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자를 잡자!】
열흘 전.
명당이라는 것이 풍수지리가가 ‘이곳이 명당이네’라고 해야 명당인가?
옆으로 맑고 시원한 계곡이 흐르며 뒤로는 녹음이 푸른 산이 끌어 안아주고, 공기가 청명하고, 아버지 눈치 안 봐도 되고, 어머니 잔소리 안 들어도 되며 멀지 않은 곳에 술도가가 있고, 함께 술을 즐길 친구가 있는… 에잉?
뭐… 자기가 좋으면 그곳이 바로 명당이지.
바로 그 명당자리, 평평하고 너른 바위 위에서 단각과 윤거는 익숙하게 술잔을 주고받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요, 너무 많은 것도 아닌 도석산 중턱.
두 사람이 늘 죽치고 있는 곳이라 주변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사냥꾼이 사냥하고 일부러 들러 작은 짐승을 팔고 갈 정도니… 인근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땀 흘리며 산을 타는 자들 눈에, 그들은 신선처럼 보이지 않을까?
최소한 부럽겠지… 사람인데, 보면 술 생각도 나겠지.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술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지나는 이들은 종종 있었다.
단각과 윤거는 인심이… 특히 술 인심이 후했으니.
그날 술을 얻어 마신 자가 온 하북의 벽면을 도배한 용모파기 속의 주인공, 곽엄택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삿갓을 깊이 눌러 쓰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술이 들어가고 몸에 열이 나니 삿갓이고 뭐고 벗어 재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른쪽 눈 아래에서 반대쪽 입술까지 내려오는 흉터가 눈을 확 사로잡았다.
용모파기를 볼 때는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 잡아 죽일 것 같던 놈이었는데 술 몇 잔 들어가니 그도 사람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호탕하게 웃었고, 무엇보다 엄청난 애주가였다.
곽엄택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찾아와 술을 얻어 마시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한번은 꿩을 잡아 와서 같이 구워 먹기도 했다.
술이라는 존재가 대단한 물건이긴 한가 보다.
한량 도령과 현상 수배범을 한자리에서 웃게 만드는 것을 보면.
곽엄택을 잡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단각이었다.
그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거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자를 잡기만 한다면 은자 이천 냥이 손에 뚝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도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아버지와 스승님의 눈빛도 바뀌겠지 싶었다.
그리고 려선이.
그렇게 눈독을 들이고 쫓아다녀도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곽엄택을 잡은 걸 알면 마음이 조금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다.
한번 생각을 하니, 그 마음들이 스멀스멀 커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듯싶었다.
술 마실 때의 곽엄택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경계심 따위도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해 비틀대는 곽엄택 한 사람을 단각과 둘이서 잡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준비만 잘하면 해 볼만할 것 같았다.
술에 수면제를 타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낸 건 바로 윤거였다.
수면제 탄 술만 먹이면 아무리 날고 기는 곽엄택이라도 고꾸라질 수밖에.
무공의 깊이라고는 손에 든 작은 술잔과 같은 두 도령이 그리 생각하고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수면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단각과 윤거는 집으로 돌아갔다.
윤거는 자신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내는 가족들을 무시했다.
‘조만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 어디 그때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는지 보자구, 쳇!’
그리고 무관으로 가서 려선이를 불러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윤거의 으름장이 통했는지, 려선은 불쾌한 얼굴로 나와서 윤거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나 일하러 가야 해.”
윤거를 대하는 려선에게서 찬 바람이 불었다.
늘 그랬다.
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려선은 술이나 퍼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윤거가 좋을 리 없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윤거가 훈훈한 미소를 걸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 아주 큰 일을 하러 간다. 그 전에 네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왔어.’
“하!”
려선은 윤거를 흘겨보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 잠깐만.”
윤거가 다급하게 려선을 불러 세웠다.
“말했지? 난 한가한 너랑 다르다고, 귀찮게 좀 하지 마.”
려선이 등을 돌려버렸다.
“나 현상금 수배범 잡으러 가!”
려선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뭐?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려선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뭘 하려고만 하면 저리 보는지……. 에잇! 이판사판이다.’
“정말이야! 벽보에 붙은 곽엄택 알지? 나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
“…….”
려선이 윤거를 미심쩍은 눈으로 훑어보았다.
“곽엄택하고 술도 여러 번 같이 마셨어, 술에 수면제를 타서 잡을 거야.”
윤거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뭐?”
려선은 여전히 윤거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너를 위해서 잡으려는 거야, 현상금 받으면 은자 이천 냥 모두 네게 줄게. 그 돈이면 이리 고생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잖아,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줘.”
윤거가 당당하게 말했다.
