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드디어 스승이 오셨다】
걸화의 표정 없는 얼굴은 천상을 향해 있었다.
천상은 탁자가 날아갈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정말 하지 않으려던 말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하지 않으려던 것인데 지금 걸화의 상황이 그 최후인 듯싶었다.
여식이 굶어 죽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천상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리고… 조금 더 성장하면 무림행을 보내주마.”
걸화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확장되었다.
비쩍 곯아빠진 얼굴에 눈만 뎅그러니 커진 몰골은 목내이 그 자체였다.
“정말이죠!!”
다 죽어가던 걸화가 버럭, 큰소리를 냈다.
“흠… 그, 그래.”
천상이 마지못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딴소리하기 없어요! 아니! 문서… 문서를 써줘요!”
걸화가 허둥대며 종이를 찾아 천상 앞에 놓았다.
그리고 급하게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으흠! 아비가 어디 한 입으로 두말하겠느냐? 뭘 문서까지 쓴단 말이냐…….”
천상이 먹을 갈고 있는 걸화를 말렸다.
“안 돼요! 꼭 써야 돼요, 얼른요.”
천상의 만류에도 걸화는 서둘러 먹을 갈았다.
그리고 붓을 먹물에 적셔 천상에게 내밀었다.
“흐흠…….”
붓을 받아든 천상이 길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무공을 가르쳐주고 삼 년 뒤에 무림으로 나가게 해주겠다고 써주세요.”
걸화가 천상을 재촉했다.
번들번들한 그녀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무림행이었다.
드디어 개방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평생 꿈꿔왔던 무림행이지만, 절대 허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 고대하던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삼 년은 왜?”
천상이 붓을 들고 뭉그적대며 물었다.
그는 걸화를 무림에 보낼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찌 키운 여식을 그 험한 곳으로 보낸단 말인가.
걸화는 철도 없고 제멋대로인 데다 작은 일도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무림에 나가 칼 맞기 딱 좋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 아니, 저지를지… 암튼 위험했다.
“최소한 유모 삼년상은 치러야죠.”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걸화의 눈은 다시 붉게 물들어갔다.
“…삼 년은 너무 어리다, 십 년 뒤로 하자꾸나.”
지금은 물릴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행이라는 말에 저리 정신을 차리니 말이다.
저것이 정신을 차린 것인지, 다른 방향으로 정신이 나간 것인지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그러면 최대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뭉그적대다 시집을 보내던,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십 년이면 내 나이가 얼만데! 사 년!”
광기 어린 눈이 번들거렸다.
“으음… 팔 년!”
천상도 지지 않고 말했다.
“오 년! 더 이상은 절대 양보 못 해요!”
걸화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끄응…….”
“…….”
걸화는 입을 굳게 다물고 천상의 답을 기다렸다.
“그럼 곡기를 들겠느냐?”
“무공을 배우려면 당연하죠.”
천상은 붓을 들고 숨만 크게 내쉬었다 들이쉴 뿐 차마 뭐라고 쓰지 못했다.
커진 천상의 콧구멍으로 들숨과 날숨이 들어갔다 나왔다.
붓을 든 천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붓을 부러트릴 듯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걸화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천상은 걸화와 새하얀 종이를 번갈아 볼 뿐 쉽게 붓을 움직이지 못했다.
걸화가 천상의 방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거의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크하하하, 크크크하하하하.”
어둑하니 해가 질 무렵이었다.
새하얀 상복을 입은 여인이 하얀 종이를 들고 몸을 뒤로 젖혔다, 앞으로 구부렸다 하며 웃어 재꼈다.
지나가다 걸화를 본 거지들은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대로 돌았구나.
* * *
나, 장자방은 규지검인이라 불렸다.
별호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이 아닐까?
아니면… 뛰어나다는 의미?
어쨌거나 저쨌거나 잘 났다는 말이지.
중원 무림까지 알려지진 못했지만, 최소한 천진 일대에서는 규지검인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거의…….
그만큼 유명하다는 의미이고 또 대단하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개방에서는 잘 쓰지 않는 검법을 익혔다.
다른 문파와 다르게 개방에서 검법을 연마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다.
개방에는 내려오는 검법도 적고, 그걸 익힌 자도 거의 없었기에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절대 운이 좋아 우리 스승님을 만난 덕이 아니었다.
내가 그 꼬장꼬장한 영감 비위를 얼마나 맞춰가며 배운 검법인데.
그게 다~ 나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것이지, 암.
왜 그리 힘들게 검법을 고수했냐고?
그야, 있어 보이니깐.
풀어헤친 곱슬머리에 나달나달한 무복을 입고 검 한 자루 차고 다니면, 그게 또 그것만의 멋이 있었다.
