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스승이라도 예외는 없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걸화의 흉측한 몰골에 장자방도, 걸윤도 움찔했다.
걸화의 더럽고 매서운 눈빛에 방안에는 조용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으흠!!”
목을 가다듬은 걸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걸화 네가 왜 여기 있는 게야? 오늘 신시까지 연무장 백 바퀴를 돌아야 하는 것 아니냐?”
평소의 걸윤이었으면 걸화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야!’, ‘너!’ 하면서 막 쏘아붙였을 테지만, 장자방을 의식해서 침착한 목소리로 제법 오라비답게 말했다.
걸화가 자신의 분위기를 파악해서 눈치껏 행동해주기를 바라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걸화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하는 두려움을 누르고 있었다.
걸윤에게 장자방과의 대화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동안 부족했던 검술의 견식을 넓힐 기회이기도 했고 뛰어난 검법을 가진 자와 비무를 하는 것이 자신의 장법을 연마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걸화는 오라비의 무공 발전이나 비무보다 아니,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성질을 건드린 놈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씨… 나 보고는 만날 연무장만 돌라고 그러고, 내가 이 고생인데 술이 넘어가?”
걸화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눈에 띄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걸윤은 그 모양이 개방 방주인 아버지가 대단히 화가 났을 때의 모습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거 말려야 된다.’
이런 생각이 걸윤의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걸화가 신을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와 조촐하게 차린 술상을 냅다 걷어 차버렸다.
작은 상이 뒤집히고 술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술이 담겨있던 호리병이 바닥에 드러누워 꼴꼴꼴, 술을 뱉어냈다.
안주로 먹던 주전부리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아무래도 걸화가 곱게 넘어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내가 은원은 확실한 사람이지.”
걸화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형님…….”
걸윤이 불안한 목소리로 장자방을 불렀다.
“…….”
장자방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거지라지만 체계가 확실한 개방이었다.
비록,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걸화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가 스승의 술상을 발로 걷어차 버리다니…….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기 전에 이 기막힌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도망쳐요!”
걸윤이 불안한 눈을 걸화에게서 떼지 않고 말했다.
“……?”
뭘 하라고?
장자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잠시 생각하다 자신이 걸윤의 말을 오해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 내가 과하게 벌을 줄까 봐, 걸화에게 도망을 가라고 한 것이구나. 오누이 간의 도타운 정은 칭찬받을 만한 것이나, 걸화의 행동은 혼이 날 만한 일이지.’
처음이긴 하지만 제자를 꾸짖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안색을 묵직하게 바꾸는 장자방이었다.
“얼른!!”
걸윤이 장자방의 생각을 깨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걸화를 피해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걸화가 방 입구를 막아서더니 씨익 웃었다.
걸윤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눈에 두둑한 걸화의 주머니가 들어왔다.
꼬질꼬질한 걸화의 손이 주머니로 향하는 것이 보이자, 걸윤의 마음이 급했다.
걸화는 익숙하게 주머니 속 돌멩이를 집어 들어, 걸윤의 방 안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장자방도 걸윤을 따라 일어났다.
걸화가 던진 짱돌을 손으로 받아내며, 크게 화를 내려다 순간 흠칫했다.
‘혹시 걸화가 방주께 이르기라도 하면…….’
가르치라는 무공은 안 가르치고 술을 마시다가 방주의 금지옥엽(?)을 혼을 내어서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도저히 현실이라 믿기 힘든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자방이 생각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짱돌이 날아왔다.
돌은 피하고 받아냈지만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형님! 빨리 도망쳐요, 어서요!!”
어느새 방 밖으로 빠져나간 걸윤이 걸화의 뒤쪽에서 장자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장자방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잽싸게 걸화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걸윤은 멀리 가지 않고 장자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걸윤이 소리를 지르며 경공술을 펼쳐 앞으로 나아갔다.
장자방도 걸윤을 따라 다리에 내공을 실었다.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걸화가 씩씩거리며 돌을 던져댔지만,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았다.
걸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한참을 앞서가던 걸윤이 숲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자방도 걸윤의 옆자리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은 물론이고, 머릿속도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형님께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걸윤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왜 도망을 온 것인가? 자네나 나의 무공이 걸화에게 못 미치는 것도 아니고 겨우 돌멩이를 던지는 것인데.”
얼떨결에 걸윤을 따라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굳이 걸화에게서 도망을 쳐야 했는지 의문이 드는 장자방이었다.
