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걸화는 려선의 집에서 나오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오리고기 말고 닭고기가 나으려나? 아까 먹었던 만두도 맛있던데 가다가 좀 더 사 먹을까?’
연천도 생각에 잠겼다.
여인을 격려하며 따뜻한 미소를 보이던 연천의 얼굴에 묵직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연천은 품 안에 손을 넣어 부엌에서 발견한 종이를 펼쳤다.
새하얀 종이에는 한 사내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오른쪽 눈 밑에서 반대편 입꼬리까지 깊고 긴 자상이 나 있는 그림 속 인물은, 대충 봐도 그가 얼마나 거칠고 험하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인상이었다.
험상궂은 얼굴 아래에는 곽엄택이라는 이름 석 자와 은자 이천 냥이라는 금액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현상금 수배용 용모파기였다.
“어? 이거 어디서 났어요? 나도 있는데?”
걸화도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내 펼쳤다.
연천의 손에 든 것과 똑같은 용파였다.
“이것은 려선 소저의 부엌에서 찾았다. 너는?”
연천이 놀라서 물었다.
“여월소저의 방에서요.”
“두 소저가 이 자를 잡겠다고 나선 게 아닌가 싶구나.”
연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걸화가 연천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를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연천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했다.
“…….”
연천의 얼굴을 들여다본 걸화는 차마 닭고기를 먹자는 둥, 만두를 더 사자는 둥 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단각과 윤거라는 아이들의 집에도 한번 가보자.”
골똘히 궁리하던 연천이 생각을 정리한 듯 말했다.
“네!”
비록 당장 먹는 것은 물 건너갔지만, 현상금이 걸린 자를 쫓는다는데 마음이 들뜨는 걸화였다.
무림을 나와 악당을 물리치는 꿈만 같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몸을 가만두기가 힘들고, 설레는 마음이 감당하기 어렵게 벅차올랐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화의 걸음은 오랫동안 기다린 꽃놀이라도 가는 듯 흥에 겨워 보였다.
* * *
단각이라는 아이의 집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꽤 잘 사는 축에 들었다.
기와를 얹은 전각이 몇 채나 되는 커다란 집이었다.
“단각이 그놈이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게요?”
단각을 찾는 연천에게 아이의 아비가 꺼낸 첫마디였다.
걸화는 또다시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누가 걸화의 이름 세 글자만 내뱉어도 그녀의 아버지 반응이 꼭 저랬다.
‘걸화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게냐?’라고.
만두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걸화의 입맛이 씁쓸했다.
“그것은 아니고 단각 소협과 같은 무관에 다니는 여월 소저와 려선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저희는 여월 소저의 부친을 도와 소저를 찾는데 혹시 소협이 아는 것이 있을까 하여 왔습니다.”
연천이 찬찬히 설명했다.
연천의 설명에 상기되었던 아이의 아버지 얼굴이 진정되는 것이 보였다.
“그놈이 뭘 하고 다니는지… 원… 진성아! 밖에 진성이 있느냐?”
밖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잠시 후, 십 대 후반쯤 되는 어린 하인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하인, 진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분들이 단각이를 찾아오셨다. 그놈 지금 어디 있느냐?”
“…도련님이야 무관 동무들과 열심히 수련 중이시지요.”
나이도 어린 하인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쯧쯧…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린다고 가려지느냐? 내가 그놈이 하고 다니는 짓을 모를까 보냐?”
하인을 나무라는 단각의 아비는 그다지 노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
하인 진성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뻔한 거짓말을 들킨 것에 대해서 죄송해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하인의 거짓과 주인이 불신하는 요상한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분위기로 보건대 단각의 하인이 단각을 대신에서 거짓을 고하고, 아비가 믿지 않는 일이 일상인 모양이었다.
하인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단각이 시킨 대로 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런 것인지, 주인은 거짓을 고하는 하인을 제대로 꾸짖지도 않았다.
“중요한 일이니 이분들께 솔직히 말씀드리거라.”
다 알고 있다는 주인의 말에 진성이 민망한 듯,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도석산 아래에서 약주 드시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놈이 그러면 그렇지… 쯧쯧… 이분들을 단각이에게 모셔다드리거라.”
단각의 부친은 알만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하인에게 지시했다.
“네.”
진성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연천이 단각의 부친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못난 아들을 둔 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소저들이 무탈하기를 바라겠소이다.”
단각의 부친은 예를 갖추어 말했다.
연천과 걸화는 하인 진성을 따라 방 밖으로 나왔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진성이 몸을 돌려 연천과 걸화를 보았다.
“잠깐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도련님 드실 술 하고 안주 좀 챙겨서 나오겠습니다. 집에 음식 드신 지 꽤 돼서… 가져가면 좋아하십니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친 진성이 안채로 들어갔다.
