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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22화 (22/230)

22화

【확실한 녀석들로 붙여놔!】

꽁꽁 묶은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야!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어, 독이 퍼진 것 같아.”

걸화는 다른 끈으로 허벅지를 묶었다.

“씨잉… 무림 근처에도 못 가보고 여기서 죽는 거야? 아버지… 잉…….”

시커먼 얼굴에 유일하게 맑은 눈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나와, 더러운 얼굴에 길을 만들어 냈다.

자꾸만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괄괄하고 성질이 급하긴 했지만, 속은 여리고 따뜻한 분.

아버지가 자신을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걸화가 제멋대로 크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울컥울컥 올라오는 성질을 참으며 자신의 가슴만 쿵쿵 쳐대던 그녀의 아버지, 개방의 방주.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요…….”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씻지 않은 얼굴의 때와 먼지와 아무튼 더러운 것들과 만나 불결하고 시커먼 범벅을 만들어냈다.

“독이 퍼지고 있는 거 같아……. 이잉… 내장! 내장은 중요해…….”

걸화는 끈으로 아랫배를 꽁꽁 묶었다.

“심장도 중요해… 거기는 절대 독이 퍼지면 안 돼……. 으응…….”

끈이 모자라자 거적 자락을 쭉 찢어서, 심장의 아래쪽 가슴도 세게 묶었다.

“이쪽 다리도… 아… 팔도…….”

그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몸 이곳저곳을 단단히 묶었다.

“켁…케엑… 컥…억…커억……. 여기는… 너무 세게 묶었나?”

목을 끈으로 묶던 걸화는 컥컥거리며 끈을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눈, 코, 입 다 중요한데… 아파… 아… 컥… 독이 퍼지나 봐… 아… 아버지… 켁…….”

걸화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죽더라도 아버지는 한 번 더 뵙고 죽어야지,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눈뿐만 아니라 양쪽 코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국물이 흘러, 그녀의 더러운 코에서 아래로 길을 만들었다.

손을 들어 옆으로 대충 훔쳐냈다.

그 손길을 따라 방향을 틀며, 코 아래에 이채로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아버지이이이…….”

눈앞이 뿌연 게 잘 보이지 않았다.

독이 서서히 퍼져오는 게 느껴졌다.

뱀에 물린 한쪽 다리에 조금씩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이이이이… 혀엉… 나 여기 있어, 나 찾는다고 했잖아아아…….”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눈물 때문인지 독 때문인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걷고 또 걸었다.

점점 감각이 사라지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한번 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걸었다.

“걸윤아!! 나 숨으면 잘만 찾더니 오늘은 왜 안 찾는 거야아아아…….”

이제 다리에 아주 감각이 없었다.

다리뿐 아니라 팔도 감각이 사라지고 목도 답답했다.

“나 이렇게 죽기 시러어어… 으아아아아악!!”

다리를 질질 끌며 비틀비틀 걷던 그녀가 수풀 옆으로 난 비탈로 발을 헛디뎠다.

급하게 경사진 언덕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독이 퍼지는 몸으로 가파른 비탈에 구르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르는 몸은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히고,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가 몸을 긁어댔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최대한 작게 말았다.

몸이 구르는 대로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아… 내 인생 십육 년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무림에 나가서 무공도 배우고, 의형제도 맺고 악당을 물리치고 싶었는데… 이제 죽는구나. 아버지… 형… 걸윤아!! 잘 살아라, 나를 잊지 말고…….’

걸화의 의식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정신을 차린 곳은 버려진 폐가였다.

그날, 그곳에서 아교풀로 봉해 놓은 것처럼 뜰 수 없던 눈을 뜨게 해준 그분을 만났다.

뱀에 물린 것을 행운이라 해야 할지, 벼랑에 구른 것을 복이라 해야 할는지.

토끼고기를 기가 막히게 구워내던 그분은… 아릿한 달빛 아래서 눈부신 검을 휘둘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리라 다짐하는 걸화였다.

* * *

같은 시각 개방에서는.

“뭐어? 찾았다고? 그럼 당장 데리고 오지 않고 뭘 한 게야!!”

천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열을 올리며 두 주먹을 꼭 말아쥐고 혼잣말을 이었다.

“더 기다릴 것도 없어! 명문가가 아니더라도 적당한 곳을 골라 바로 시집을 보내버려야지…….”

“그냥 두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잔뜩 흥분한 천상의 말에 대꾸한 사람은 염문강이었다.

염문강은 천상이 제일 처음 총타에 데려와 가르쳤던 어린 거지들 중 하나였다.

