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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35화 (35/230)

35화

감정이 가라앉은 연천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려선을 돌아보았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려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작은 걸화의 옷은 려선의 몸을 다 가리지 못했다.

드러난 팔뚝과 다리에도 우악스러운 손자국이 나 있었다.

연천은 자신의 겉옷도 벗어서 려선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려 방을 나섰다.

“야! 야! 일어나! 야! 일어나!!”

걸화가 쓰러진 곽엄택을 발로 툭툭 찼다.

연천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걸화를 돌아보았다.

걸화는 피떡이 된 곽엄택을 발로 깨우고 있었다.

“……?”

연천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갖고 가야죠, 은자가 이천 냥인데.”

걸화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으흠…….”

려선을 안고 있는 연천이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연천은 이천 냥이건 이만 냥이건 곽엄택을 데려가서 현상금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돈 욕심도 없고 그다지 돈이 필요하지도 않은 연천은 그런 수고스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번들거리는 걸화의 눈빛을 보며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걸화의 눈에 곽엄택은 이천 냥 그 자체였고, 그녀는 지금 돈에 눈이 멀어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연천은 이천 냥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사용하고 싶은 곳이 떠오른 것이다.

결국, 걸화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걸화가 수차례 발길질을 해대어도 곽엄택은 꼼짝하지 않았다.

“에잇…….”

얼굴을 찌푸리며 두리번거리던 걸화는 상 옆에 있던 커다란 술동이를 들어 곽엄택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으…으…으…….”

곽엄택이 신음을 흘리며 움찔움찔거렸다.

“야! 일어나! 야! 얼른! 더 얻어맞기 싫으면 얼른 일어나아!!”

걸화가 곽엄택의 옆구리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어…어…으윽…….”

곽엄택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들이 있는 청홍각은 경화루에 새로 온 동기의 머리를 올리는 곳이었다.

말이 좋아 동기고 머리를 올리는 것이지, 실상은 갓 끌고 온 여아를 범하는 곳이니 비명과 악다구니, 손찌검해대는 소리가 허구한 날 울려대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의 걸음이 없는 구석에 외따로 둘 수밖에 없었다.

기루의 제일 내부에 위치한 청홍각은 뒤쪽으로 담을 두고 좁고 어두컴컴한 길로 나 있었다.

연천은 려선을 안고 훌쩍 담을 넘었다.

문제는 걸화와 걸음도 겨우 떼는 곽엄택이었다.

곽엄택은 걸화의 끊임없는 발길질과 악다구니를 들으며 꾸역꾸역 담을 넘었다.

걸화도 발을 바동바동거리며 힘겹게 담을 넘었다.

걸화의 고집과 대단한 집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연천이었다.

별 소용이 없어 보였지만 걸화는 곽엄택의 양손을 꽁꽁 묶어서 그 끈을 잡고 앞장섰다.

그들은 그렇게 백화루로 향했다.

* * *

백화루 입구를 지키던 무사와 하인, 기녀들은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손님들의 조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커다란 손자국이 새겨진 여인을 안고 있는 사내.

려선은 긴장이 풀린 것인지 연천의 품에 머리를 묻고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피로 물든 곽엄택과 그를 묶은 끈을 손에 꼭 쥐고 있는 작은 아이.

손님들이 있는 안으로 안내를 하는 게 맞는지, 어찌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백화루 식솔들은 그 희한한 조합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시녀 하나가 달려가 백화루 주인 은월에게 상황을 알렸다.

곧, 은월과 황련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은월은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던 곽엄택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라 이를 갈고 갈던 놈이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시신이라도 끌고 와서라도 처절하게 응징을 하리라 벼르고 벼르던 놈이었는데 동공이 풀리고,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몸을 휘청대는 놈을 보니 기쁨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곽엄택 주위에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키 크고 호리호리한 서생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예쁘장한 여인, 똘똘하게 생긴 작은 아이.

이 셋이서 곽엄택을 저리 만들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관상을 점쟁이 못지않게 보는 은월이었다.

관상이라는 것은 신에게 의지해서 볼 것도 없는 것이었다.

얼굴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생김이고, 말투와 행동은 현재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니 얼굴 맞대고 말 좀 섞어보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것들을 근거로 미래까지 얼추 답이 나온다.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눈치가 귀신같은 그녀도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빚쟁이에게 잡혀 죽도록 얻어맞고 버려진 것을 주워온 것인가?

“오늘은 그냥 좀 쉬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려선 소저를 부탁드립니다.”

연천이 황련에게 말했다.

은월은 잠에서 깬 듯 자신의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어서 안으로 드시어요. 사월아! 얼른 손님들 방을 준비하거라, 목욕물도 받아라. 덕팔아!! 곽엄택을 당장 가두어라.”