진성은 단각이 도석산 아래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주인에게 거짓을 고한 게 맞았다.
주인 또한 아들놈을 챙기는 하인을 나무라지 않은 것이다.
잠시 후, 나타난 진성은 작은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단각의 술과 안주를 챙겨 가져다주는 것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진성이 보퉁이를 들고 앞장서고 연천과 걸화가 뒤를 따랐다.
“단각 소협이 도석산에 자주 갑니까?”
연천이 걸으면서 물었다.
하인 진성에게 존대까지 하면서 말이다.
“자주…라기보다는… 날 따뜻할 때는 거기서 산다고 봐야지요, 쩝…….”
진성은 자신의 치부라고 드러내는 듯 겸연쩍게 웃었다.
‘팔자 한번 좋은 사람이구먼.’
걸화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연천과 걸화는 부지런히 걷는 진성을 따라 말없이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진성은 도석산 산길을 익숙하게 올랐다.
잘 다져진 산길은 오르기가 힘들지 않았기에, 걸화와 연천도 어렵지 않게 진성 뒤를 따랐다.
제법 걸어 올라가던 진성이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곳 옆의 너른 바위를 가리켰다.
“저깁니다.”
가까이 다가간 바위 위에는 호리병과 술잔이 작은 소반 주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도련님 술 받으러 가셨나? 들어가서 주무시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성은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진성을 따라가던 연천은 바위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싸움을 한 흔적이 있다.”
연천이 바닥에 흙이 쓸린 자국과 나무가 부러진 모양새를 살피며 말했다.
“도련님이 여기 안 계시네요. 술 받으러 가셨나 봐요.”
숲 안쪽에 작은 움막 안을 살피고 나온 진성이 말했다.
“그게 아닐 수도…….”
연천은 바닥의 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아요. 최소 너덧 명은 있었어요.”
걸화도 연천의 옆에서 바닥을 살피며 말했다.
모양이 다른 발자국이 최소 넷은 되었다.
“여기 있으시게.”
연천이 하인 진성에게 말하고,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잘 다져진 산길이 아닌, 숲속으로 자국이 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나뭇가지나 바위의 흔적을 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 여러 명이 조심성 없이 걸어간 자취를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행히 최근에 비가 내리지도 않았고, 그 길을 지난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천과 걸화는 거의 한 시진 가까이 산을 탔다.
흔적을 찾으며 산을 올랐기에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못했다.
주위를 살피며 걷던 걸화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앞쪽에 있어요. 사내가 셋인데 하나는 강한 편이고 둘은 그저 그래요. 그리고 여인이 하나… 한 명뿐이에요.”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연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걸화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 틈을 지나 깊은 산에 든 연천을 쫓아왔었고, 가까이 있는데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놀라운 은잠술과 추적술이야, 어리고 허술해 보이지만 대단한 실력을 감추고 있는 건가?’
연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그냥 느껴지는데? 어? 이런 거 다들 아는 거 아니에요? 한 명은 무공이 강한데… 형님이 이길 수 있는 거 맞지요? 괜히 갔다가 진탕 얻어맞는 건 아니지요?”
걸화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게…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연천이 무안한 낯으로 말했다.
연천은 자신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지금껏 스승님과 둘만 살았는데 어찌 알겠는가.
가끔 숙부님이 오셨지만, 그뿐… 태어나서 한 번도 비무나 대련을 해본 적 없는 연천이었다.
자기 실력도 모르거니와, 무림인들의 능력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저 스승님이 가르쳐 준 것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볼 뿐이었다.
“에엥? 뭐가 그렇게 당당하게 무책임해요?”
걸화가 뜨악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내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기회가 없었다. 너야말로 무공이 대단하지 않느냐?”
연천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걸화의 기감이 저리 뛰어나니, 무공 또한 대단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난 무공 못해요. 제대로 배운 적도 없어요.”
걸화는 코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자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연천이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야 하는지, 계속 앞으로 가는 게 맞는지 갈등이 생겼다.
“뭐? 그럼 너의 그 추적술과 은잠술은 뭐냐?”
“내가 무슨 추적술과 은잠술이 있다고 그래요? 아… 형님 겁나게 왜 그래요?”
걸화는 자신이 추적술과 은잠술이 있다는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이 긴박한 상황에, 대책 없는 저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제는 악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기쁨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앞섰다.
“그게… 좀 불안하긴 하다.”
연천이 멋쩍게 웃었다.
“아, 형님!”
걸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거라, 거의 다 왔다.”
연천이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아이… 진짜…….’
걸화도 얼떨결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연천의 말 때문에 속이 빠짝빠짝 타들어 갔다.
‘아… 이거 계속 가도 되는 거 맞나? 저 형님 믿어도 되는 거야?’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