“형님…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힘으로 어찌 해보려 하다가는 개싸움에 휘말릴 뿐입니다.”
걸윤이 진지하게 말했다.
걸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해대니 대꾸하기도 우스운 장자방이었다.
“하긴… 방주님께 이 사실을 말한다면 자네나 나나 면목이 없긴 하지…….”
정신이 돌아오자, 어찌 온 기회인데 이것을 놓치게 될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걸화가 방주께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다시 분타로 내려가야 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방주님께 말해서 방주님이 벌을 주시면 낫습니다. 이건 뭐… 형님! 걸화는… 걸화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건드려버린 것 같습니다…….”
걸윤이 착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걸화를 ‘것’이라고 칭하면서.
“걸부 형님도 안 계신 상황에 자방 형님이 총타에 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만… 웬만하면… 방주님께 말씀드려서 다시 분타로 내려가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걸윤의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장자방의 검술을 견식 하겠다는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으니 말이다.
걸윤에게 무공 스승이 있고, 총타에도 무공이 뛰어난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유명한 장자방의 검술을 꼭 한번 보고 싶었기에, 말을 하면서도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걸윤이었다.
장자방 또한 마음이 무거웠다.
방주 여식의 스승이다. 다시 없을 기회였다.
쫓아내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야 하건만, 내 발로 분타로 가라니…….
장자방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저는 당분간 총타를 떠나있겠습니다, 형님도 그게 좋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법을 보여달라며 술까지 받아와, 싹싹하게 굴던 걸윤이 다 포기하고 떠난다고 한다.
갑자기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혼란스러운 장자방이었다.
“허…허…….”
머리가 복잡해졌다.
장자방의 심정을 눈치챈 걸윤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혹시 계속 총타에 계시기로 하셨다면 걸화가 원하는 대로 해주십시오.”
“…그리하겠네.”
걸윤의 과하게 진지한 표정에 더 묻기도 뭣해 간단하게 긍정을 표했다.
“…오라비로서 누이동생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걸윤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장자방이 적당히 걸윤을 위로했다.
* * *
장자방은 자리에 누웠다.
몹시 피곤했다, 총타에 와서 몸이 힘들었던 날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수련을 하지도 않았고 걸화에게 제대로 뭘 가르치지도 않았으니… 너무 안일했다.
걸화가 화를 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장자방은 분타로 다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총타에 붙어 있어야 입신을 하기 편했다.
하다못해 매듭 하나를 더 얻기도 수월했다.
내일은 걸화에게 몸을 푸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 더러운 얼굴은 마주하는 게 영 거북한데….’
걸화에게 쫓겨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며 잠이 쏟아졌다.
거적이나 깔고 여럿이 뒹굴며 자던 장자방이었다.
아담하지만 혼자만의 전각은 아늑했고, 두툼한 이불은 폭신했다.
거지로서 과분한 호사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총타의 이 전각에서 버티겠다고 생각하는 장자방이었다.
포근하게 잠 속으로 빠지려는 찰나…….
깽깽개개개개갱~ 깽깽깽깽~
뭔가 요란한 소리가 전각 앞에서 울렸다.
‘어느 전각에서 불이라도 난 건가?’
장자방이 깜짝 놀라서 전각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이 열리자 뭔가가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자방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각 끝 쪽에 걸화가 양철 세숫대야와 나무 작대기를 들고는 장자방을 향해 혀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서 달려가 버렸다.
장자방은 어이가 없었다.
걸화가 좀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걸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피식 웃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달아난 모양인지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 아니, 들려는 찰나…….
깽깽깽~ 챙채채채챙~
장자방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걸화가 후다닥 뛰어 도망갔다.
걸화는 반 시진(1시간) 간격으로 장자방의 방문 앞에서 세숫대야를 쳐댔다.
장자방은 한숨도 못 자고 하룻밤을 꼴딱 샜다.
평생을 거지로 살았는데 하룻밤 정도 샌 적이야 없겠느냐마는 이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이 곧 쏟아지는데 깨고, 또 잠이 드는데 깨는 걸 반복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람을 더 괴롭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효…….”
장자방은 퀭한 눈으로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앉아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문을 닫고 있으면 걸화가 또 그 짓을 해대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깨어 있어도 시끄럽고 사람을 괴롭히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어…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장자방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분타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살짝 고민을 해보는 장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