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어찌… 어찌… 걸화를……】
“이제 와서 이럴 것이냐, 약조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할 게 뭐가 있느냐? 받아놓은 물에 들어가서 씻으면 될 것을!!”
“먼저 씻으시면 안 돼요?”
“걸아야! 제발 좀 씻자, 이게 그렇게 떼를 쓴다고 될 일이냐!”
“…좀 있다 씻으면 안 될까요?”
뜨거운 물을 받아놓아, 따뜻하고 습하던 공기는 어느새 축축하고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걸화를 어르고 달래느라 힘을 뺐더니 뒷목까지 뻣뻣했다.
연천은 이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그만하고 싶었다.
“나와 동행하면 씻기로 하지 않았느냐!”
“치이… 그래도 씻는 건 좀… 형님! 형님이 잘 몰라서 그런데 이 거지 행색이 무림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아세요? 일단 씻는 거 입는 거 신경 안 써도 되니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절약되고, 가끔 먹을 거나 돈을 주는 이도 있어요. 거기다 아무 데서나 먹고 자도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고….”
“걸아야!! 제발 좀 씻어라!!”
침착하던 연천의 언성이 높아졌다.
“천천히… 차차 씻으면 안 될까요?”
걸화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걸화도 씻는 것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꽤 오랫동안 씻지 않고 살았지만, 씻고 싶을 때 씻는 게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막상 씻으려고 하니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것들을 벗겨내는 것이 이상했다.
옷을 벗는 것만큼 어색하고 남부끄러웠다.
“씻는 걸 뭘 천천히 한단 말이냐!!”
눌렀던 연천의 짜증이 복받쳤다.
걸화도 연천의 짜증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씻는 것이 자신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씻는 게 뭐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걸화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구시렁댔다.
연천은 기가 차서 말이 턱 막혔다.
이 말도 되지 않는 걸로 한 식경 넘게 입씨름을 하고 있는 연천은 기운이 쪽 빠졌다.
연천이 눈을 깊이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잠시 뒤, 한결 편한 얼굴로 눈을 떴다.
“걸아야!! 어서 씻어라! 씻지 않으면 너와 동행하지 않을 거다.”
연천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와… 이 형님… 진짜…….”
‘치사해…’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입만 삐죽일 뿐이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만난 스승인데…….’
여기서 연천을 놓칠 수는 없었다.
걸화의 시커먼 얼굴은 불퉁하게 부풀어 있었다.
“옷 여기 있다.”
연천은 걸화의 불만 어린 표정을 무시하고, 장에서 구입한 옷을 선반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손으로 옷 만지지 말고 씻고 갈아입어라.”
“와… 형님… 아 정말… 아아아아아~”
나름의 고뇌에 찬 걸화가 혼자서 마지막 발악을 했다.
“나가요! 이제 씻을 거예요.”
“뜨거운 물을 더 가져다 달라고 하마.”
연천이 묵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더 필요 없는데…….”
걸화가 혼자 구시렁댔다.
연천이 피식 웃더니 목욕물이 준비된 방을 나갔다.
* * *
천상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어찌! 걸화를 놓쳤단 말이냐!! 어찌!”
며칠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개방을 뛰쳐나가려는 것을 걸부와 수하들이 막았다.
발버둥을 치던 천상은 결국 침상에 드러누웠다.
“어찌… 어찌… 걸화를… 어찌…….”
천상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객잔에서 급히 뒷마당으로 가시기에 당연히 뒷간에 가는 줄 알고… 아가씨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기척을 찾기가 몹시 어려운지라…….”
백결신영 일행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걸 말이라고!!”
기운 없이 누워있던 천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주님, 고정하십시오. 전 개방 분타에 걸화의 용모파기를 돌렸으니 곧 찾을 겁니다. 개방의 실력을 믿지 않습니까.”
걸부가 천상을 달랬다.
걸화의 무림행은 목적도 없고, 연고도 없었다.
개방의 분타들을 들르는 걸부와 걸윤의 무림행과는 달랐다.
그러니 천상이 뛰쳐나가 아무리 헤맨들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으로서는 개방 분타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찌… 걸화를…….”
천상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크고 넓은 풍채에 괄괄한 성격의 천상이었다.
개방도들에게는 개방을 감싸고 있는 소령산 만큼이나 든든하고 커다란 존재였다.
그런 천상의 여리고 아픈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만큼 걸화는 천상에게 소중하고 귀한 존재였다.
“…….”
감히, 누구도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총타에서 개방의 전 분타에 두 장의 용모파기가 내려갔다.
분타에서는 두 장의 용파를 들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크고 또렷한 눈매에 도독한 콧방울, 찍어낸 듯 동그란 입술을 가진 귀여운 여인의 용모파기와 눈, 코, 입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때가 켜켜이 낀 거지의 용모파기.
그 두 장이 동일인이니 찾으라고 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 아닌가, 이걸로 어찌 찾을 수 있을는지…….
분타에서도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 * *
걸화가 쭈뼛대며 객잔의 식당으로 내려왔다.
