜릿하게 훑고 지나가며, 그녀의 모든 것을 뒤죽박죽 헝클어트려 버렸다.
은월이 낮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연천에게 이끌려가고 있는 정신을 다잡았다.
잠시 후, 표정을 바꾸어 곱게 미소를 걸치고 걸화를 쳐다보았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마척결에 대해서 여쭈셨지요? 천마척결은 당시 마교의 천마였던 혈영천마를 무당과 소림, 화산이 손을 잡고 척결한 사건입니다.”
“알고 있네, 그것은 무림의 똥강아지도 아는 것 아닌가.”
걸화가 은월의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어 그 늙은이 같은 투로 말했다.
말을 하면서 슬쩍 연천을 보고 생각했다.
‘물론 똥강아지도 아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긴 하지…….’
은월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천마가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마의 시신을 찾지 못했지요, 그냥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교의 상징인 천마검도 사라졌습니다. 천마검은 혈영천마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검으로, 그 검 어딘가에 천마에게만 전수되는 천마신공의 오의가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뭐요?!”
연천의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에 말을 하던 은월과 집중해서 듣고 있던 걸화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연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 방금… 무어라 하였소? 천마? 천마신공이라 하였소?”
“…네, 천마신공이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미소가 사라진 은월이 천천히, 힘을 주며 되물었다.
그녀의 눈은 미소를 흘리는 기녀의 것에서 상대를 꿰뚫어 보는 하오문도의 것으로 변해서 연천을 헤집고 있었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도 그 속에 작은 마음 한 조각도 담아두지 않는 사내.
그 사내가 동요하고 있었다.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
은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연천을 관찰했다.
‘천마신공’이라는 그 한마디가 저 사내를 흔들어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마교의 천마신공이 대체 왜?
“아, 아니오, 미안하오. 내가… 착각을 했구려…….”
연천이 어설프게 사과했지만, 그의 동공은 여전히 혼란스럽게 술렁이고 있었다.
은월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차고 의구심 섞인 기운이 방 안에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원래 정보 장사라는 것이 그렇다.
돈을 받고 내 패를 보이면서도 상대에게 뭔가 새로운 패가 있는 것 같으면 의심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펼쳐 보이게 할지 치열한 신경전이 오가는 것이다.
하오문도로서 은월의 감이 저 사내에게 뭔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은월은 저 사내를 정말 알고 싶었다.
은월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대로 신경을 곤두세워 연천을 주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제 몸집을 불려 나갔다.
“천마신공은 무슨~! 아이고~ 저 형님이 은월 소저를 보더니 저리 정신을 놓네~ 놓아, 우리 형님 상사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걸화가 능글맞게 말했다.
걸화는 이런 상황을 겪어 본 경험이 제법 있었다.
물론, 서책 속에서.
이럴 때는 유들유들, 넉살 수법이 최고였다.
걸화의 방법이 통한 것인지 은월이 날 선 신경을 누그러트리며 곱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천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커지던 참이었다.
연천만 좋다면 은월은 오늘 밤을 연천과 함께하고 싶었다.
남녀가 살을 섞으면 오고 가는 것이 많았다.
연천에 대해서도, 이 사내가 숨기고 있는 뭔가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굳이 지금 신경을 곤두세워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호호호~ 소녀, 영광입니다.”
은월이 말을 하며 몸을 슬쩍 비틀었다.
한껏 드러난 가슴골이 도드라졌다.
눈꺼풀을 아래로 향했다가 그윽하게 위로 올리고, 입꼬리를 깊게 말아 올려 연천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성질 급한 사내라면 당장 은월을 끌어안고 바지춤을 내릴 만큼 지독한 색기가 흘렀다.
“으흠, 으흠, 어허… 허허…….”
은월의 노골적인 유혹에 연천이 어색하게 웃었다.
은월과 연천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걸화가 두 사람 사이의 야릇한 분위기를 확 깨며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음! 근데요, 전대 교주들은 다 그냥 천마라고 불리는데 왜 그 교주만 혈영천마라고 불러요?”
어느새 걸화의 말투는 개방지존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은월도 연천에 대해 알고 싶고 그를 유혹하고 싶은 여인이 아닌 하오문도로 돌아와, 익숙하게 미소를 걸친 낯으로 바꾸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마교도들은 묵직하고 거친 마기를 뿜어내지요. 전대 마교주들도 몇몇을 빼고는 그다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 유독 혈영천마만이 천마검으로 천마신공을 운공하면 검신에서 붉고 검은 검기를 뿜어냈다고 하지요. 그것이 꼭 피와 그림자를 뿜어내는 것 같다 하여 혈영이라 부르는 자도 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핏자국뿐이라 하여 혈영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은월은 섬뜩한 말을 덤덤하게 했다.
“…….”
걸화가 그녀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음… 천마신공과 천마검, 이 두 가지야말로 마교 천마의 상징이자 천마의 조건이지요. 헌데 지금 마교의 천마는 천마검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천마신공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여 천마검과 천마신공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연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은월은 혼자 생각에 빠진 연천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말을 이었다.
“한데 그 천마검이 얼마 전 황실의 실세인 영친왕의 수중에 들어가, 그의 왕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에에? 영친왕이 마교의 천마 자리를 노려요?”
걸화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후훗, 영친왕의 의중까지는 알 수 없으나 천마가 지니고 다녀야 할 천마검이 나타났다는 것은 혈영천마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검이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다는 뜻이지요.”
“오호~ 새 주인?”
걸화가 은월의 말에 솔깃해서 눈을 반짝였다.
“많은 무인들이 천마검에 홀린 듯 영친왕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천마검은 자신이 원하는 주인을 만날 때까지 피를 뿌릴 겁니다.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것으로 인해 중원 땅에 피바람이 끊이지 않겠지요.”
그것을 끝으로 은월이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뜻이었다.
“끝났어요? 이제 먹어도 돼죠?”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에 유난히 맛깔스럽게 구워진 새끼돼지 구이를 흘끔거리던 걸화는 은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을 듣지도 않고 눈앞의 접시에 코를 박았다.
“네, 마음껏 즐기십시오.”
은월이 잔잔한 기녀의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와~ 맛있다, 형님도 얼른 드세요.”
걸화가 입 안 가득 기름진 돼지고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나는 이 소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연천의 말에 고기를 씹던 걸화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저 형님도 꼴에 사내라고. 쳇!!’
걸화가 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비틀어 아니꼬운 얼굴로 연천을 흘겨보았다.
은월은 연천의 말에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이 세상에 은월이 유혹하지 못할 사내가 어디 있으랴.
연천은 혈영천마와 천마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지난 몇 달간 욕먹고 눈치 보며 알아낸 것보다 은월에게 들은 바가 더 많았다.
이 좋은 기회를 빌려, 그녀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연천은 이미 말을 끝낸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조심히 물었다.
“괜찮습니다. 소녀가 뫼시겠으니 따라오시지요.”
은월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음?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굳이 장소를 바꿔야 하나?’
연천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주인이 나서는데 객이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자신이 청했으니 따를 수밖에.
“다녀오마, 쉬고 있거라.”
연천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은월을 따라나서며 걸화에게 말했다.
“쳇!!”
걸화는 연천의 뒤통수가 뚫리도록 노려보았다.
은월은 자신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연천을 살짝 돌아보며 설렘과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전에 없던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