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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9화 (19/230)

19화

【경국지색? 경파지색!!】

장자방은 자신의 방에 반듯하게 누웠다.

황토색의 네모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판판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최면에 걸린 것처럼,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했지만, 현실은 참혹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속곳만 입은 온몸과 얼굴, 두피까지 초록색 즙이 뒤덮여 있었다.

새삼 오늘 하루 자신의 몸에게 미안했다.

악취 나는 똥물을 뒤집어쓰고 칼날같이 매서운 폭포수를 맞고, 시커멓고 걸쭉한 액체를 바르고… 이번엔 초록색 즙이었다.

어린 위량이 비름 찧은 것을 몸 구석구석 꼼꼼하게 발라주고 간 것이었다.

위량의 말대로 찝찝하게 생긴 액체는 똥 냄새는 없애주었지만 붉은 어루러기가 일어났다.

그게 똥독인지 그 액체의 부작용인지는 모르지만, 참을 수 없이 가렵고 따가웠다.

비름을 바르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가려움이 가라앉아 살 것 같았다.

위량의 말이 맞는다면 사나흘 비름을 바르면 어루러기가 온전히 가라앉을 것이다.

“하…….”

장자방은 그제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거지이지만, 개방도였고 잘생긴 얼굴 믿고 꽤나 도도하게 살았는데….’

길바닥 거지로 살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과 모멸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총타의 개방도들은 똥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예사로 생각한다는 정도?

망신도 망신이지만,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위량도 말했다. 걸화를 만나거든 무조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고. 아니면, 분타로 내려가는 걸 고민해 보라고.

대체 배걸화라는 아이는 어찌 생겨 먹었기에 모두가 한결같이 그리 말하는 것인지…….

하긴 지금 이 꼴을 보면 이해가 되긴 했다.

평생을 거지로 산 것보다, 오늘 하루가 정신이 더 피폐해졌으니…….

똥물을 뒤집어쓴 몸뚱이로 산을 타고 반 시진이나 시리고 무거운 폭포수를 맞고, 또 한 시진을 씻은 몸은 노곤하고 묵직했다.

정신적인 피로는 그보다 더했다.

정말 분타로 도망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넝마가 된 마음과 육체에 휴식이 절실했다. 맑은 정신이 필요했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비름을 발라서 두툼한 이불 위에 눕지는 않았지만 아늑한 자신만의 방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달콤한 잠이 쏟아져….

깽깽깽깨깨깽깽깽깽―

익숙한 소리에 장자방은 눈을 번쩍 떴다.

얼굴이 확 구겨졌다.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옷을 입었는지 말았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낯익은 인영이 혀를 내밀고는 달아났다.

정말 확 돌아버릴 것 같았다.

방주의 여식이고 뭐고 잡아다가 되는대로 쥐어패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다.

이성을 놓고 걸화를 쫓아가던 장자방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장자방을 보며 쿡쿡거리는 개방도들이 보였다.

장자방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속곳만 걸치고, 초록색 몸뚱이로 뛰어다니는 자신의 몰골은 스스로가 봐도 미친놈 같았다.

숨을 곳도 몸을 가릴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에휴….”

몸을 축 늘어트리고 맨발로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왔다.

* * *

장자방은 나흘 동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고 뒷간도 가지 못했다.

뒷간을 갈까 봐 무서워서 먹지도 못했으니 그의 몰골은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얼굴을 보고 얘기라도 하면 어찌 달래보기라도 하겠건만, 사고를 치고는 잽싸게 도망을 가니 뭘 어찌해 볼 수도 없었다.

미꾸라지처럼 잡히지 않으니 쥐어팰 수도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걸화의 은잠술이 놀랍도록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장자방도 무공을 익혔으니 사람의 기척을 느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걸화의 기척은 코앞에 나타나기까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양쪽 볼이 쏙 들어간 얼굴에 쩍쩍 갈라진 입술을 한 장자방이 영감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걸화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낮에라도 잠깐 눈을 붙이려고 방에 들어가면 기가 막히게 알아내고 달려와 문 앞에서 요란법석을 떨어대는 걸화였으니깐.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걸화는 아니었다, 걸화의 기척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장자방은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위량을 보고 기운 없이 미소를 보냈다.

“규지검인님, 왜 이러고 계십니까? 아… 비름나물을 찧어왔습니다. 오늘 하루만 더 바르면 될 듯싶습니다.”

위량이 쪽박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위량… 정말 고맙다…….”

장자방이 힘없이 말했다.

“어찌 그리 힘이 없으십니까? 그 일은 괘념치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본타의 절반은 아가씨에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 다들 이해합니다.”

위량이 장자방을 위로했다.

“그래… 그리도 많은 이들이 걸화에게 당하고도 지켜만 보다니 다들 대단하구먼….”

장자방이 기운 없이 말했다.

“지금 방주님이 저희의 은인이시니까요, 얼굴이 너무 좋지 못합니다. 혹시 다른 불편한 점이 있으신 건 아닌지요?”

위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흠…….”

장자방은 부끄럽지만, 누구에게라도 말을 하고 싶었다.

