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다음 날 아침.
장자방은 어제 자신을 안내해 준 자를 따라 별채로 향했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어깨가 들썩거리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캬~’
화려한 색채의 별채를 보니, 저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네 번째 손가락을 세워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방주의 여식과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콸콸 치솟았다.
안내를 해준 자는 대충 만들어놓은 연무장에 장자방을 두고, 서둘러 별채를 벗어났다.
장자방은 휘파람을 불며, 막 흙을 다져놓은 연무장을 어슬렁거렸다.
꼴사납게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분 좋은 미래를 꿈꾸었다.
장자방의 마음속, 흐드러진 새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난분분히 흩날리는 작은 조각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소저, 검을 잡는 자세가 잘못되었소.’
단정한 무복 차림의 장자방이 검을 든 여인을 뒤에서 끌어안아, 함께 검을 잡으며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아이… 참…….’
수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을 입은 여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리여리한 여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무얼 그리 부끄러워하시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장자방이 수줍어하는 여인을 끌어다 자신의 품에 살포시 안았다.
여인이 붉어진 얼굴을 장자방의 가슴에 묻었다.
망상을 하는 장자방은 얼뜬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입을 벌리고 헤실대던 장자방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저 거지는 뭐지?’
장자방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무장은 물론이고 별채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사람이라고는 장자방을 빼고는 멀리 있는 쪼끄만 거지 아이뿐이었다.
방주의 여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장자방은 의아한 눈으로 꼬질꼬질한 거지에게 다가갔다.
장자방을 본 거지 아이가 제법 그럴듯한 자세를 잡고 포권지례를 했다
“제자 배걸화, 사부님을 뵙습니다.”
‘배걸화?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배걸화? 배걸화? 배걸화!!’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자방이 화들짝 놀랐다.
배! 걸! 화! 그 세 글자가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방주의 막내이자, 고명딸인 배걸화가 저런 몰골이라니!?
저게 여인이었어? 거기다 방주의 여식이라고?
장자방은 기가 차서, 작고 더러운 거지를 내려다 볼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지도 정도가 있다, 특히 개방의 거지들은 일반 거지와 때깔이 달랐다.
비록 넝마를 걸치고 거지 행세를 하지만 눈빛과 자세, 기도… 암튼 모든 면에서 길거리를 구르는 막거지와는 달랐다.
저리 비참하고 형편없는 상거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 있는 거지는 비럭질도 못 해 먹고 산, 상 비렁뱅이 꼴이었다.
‘와… 저것도 능력이다. 진짜 저게 방주의 여식이라고?구방일파의 하나인 개방 수장의 딸이라고? 진짜? 저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눈앞의 거지 모습은 그대로였다.
지금의 개방은 방주도 그렇고 본타에만 있는 개방도는 거의 거지 행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주의 여식이 저런 상 거렁뱅이 꼴을 하고 있다고?
하… 막힌 말문이 쉬이 터지지 않았다.
앞에 있는 쬐끄만 거지가 씩 웃었다.
눈이 부시다.
어찌나 까만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지, 닦지 않은 누런 치아가 눈부셔 보일 정도였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감정이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장자방의 어깨춤도 콧노래도 쏙 들어가 버렸다.
“반갑네.”
장자방이 마지못해 포권하며 인사를 했지만, 걸화를 내려다보는 그의 속은 갑갑했다.
‘하아….’
장자방은 평생 거지로 살았다.
수많은 거지들과 뒹굴며 함께 밥 먹고 잠자고, 생활을 해도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서 가까이 가는 건 고사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거지를 만난 건…….
장자방의 마음을 모르는 걸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사부님! 오늘은 제자에게 어떤 무공을 알려 주실는지요?”
걸화의 새까만 얼굴에 박힌 눈이 반짝거렸다.
“하하… 의욕이 넘치는군, 좋은 일이야. 음… 그럼 일단 연무장부터 좀 돌아볼까? 연무장이 아담한 것이 좀 많이 돌아야겠군, 자! 시작.”
장자방이 별채에 걸화 전용으로 만든 연무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걸화가 씩씩하게 답하고, 힘차게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 * *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더 뛰어”
장자방이 연무장 한편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걸화를 격려했다.
걸화의 얼굴엔 땀이 줄줄 흘러내려 진득하게 검은 길을 만들어냈다.
쳐다보고 있으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도저히 가까이서 뭘 가르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걸화는 연무장을 도는 것에도 열심이었다.
“하아암…….”
장자방은 연무장 흙바닥에 드러누운 채, 길게 하품을 했다.
걸화의 스승이 된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내일은 술이라도 좀 구해볼까?’
비록 방주의 사위가 되겠다는 꿈은 잽싸게 접었지만, 무려 방주 여식의 스승이었다.
그것도 대충 뛰라고 시키면 그만이고, 밤마다 뜨끈한 전각에서 잠을 자고, 무엇보다 그 빌어먹을 분타주 밑에서 안 굴러도 되었다.
