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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28화 (28/230)

28화

도선상회에서 반 시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아랫마을 역시 만만치 않은 촌 동네였다.

오래된 집들과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 두엇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넓은 논과 밭, 낮은 산에 나무와 풀이 지천인 마을이었다.

작은 마을에 하나뿐인 무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걸화와 연천은 낡고 아담한 무관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아이가 물었다.

새파란 무복을 입은 아이의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관주 계시오?”

연천이 예닐곱은 되었을까 싶은 아이에게 존대하며 물었다.

‘암튼 융통성 없기는…….’

걸화가 속으로 생각했다.

“누구라고 전할까요?”

낭랑한 목소리의 아이가 처음 본 사람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월 소저에 대해서 여쭐 것이 있다고 전해주시오.”

연천은 도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어린아이에게 미소를 담아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연천과 걸화는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무관 입구에서 기다렸다.

활짝 열린 무관의 나무문은 오래되고 낡았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특히, 문손잡이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아이가 사라진 길 역시 비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빗자루 자국이 정갈하게 나 있었다.

잠시 후, 아이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안으로 드세요.”

두 사람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아이가 예를 갖추어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무관 안으로 앞장서 걸었다.

연천과 걸화는 반듯하게 걸어가는 아이를 따랐다.

아이가 안내한 작은 정자에는 몸이 탄탄한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이가 입은 것과 똑같은 새파란 무복을 입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에 기개가 호협한 것이 시골 무관에 있기에 아까운 인물이었다.

연천과 걸화가 다가가 포권지례를 했다.

관주도 마주보고 포권을 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연천과 걸화는 관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정자의 위치를 잘 잡은 것인지, 정자를 지은 목수의 실력이 상당한 것인지 뜨거운 한낮임에도 정자 안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월이에 대해서 물을 것이 있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관주가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주여월 소저가 갑자기 사라져서 저희가 찾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여월 소저가 사라진 건 알고 계십니까?”

연천이 차분히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고 여월에 대해 물었다.

“그럼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관에 오는 아이인데 며칠이나 보이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얼마 전, 여월의 아버지가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며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평소와 다른 기색은 없었습니까?”

“여월이는 워낙 성실한 아이라 언제나 열심이었지요. 평소와 다른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관주가 어두운 낯으로 말했다. 그 역시도 여월을 걱정하고 있었다.

“여월 소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그마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말씀해주실 게 없으실까요?”

“음… 그러고 보니 여월이와 같은 날부터 나오지 않는 아이가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관주가 말했다.

“어떤 아이입니까?”

연천이 관주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려선이라는 아이인데 무공을 배우는 것은 아니고, 허드렛일을 거드는 아이입니다. 평소 여월이와 친하게 지내긴 했지요. 어머니가 아파 며칠씩 안 나오곤 해서,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관주는 려선이 나오지 않는 것과 여월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작은 것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말을 꺼냈다.

“그 두 소저 말고 나오지 않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음… 단각이와 윤거도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 두 녀석이야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다.”

“다른 특별한 것은 없습니까?”

“저도 여월이 무관에 나오지 않아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무관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의 집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럼요.”

관주는 세 명의 집 위치를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관주에게 인사를 하고 무관을 나왔다.

연천과 걸화는 무관에서 멀지 않은 려선의 집부터 가보기로 했다.

려선의 집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작은 초가였다.

“계십니까?”

연천은 대문도 없는 집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아무도 안 계세요?”

좁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며 몇 번이나 주인을 부르는 연천이었다.

“아무도 없나 봐요, 그냥 들어가 봐요.”

성질 급한 걸화가 연천을 재촉했다.

연천은 차마 주인의 허락 없이 더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주인을 불렀다.

“누구 없습니까? 안 계세요?”

‘으이그… 하여튼…….’

걸화가 연천을 쳐다보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한참 후, 색이 바랜 창호지 문이 힘겹게 열리며 병색이 완연한 여인이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뉘십니까?”

“아… 계셨군요……. 여기가 려선 소저의 댁이 맞습니까?”

연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저희는 여월 소저 부친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혹시 려선 소저 계십니까?”

“며칠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끊길 듯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 무슨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짧게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곧 꺼져버릴 듯 불안했다.

“들어오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너댓새쯤 된 것 같습니다…….”

몸을 기대어서 밖을 보고 이야기하던 여인은 기운이 없는지 무너지듯 바닥에 누웠다.

연천이 깜짝 놀라 여인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기운이 좀… 없어 그렇지, 괜찮습니다…….”

연천은 여인을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눕히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제가 부엌을 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여인은 눈을 감았다. 기운이 많이 딸리는 모양이었다.