머리가 좋고 영민한 데다 냉정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천상의 측근 중 하나로 개방 총타의 모사로 있었다.

실제로 하는 업무는 성질이 급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천상을 절제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뭐! 뭘 그냥 둬? 당장 데리고 와서 방에 가둬야지!! 문밖으로 한 발짝도 못나게 할 테다!”

천상의 입에서 굵은 침방울이 튀었다.

“아가씨 나이가 올해 열여섯입니다. 언제까지 가두어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염문강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 시집을 보내겠다는 게지!! 내가 그리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은 게야!”

천상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도 아가씨를 모르십니까? 그렇게 시집을 보낸다고 모든 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 성정에 시집을 간 후에 무림에 나가겠다고 뛰쳐나오면, 개방과 방주님의 망신은 물론이고 소박을 맞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염문강이 표정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어디 그런 막말을!!”

화가 난 천상이 내공을 실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무실이 벽이 우르르르 흔들렸다.

염문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말을 했다.

“정말 아가씨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천상은 염문강의 물음에 얼굴이 벌게졌을 뿐, 답하지 못했다.

“…….”

염문강은 천상의 시뻘건 얼굴을 보고도 담담했다.

“어이구… 내 속이야!! 내가 그것 때문에, 속이 터져서 죽지 죽어!!”

천상은 염문강의 물음에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 주저앉아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염문강의 말이 맞았다.

데리고 와서 가두는 것도, 시집을 보내버리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처럼 말도 없이 도망을 친다면,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대신 실력 있는 자들을 보내서 계속 감시하라고 해뒀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염문강이 천상을 달랬다.

“…….”

천상은 답 없이 가슴만 쳐댔다.

“일이 잘될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무림에 나가보고 무림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깨닫고 철도 좀 들어서 오면, 그때 좋은 혼처를 찾아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염문강이 좋은 상황을 이야기하며, 천상의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아…….”

천상이 깊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걸화는 지금 어쩌고 있느냐?”

천상이 많이 침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숲속에서 발을 헛디뎌 다치신 것 같….”

“무어!! 다쳐!! 거기가 어디야! 내가 당장 가서 데리고 와야겠다.”

천상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말을 끝맺지 못한 염문강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불뚝 일어났다.

“방주님! 정말 아가씨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돌멩이나 던지고 작대기를 들고 뛰어다니게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염문강이 과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천상은 다시 깊은 한숨을 쉬고는, 털썩 주저앉아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지나가는 약초꾼이 구해 소령산 아래, 폐가에서 쉬고 있는 듯 합…….”

“무어! 약초꾼!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거늘 다 큰 처자와 약초꾼이!! 그러다가 둘이 덜컥 정분이라도 나면 어떡하느냐!!”

천상이 다시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으흠…….”

이번에는 염문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의 핏줄이 더욱 도드라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가야겠다.”

천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약초꾼은 아가씨가 사내인 것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염문강이 천상을 말리기 위해 급하게 말했다.

“뭐? 그 약초꾼은 봉사더냐? 아니면 눈이 삐었어? 그리 어여쁜 아이를 보고 어찌 사내라고 생각해?”

천상의 말꼬리가 심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휴우후…….”

염문강의 한숨 소리가 깊고 길어졌다.

“…….”

천상은 허공에 보이지 않는 약초꾼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가씨가 사내의 복장을 하고 있는 데다가, 물론 어여쁘기는 하지만 얼굴을 그… 땟국물과 먼지로 위장을 하고 있어서 여인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염문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완화해서 말했다.

염문강도 걸화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누구보다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유모가 죽고 나서는 자신도, 개방의 다른 누구도 그녀가 여인이라는 생각은 고사하고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개방을 돌아다니는 하나의 괴이한 생명체 정도로 여겨, 웬만해서는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대충 걸친 넝마는 땟국물이 줄줄 흘렀고, 언제 씻었는지 얼굴에는 개기름과 검은 국물이 켜켜이 쌓여서 거지들이 봐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거기다 성질은 어찌나 괴팍하고 제멋대로인지…….

총타에 드나드는 아무나 붙잡고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복수라는 미명 아래 몰래 숨어 돌을 던지고 작대기로 후려쳤다.

개방 총타에 출입하는 대부분이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아무리 후하게 보아주어도 방주의 딸이 아니라면 복날 개 패듯이 패서는 개방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그,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서 확실한 녀석들로 붙여놨지?”

천상이 염문강의 말에 수긍하며 흥분한 마음을 삭였다.

“네……. 취리건개와 옥룡장인을 보냈습니다.”

“안심이 안 돼, 백결신영도 합류하라고 해.”

“네, 방주님.”

염문강이 공손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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