‘응?’
누군가 걸어오는 기척에 장자방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지난 보름간 지내본 바에 의하면 내당에 일하는 여자 개방도 두 명을 제외하고는 별채 주변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
여자 개방도들도 연무장 쪽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했다.
보름 만에 찾는 이가 누구인가?
방주는 아닌 것 같았지만, 방주의 딸이니 잘 가르치고 있는지 누군가는 확인해 볼만도 했다.
걸어오는 이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장자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젊은 사내였다, 적당히 균형 잡힌 몸에 호감 가는 얼굴.
좀 더 솔직히 평하자면… 꽤나 괜찮은 인물이었다.
장자방은 사내를 보면 몸과 얼굴을 먼저 살폈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장자방은 거지로 살기 아깝도록 좋은 인물이었다.
골격이 짜 놓은 것처럼 딱 잡힌 몸에 깎아놓은 것 같은 조각 미남자라고나 할까?
장자방이 네 번째 손가락으로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올렸다.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걸화가 먼저 쪼르르 달려갔다.
“헉…헉… 야! 헉… 네가 여기 왜 와? 헉…헉…헉.”
걸화가 숨을 꺽꺽 내쉬며 걸윤에게 삐딱하게 말했다.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그리고 너 얼굴 좀 씻어라, 어우… 진짜 드러워서 못 봐주겠네.”
걸윤이 걸화를 보고 얼굴을 구겼다.
“헉…헉… 거지가 뭘 씻어… 헉…….”
걸화는 힘이 들어 헉헉 대면서도 지지 않았다.
“거지도 땀나면 냇가 가서 씻는다. 여기 많은 거지들을 봐라, 너 같은 사람이 있는가?”
걸윤이 구긴 얼굴을 펴지 않고 말했다.
“그… 헉… 거지 같지도 않은 놈들… 헤…헥… 아고, 죽것다……. 내가 진정한 거지가 뭔지 보여주는 거야… 헉…….”
걸화의 말에 걸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장자방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배걸윤이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규지검인의 별호는 익히 들었습니다. 규지검인께서 총타에 오시었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걸윤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반갑네, 자네가 강룡십팔장의 귀재라는 그 배걸윤 소협이구먼.”
장자방이 반갑게 인사했다.
배걸윤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주의 둘째 아들인데, 어린 나이에도 장법과 권법에 소질이 특출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그가 구사하는 강룡십팔장은 강하고, 유려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어찌 걸화를 가르치는 것은 할 만하십니까?”
걸윤이 자신에 대한 칭찬에 쑥스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아직은 그저 체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네.”
장자방이 검은 땀방울을 쏟아내며 연무장을 뛰는 걸화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요, 무공에는 그 기초인 체력이 가장 중요하지요. 앞으로도 걸화의 체력을 키우는 데 힘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걸윤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걸화는 연무장을 달리며 그늘에서 쑥덕거리는 장자방과 배걸윤을 노려보았다.
‘이씨…….’
* * *
며칠 뒤.
“자방 형님! 한잔 받으십시오.”
걸윤이 기분 좋게 술병을 들어 장자방의 잔에 따랐다.
“계속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명색이 방주님 여식의 스승인데…….”
장자방이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정말 방주님께서 걸화에게 무공을 가르치라고 형님을 부른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워낙 왈가닥에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니 다른 신경 팔 곳을 만들려고 그러는 겁니다. 걸화는 신경 쓰지 마시고, 종종 저와 이렇게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비무도 하십시다.”
“허허허허, 나야 좋지. 아우 같은 사람과 이리 앉아 잔을 기울이니 세상 더없이 좋구먼.”
장자방이 유쾌하게 웃었다.
“대부분 개방도들이 그러하듯이 저도 검술은 약한 편입니다. 형님께 한 수 배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걸윤이 싹싹하게 말했다.
개방에 검법의 실력자는 드물었다.
장자방이 총타에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걸윤이 아니었다.
방주의 심부름으로 분타에 내려갔던 걸윤은 장자방의 소식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총타로 온 것이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장자방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검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기회에 수준 높은 검술을 견식할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걸윤의 무공이 또래에 비해 출중한 것은 사실이었다.
모르는 이들은 그가 아비의 영향으로 무공에 대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도 거짓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걸윤은 어릴 때부터 무공에 대한 애정이 컸다.
장법과 권법이 유려한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힘든 일이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이 기본이 되어야 했다.
걸윤이 그것을 해내고 있었기에 강룡십팔장의 귀재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걸윤이 이 기회에 검법까지 제대로 알아보려 하고 있었다.
“그럼, 그럼. 나도 아우 덕분에 장법의…….”
벌컥―
걸윤의 방문이 갑자기 훨쩍 열어 젖혀졌다.
문 앞에는 시커먼 국물이 뚝뚝 흐르는 걸화가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