현상금에 대한 것을 단각과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단각도 돈보다는 평판이 더 중요할 테니 잘 설득하면 어찌 되지 않을까?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는 윤거였다.
“…….”
려선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담겼다.
믿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가는 윤거를 믿고 싶은 마음.
“나와 단각은 그자를 잡았다는 명예만 있으면 돼. 정말이야, 돈은 너 가져.”
윤거가 제법 의젓하게 자신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
려선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걱정 마, 단각하고 나는 계획이 다 있으니깐. 너는 기다리기만 해.”
려선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챈 윤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잠시 뒤, 윤거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하던 려선이 결심을 한 듯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
“뭐? 위험할 수도 있어.”
려선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당황한 윤거였다.
“알아!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너와 단각이 가져다주는 돈을 받을 수만은 없어.”
려선의 목소리는 과단했다.
윤거는 려선을 말리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 려선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고.
“흠… 알았어, 내일 오전에 운소재 입구에서 만나자.”
잠시 생각하는 척하곤 답했다.
윤거는 려선의 가늘고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슬그머니 손을 잡으려는 찰나, 려선이 주먹을 꼭 쥐고 자세를 바꾸었다.
“응! 운소재에서 보자!”
려선은 내일을 약속하고 몸을 돌렸다.
“…….”
‘아… 이번엔 손 한번 잡아보나 했는데…….’
윤거도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렸다.
“저기… 윤거야!”
뒤에서 려선이 불렀다.
“왜에?”
윤거가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돌아보았다.
“고마워…….”
려선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윤거가 씨익 웃었다.
“내일 보자.”
돌아서는 윤거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다음 날 아침.
윤거의 마음만큼이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윤거는 신이 났다.
곽엄택을 잡기만 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부모님과 형들의 눈이 변하겠지?
버러지 보듯 하는 그 눈 말이다.
스승님도 지금과는 다르게 대할 것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려선이와 잘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 입이 옆으로 찢어졌다.
몸이 들썩거려 느긋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뛰다시피 서둘러서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운소재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는데 몸이 붕붕 뜨는 것처럼 설레었다.
약속 장소에는 윤거 다음으로 단각이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 려선이 보였다.
“에에?”
려선 옆에 주여월이 경장을 하고 같이 오는 게 아닌가?
윤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여월을 쳐다보았다.
여월이 함께하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평소 작은 일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사사건건 지적질이나 해대고, 어찌나 아는 것이 많은지 잘난 척은 생활이었다.
융통성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어서 쪼끄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스승님께 쪼르르 이르기 일쑤였다.
그냥 옆에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까딱하다가는 엄청난 공을 나누게 될 판이었다.
‘단각과 내가 거의 다 해놓은 일에 한 다리 걸쳐서 잘난 척하려고?’
얼굴만 봐도 불편했다.
“미안해, 윤거야… 걱정이 되어서 여월이에게 의논을 했더니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려선이 미안한 얼굴로 말을 하는데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여인이 려선이 혼자 있는 것도 보기 이상해, 그냥 무관 동무 여럿이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더 좋아.”
이미 려선에게 계획을 전해 들은 여월이 또박또박 설명했다.
윤거는 그저 여월이 잘난 척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 말이 맞다 해도 저 떽떽거리는 목소리와 함께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짜증이 올라왔다.
“야! 그래도…….”
“그리고 누군가 취하게 되거나 그자의 의심을 피하느라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생겨도 한 사람만 정신 차리면 되니 사람이 많은 게 더 유리해.”
여월이 윤거의 말을 자르고 덧붙였다.
윤거가 단각을 쳐다보았다.
단각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와서 가라고 해도 여월의 성격상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지도 몰랐다.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에휴….”
윤거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수면제는 확실한 것으로 준비했지?”
여월은 자신이 이 계획을 이끄는 대장이라도 된 듯이 물었다.
“어! 마불산이라고 의원에서 확실한 것이라고 했어. 그렇지만 그자가 오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 며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구.”
윤거가 뚱한 얼굴을 하고 여월을 떼어낼 마지막 수단으로 말을 던졌다.
“아… 그래도 괜찮아.”
윤거의 생각대로 며칠을 기다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여월이 내키지 않는 눈으로 마지못해 대꾸했다.
려선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거는 찜찜한 얼굴로 여월을 한번 쳐다봤을 뿐 말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마음에 안 드는 여월이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려선이 혼자인 것보다 여월이 함께인 것이 나았고, 사람이 많을수록 곽엄택을 잡는 데 유리할 것이다.
‘에이… 그래도 우리가 다 짜놓은 판에 뒤늦게 끼어들어서는…….’
윤거는 려선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윤거는 길게 숨을 내쉬고 도석산으로 향했다.
제집보다 더 자주 가는 도석산이건만, 오늘은 그 익숙한 곳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