은월이 시녀와 하인들에게 지시하며 연천과 걸화, 려선을 안으로 안내했다.

* * *

연천과 걸화는 백화루에서 마련해 준 방에서 그들이 차려준 음식을 먹으며 쉬었다.

다음날, 은월이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하는 일 없이 기다리느라 심심하고 무료하던 걸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날 저녁, 시녀가 안내하는 전각에 도착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술과 음식이 줄줄이 상 위로 차려졌다.

상 위에 빽빽이 음식을 내려놓은 시녀들이 방에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월이 들어왔다.

날듯이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백색의 하늘하늘한 장포를 걸친 은월의 움직임은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우면서 우아했다.

계산된 몸짓인지 습관인지 알 수 없지만, 기품 있는 자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부각시켰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에서 연신 떨어대는 떨잠은 묘한 색기를 풍겼다.

“백화루의 은월이라고 합니다. 소녀가 정성껏 준비하였으나 부족함이 많습니다.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

연천은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음식을 보며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은월이 이천 냥짜리 전표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곽엄택의 현상금입니다.”

연천은 은월이 내민 전표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탁을 좀 해도 되겠소? 수수료가 필요하면 떼어도 좋소.”

“말씀하시지요.”

은월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전표를 려선 낭자에게 주실 수 있겠소? 저희가 주었다는 말씀은 마시고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서 주었으면 좋겠소.”

나이 든 려선의 모친이 못내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미쳤어요?”

연천의 말에 걸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걸아야, 우리는 괜찮지 않느냐. 숲에서 야영을 해도 좋고, 사냥해서 먹는 것도 나는 좋다.”

연천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걸화의 입이 부루퉁하게 나왔다.

“그 돈을 받으면 너와 나는 값비싼 음식을 먹고 좋은 객잔에서 잠을 자고 편할 게다. 그러는 동안 려선 소저는 아픈 어머니를 걱정하며 일을 해야겠지, 소저의 어머니는 소저가 일하는 동안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고생하는 딸에게 미안해하겠지…….”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연천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걸화가 답을 하여, 그의 말을 막았다.

‘그냥 뒀다가는 어디까지 얘기를 할지 원….’

걸화는 입을 삐죽였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천이 은월에게 말했다.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있어 안타까운 타인을 돕고자 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것도 제 배부르고 제 등 따뜻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야숙을 하고 산 짐승을 잡아먹으면서, 돈 이천 냥을 힘든 모녀에게 턱 하니 내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은월은 공손하게 말하는 연천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본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내 궁금했던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소녀가 하나 여쭈어도 될는지요?”

은월이 얼굴에 걸친 미소를 풀지 않고 물었다.

“네, 물어보십시오.”

연천이 답했다.

“대체 곽엄택을 저 지경으로 만든 이가 누구입니까?”

은월은 질문을 하면서 ‘저 지경이 된 곽엄택을 어디서 주웠습니까?’라고 묻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리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까?”

연천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저 궁금하여…….”

“우리 형님이 그랬죠, 내가 말려서 저 정도지 송장 끌고 올 뻔했어요. 와~ 나 우리 형님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건 처음 봤잖아요.”

걸화가 은월의 말을 끊고 날름 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에 은월은 연천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무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무공은 고사하고 벌레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었다.

방에 틀어박혀 서책만 읽어댄 서생처럼 얼굴이 뽀얗고 하얬다.

큰 키에 이마가 넓고 콧대가 시원스레 뻗어 사내답게 잘생긴 면이 있긴 했지만, 눈은 아이처럼 천진하고 유순했다.

늙은이같이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와 말투, 진중한 표정,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의 윤곽과 골격, 아이같이 순수한 눈빛과 분위기.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절묘하게,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사람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업인 은월조차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어찌 곽엄택을 그 지경으로 만든 건지…….

광에 가두어 둔 곽엄택은 어딘가를 잘못 맞은 것인지 아직도 침을 질질 흘리는 반병신의 모습이었다.

곽엄택의 무공은 은월이 잘 알았다.

몇 년을 수족처럼 부렸으니.

거칠고 제멋대로인 곽엄택을 데리고 있었던 이유가 그의 출중한 무공 때문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이 자가 곽엄택을 그리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뜯어보아도 결론은 똑같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키 크고 잘생긴 사내이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명하고 맑은 순수함이 어린아이처럼 보호해주고 안아주고 싶게 만들었다.

은월은 상반된 매력이 뭉쳐진 연천을 뜯어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상하게도 저 애늙은이 같은 사내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가진 걸 탈탈 털어주고 백화루를 나서면 어찌할지 걱정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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