조심히 방의 문을 닫은 연천은 부엌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사용하지 않은 부엌에는 얇은 먼지가 덮여 있었다.

연천은 쌀독을 찾아 열었다.

작은 독의 밑바닥에는 겨우 한 줌의 곡식이 깔려있었다.

연천이 걸화를 돌아보며 은전 한 닢을 내밀었다.

“너는 가서 쌀과 기름이 없는 고기, 그리고 신선한 야채를 좀 사 오너라.”

“네에?”

연천이 무엇을 하나 지켜보고 있던 걸화는 뜻밖의 심부름에 눈을 끔뻑였다.

“어허! 어서 가지 않고 무얼 하는 게야?”

“네…….”

걸화가 마지못해 은전을 받아들었다.

“오리고기도 안되고 죽엽청도 안 된다. 어디로 새지 말고 곧장 시킨 것을 하거라.”

불안한 연천이 걸화에게 당부했다.

“에…….”

걸화는 려선의 집을 나오면서 구시렁거렸다.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배우려는 무공은 구경도 못 했구만… 에잇.”

연천은 팔을 걷어붙이고, 얼마 남지 않은 쌀을 깨끗이 씻어 물에 불렸다.

주방의 먼지를 닦고 그릇들을 씻었다.

선반을 닦아 그릇을 올리려던 연천은 제일 구석진 선반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접힌 종이를 펼쳐 보는 연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씻은 그릇을 선반에 올렸다.

연천의 표정이 묵직하게 변했다.

잠시 후, 걸화가 쌀과 몇 가지 식재료를 사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무거운 쌀을 메고 온 걸화의 이마에는 땀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수고했다.”

걸화에게 한마디를 한 연천은 고기를 잘게 다지고 야채를 썰어 불려놓은 쌀로 죽을 끓였다.

걸화가 코를 벌름거리며 킁킁댔다.

“와! 냄새 좋다, 나도 좀 먹어도 되죠?”

걸화가 끓고 있는 솥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너는 나가서 먹을 것을 사줄 터이니 지금은 좀 참거라, 만두를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와… 형님…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환자 먹을 음식에 눈독 들이는 네가 더 치사해 보인다.”

걸화가 연천의 뒤통수에 대고 입을 삐죽거렸다.

연천은 죽이 다 익자 그릇에 담아 따뜻한 차와 함께 여인이 있는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걸화는 입을 내밀고 연천의 뒤를 졸졸 따라 방으로 들었다.

“좀 일어나 보십시오.”

연천이 여인을 깨워 앉혔다.

기운이 없는 여인의 뒤에 이불을 두둑이 받쳐 주었다.

“차부터 좀 드셔보십시오.”

연천은 여인이 차를 마시게 도와주었다.

“죽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연천은 죽을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고 여인의 입에 떠 넣어 주었다.

‘형님은 저 여인을 언제 보았다고 저리 살뜰히 보살피는 게야?’

여인은 묽은 죽 한 숟가락을 한참 만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연천은 여인이 죽 한 숟가락을 다 먹기를 기다려 다시 죽을 떠먹이며 그녀가 죽 넘기는 것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걸화는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연천을 쳐다보았다.

‘와… 저 형님은 뭘 저렇게 웃어? 저 여인이 죽 먹는 게 그리 기특한가? …나는 더 잘 먹을 수 있는데…….’

걸화가 그러거나 말거나 연천은 쉬지 않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여인의 입으로 죽을 떠 넣었다.

‘참… 뜨거우면 좀 뜨거운 대로 먹으면 되지 엄청 호호 불어서 먹이네. 아… 죽 냄새 좋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 같아.’

걸화는 자신의 배를 쓱쓱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죽을 반 그릇쯤 비운 여인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렀다.

“고맙습니다……. 자식 앞길에 짐만 되는 어미라 이대로 그만 죽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려선 소저가 부인을 두고 어디를 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여월이라는 소저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무슨 사고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슬이 맺힌 여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부디 몸을 챙기십시오. 부엌까지 걸어갈 수는 있겠습니까?”

여인은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곡식을 넉넉히 사 놓았으니, 자주 해 드십시오. 차와 죽 한 그릇은 여기 탁자에 놔두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소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희는 그만 가볼 터이니 몸을 잘 챙기십시오.”

여인은 눈물이 복받쳐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계속 여인 옆에 있을 수도 없기에, 연천과 걸화는 집 밖으로 나왔다.

연천은 마음이 쓰이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고 걸화는 저녁에 오리고기를 먹을까, 돼지고기를 먹을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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