늘 얼굴을 가리던 것을 씻고 민낯을 드러내려니 발가벗은 것마냥 수줍고 창피했다.
식당에 앉아있던, 연천은 내려오는 걸화를 보며 빙긋 웃었다.
걸화는 뽀얗고 하얀 얼굴에 두 뺨만 꽃분홍색을 띠었고 맑고 큰 두 눈은 또랑또랑하게 반짝였다.
귀엽게 오뚝 선 콧대에 도톰하고 동글한 입술은 뭔가 마음에 안 들어 부루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이것 보아라, 씻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리도 인물이 훤하구먼.”
연천이 씻은 걸화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말했다.
“…….”
걸화는 뚱한 표정으로 연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연천은 걸화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국수 두 그릇을 시켰다.
점소이는 빠르게 국수를 내어왔고, 걸화는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었다.
“거 좀… 천천히 좀 먹거라.”
연천이 급하게 국수를 욱여넣는 걸화에게 말했다.
“현님! 오디고기당 죽업천도 가치 멍는 건 어때요?(형님! 오리고기랑 죽엽청도 같이 먹는 건 어때요?)”
걸화가 입 안 가득 국수를 밀어 넣은 채 물었다.
“훤한 대낮에 죽엽청은 무슨… 그리고 돈도 아껴야지.”
연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걸화를 타이르듯 말했다.
“돈… 형님! 저한테 돈이 좀 있는데…….”
입 안에 꽉 찬 국수를 꿀꺽 삼킨 걸화가 말했다.
걸화는 무림행을 나서면서 티 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챙겨 올 수 있는 만큼 돈을 가지고 나왔다.
천상은 딸아이에게 후했으니 걸화의 전낭은 제법 두둑했다.
“됐다, 그건 넣어 두어라.”
연천이 걸화의 말을 끊었다.
연천에게 걸화는 그냥 거지였으니, 돈 몇 푼 있다고 한들 그것을 어찌 쓰겠는가.
그리고 연천도 숙부 덕에 사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국수나 먹는 소박한 여행은 그가 선택한 것일 뿐.
“나 돈 많은데… 형님! 국수 한 그릇 더 먹어도 돼요?”
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작고 마른 걸화가 입으로 음식을 구겨 넣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걸화는 국수 세 그릇을 비우고 연천과 함께 객잔을 나왔다.
“너는 들어가 있어라, 나는 볼일이 있다.”
연천이 자신을 따라 나오는 걸화에게 말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앞으로 쭈―욱 같이 다닐 건데, 나 버리고 어딜 가려고요?”
걸화가 샐쭉한 얼굴로 물었다.
“버리긴 누가 버렸다고, 그 소리를 또… 그럼 넌 멀찍이 있거라.”
연천이 마지못한 얼굴로 말했다.
“에…….”
걸화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연천은 객잔을 나와 장터로 걸음을 옮겼다.
걸화는 연천의 뒤를 졸졸 따랐다.
“아잇…….”
걸화가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두어 명의 거지가 그녀 옆을 지나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던 걸화는 깜짝 놀라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방금 얼굴을 향했던 곳에도 거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 진짜…….”
장터를 주의 깊게 살펴보니, 거지가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뭔 놈의 거지가 이렇게나 많아!”
걸화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원래 거지는 많았다. 십만 개방도라 하지 않던가.
천상이 방주가 된 이후 개방도의 수를 급격히 줄였지만, 세상 모든 거지들은 개방의 영역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지들의 비상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게 다른 두 개의 용모파기 속 주인공인 배걸화를 찾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최우선으로 찾아내라는 명령이 각 분타와 소분타로 내려왔다.
전국 십만의 거지들이 걸화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서 구걸하던 거지 하나가 걸화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귀신같도록 정확하다 자부하는 거지들의 눈에도 걸화의 얼굴은 어디서 본 듯 아닌 듯 아리아리했다.
걸화가 남장을 한데다, 씻은 덕분에 눈이 매섭기로 소문난 개방의 거지들도 걸화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찔리는 게 있는 걸화는 거지들을 피하기 바빴다.
걸화는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획획 돌려가며 연천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많은 장터를 천천히 돌아보던 연천은 가장 큰 점포 앞에서 멈춰 섰다.
비단과 값비싼 의복을 파는 점포였다.
연천은 점포 옆에서 기다렸다.
“형님, 뭐 하세요?”
걸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손님이 많지 않느냐? 손님이 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연천이 태연하게 설명했다.
“뭐 남부끄러운 걸 살려고 손님이 없을 때까지 기다립니까?”
거지의 눈을 피하느라 기운 빠진 걸화가 투덜댔다.
“…….”
연천은 대꾸하지 않고, 손님을 상대하는 주인장만 쳐다보았다.
한참 후.
“아후… 다리야… 배도 고픈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걸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물었다.
“너는 먼저 객잔으로 돌아가 있거라.”
한 시진이 넘게 서 있었지만 연천은 힘든 기색도 없었다.
“싫어요. 형님하고 같이 갈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에…….”
걸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해서야 점포가 한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