걸윤은 그날 총타를 떠나서 어디로 갔는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밤마다 일어나는 일을 위량에게 말했다.

“음… 아가씨는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텐데 어찌 그러지?”

위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무공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해서 화가 난 모양이야.”

이제서야 새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장자방이었다.

“…그럼 열심히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될 듯싶습니다만…….”

“걸화를 봐야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아! 위량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송장 같은 장자방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뭔가 방법이 생각나신 모양입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위량이 쪽박을 내려놓고 반듯하게 인사를 한 후 전각을 나갔다.

장자방은 전각 한가운데 서서 허공을 보고 외쳤다.

“걸화야! 거기 있는 것 다 알아. 그동안 무공을 소홀히 가르친 건 내가 사과하지, 진심으로 사과할게. 앞으로는 열심히 가르쳐줄게. 외공 뿐만이 아니라 내공도 가르쳐주지. 내가 약속해, 혹시 내가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다시 이런 짓을 해도 원망하지 않을게.”

말을 끝낸 장자방은 주위를 살폈다.

낮은 전각 담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걸화의 머리와 팔이 담 위로 올라왔다.

곧이어 다리를 올리더니 전각 안쪽으로 양쪽 다리를 걸치고 버둥거렸다.

그리고 전각 안으로 뛰어내렸다기보다는 거의 굴러떨어졌다.

‘휴… 저런 애한테 이렇게 애를 먹고 있다니….’

장자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요?”

바닥에서 일어난 걸화가 씩 웃으며 물었다.

장자방은 걸화의 웃음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

“하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부님!”

걸화가 포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좋아, 내일부터 수련을 하자꾸나. 하지만 그 전에 네 몸가짐부터 바로 해야겠다.”

“제 몸가짐이 어때서요?”

“눈앞이 보이기는 하느냐? 좀 씻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도 뒤로 넘겨서 앞을 가리지 않도록 해라.”

“나는 개방도에요. 개방은 거지고 나는 거지답게 있는 거라구요.”

걸화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개방은 거지였다. 구걸해서 먹고사는 거지, 하지만 지금의 개방은 거지의 모양새를 하는 것이야. 주변에 이질감 없이 섞여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정보를 모으기 위한 것이지 무조건 더럽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야!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음이 수련에 방해가 된다면, 더더욱 지양해야 하지 않겠느냐?”

장자방이 묵직하게 말했다.

“네…….”

“그럼 몸가짐을 바로 해서 내일 아침에 연무장으로 나오도록 하여라.”

“네…….”

걸화가 뭔가 찝찝한 얼굴로, 대답하고 전각을 걸어 나갔다.

그날 밤, 장자방은 아주 오랜만에 깊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 *

경국지색.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라는 뜻으로,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을 이르는 말이다.

개방의 방주, 천상이 반한 여인.

그녀에게는 경파지색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한 문파를 기울어지게 할 만큼의 미인이라는 의미였다.

거지 문파인 개방의 방주가 거지의 행색을 거부했다.

부유한 문파의 문주처럼 비단옷을 차려입은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을 하였다.

평생을 거지로 살아온 장로들은 방주가 여자에 미쳐 개방을 버렸다고 날뛰었다.

천상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개방의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개방은 거대한 방파였다.

십만 개방도라 하지 않던가.

세상 모든 거지들이 개방도는 아니지만, 매듭이 없는 거지도 개방도인 듯 아닌 듯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뭉뚱그려서 십만쯤 된다고 추산한 것이다.

그 많은 거지들의 최대 수입원은 구걸이었기에 구걸로 각자 알아서 먹고살았다.

거기에 정보를 취급하는 소식통으로 약간의 자금을 굴리는 게 고작이었다.

천상은 개방도와 일반 거지를 명백하게 구분해 버렸다.

그렇다고 일반 거지들이 개방에서 벗어나 자신들끼리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방의 그늘 아래에서 구걸을 하고, 개방에서 돈푼이나 받으며 심부름을 하곤 했다.

장로들은 미친 방주가 개방의 세를 줄였다고 그를 쫓아내기 위해 새로운 방주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천상은 장로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총타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개방의 분타들 인근에 점포를 열었다.

종종 개방으로 정보를 알아내려 돈을 싸 들고 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체계 없이 분타주 선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였다.

그것을 점포를 직접 만들어서 대놓고 팔았고, 필요하면 사기도 하고 정보 배달도 했다.

초반에는 고급정보가 부족했기에 사람을 찾아주거나 시시한 정보 따위를 팔았지만, 지금에서는 그 정보의 중요도와 양 자체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변해 있었다.

물론 그 모든 일은 점포 뒤에 있는 개방의 거지들이 하는 일이었다.

천상이 어찌나 성질이 급하고 추진력이 있는지, 손쓸 사이도 없이 변하고 있었다.

장로들은 손을 놓고 한탄을 해댔다.

개방이 여자에 미친 방주로 인해 망했다고.

그때 생긴 걸화 어미의 별호가 바로 경파지색이었다.

개방을 기울어지게 할 만한 미인.

개방이라는 한 방파를 몰락시킬 여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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