안 그래도 거지인데 싸우는 것까지 맨손에 몽둥이질까지 해야 한다고?
쯧쯧… 없어 보여.
백날 주먹이고 손바닥이고 단련해봐야 제까짓 게 손이지.
검이건 도건 하나 있어 줘야 그게 무인이지.
개방은 그냥 거지가 아니다.
방!랑! 무인이지.
총타로 오는 내내 떨리던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개방주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구질구질한 거지 생활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거지로 먹고살기에는 인물이 아깝긴 하지.
거지답지 않게 잘생긴 얼굴 덕분에 뭇 여인네들의 유혹이 많았다.
발바닥 까지게 뛰어다닐 때는 나 좋다고 목매다는 과부 누님 집에 들어가 살아 버릴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그 누님이 그리도 알부자라지…….
그 엄청난 유혹을 뿌리치고 버틴 결과에 대한 보답이 이리 오는구나.
내가 절~대 그 누님 떡대에 기가 눌려 그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 아니다.
내 속에 흐르는 이 방랑자의 바람을 잠재우기 힘들었다고나 할까?
장자방은 움막이 아닌, 단출하지만 깔끔한 방주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그 유명한 개방주 배천상의 집무실이었다.
모든 거지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해 마지않는 그 방주를 직접 알현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개방을 세웠다는 초대 방주, 개방지존 이후 가장 훌륭하다 칭송받는 방주가 아니던가.
작은 인기척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풍채 좋은 사내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장자방은 그가 개방주, 배천상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언젠가 만났던 방주의 장자, 배걸부와 꼭 닮은 골격과 눈매와 콧대, 찍어낸 듯한 그 얼굴을 보고 모를 수가 없었다.
장자방의 심장이 주책맞게 두근거렸다.
정중히 포권지례를 했다.
“오결제자 장자방이 방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왔는가? 그래 앉지.”
천상이 장자방에게 자리를 권하며 먼저 의자에 앉았다.
“자네들은 나가보게.”
천상이 자신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에게 말했다.
천상의 말에 그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는 방주 천상과 장자방 둘만 남게 되었다.
‘방주와 무려 독대라니…….’
장자방은 다시 한번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러내려야 했다.
“먼길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는가?”
천상이 온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장자방이 빠짝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천상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자네가 총타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잘 모릅니다.”
총타로 오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다.
“음… 내 딸자식이 하나 있네, 그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일세.”
천상의 말에 장자방은 입에 힘을 꽉 주었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부르짖을 뻔했다.
출세도 이런 고속 출세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더니,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기쁨을 참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방주 직계의 스승이 된다니… 장자방 인생도 이제 폈구나.
꽉 깨문 입술이 씰룩거렸다.
“힘들게 생각할 것은 없네.”
천상은 장자방의 표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혀 힘들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자방은 넘어오는 말을 삼키며 들썩이는 몸을 꾹 눌렀다.
“무공을 가르친다고는 하나 가르칠 필요도 없어, 필요하다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기본 초식 정도는 가르쳐도 되고, 안 가르쳐도 그만이고… 그저 몸 건강하게 운동시킨다 생각하고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않게 딱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만 해주면 되네.”
“네, 잘 알겠습니다.”
장자방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부탁하네.”
천상이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허억… 방주께서 무려 부탁이라니…….’
“성심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어허… 성심을 다해 가르치지 말라니깐, 적당히 적당히…….”
“네, 알겠습니다.”
장자방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천상의 부름에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걸화의 스승이시다, 전각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네.”
집무실로 들어온 이가 고개 숙이고 답했다.
천상이 장자방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너무 서두를 것 없네, 멀리서 온다고 곤하였을 것이니 며칠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시작해도 되네.”
“방주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훌륭한 분이다, 말로만 들었지 이리 인자하고 배려심 깊고 따뜻한 분일 줄이야.
장자방은 방주 천상에 대한 존경심이 치솟았다.
“그래, 나가보게.”
천상이 너그럽게 말했다.
장자방은 진심으로 경애의 뜻을 담아 인사하고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장자방은 자신이 홀로 배정받은 작은 전각으로 들어서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천상 덕분에 개방의 형편이 전과 비교할 수 없게 좋아지긴 했다.
그래도 분타 거지들은 움막에서 떼를 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잤다.
그런데 무려 전각을! 그것도 혼자서! 사용하게 되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볼을 사정없이 꼬집어 대던 장자방은 전각 기둥 하나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꺼끌꺼끌한 나뭇결이 뺨을 긁어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것이 성공의 맛이구나.
장자방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하… 이번 기회에 방주의 여식을 꼬셔서 아예 방주의 사위가 되어버릴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흐뭇하게 미소가 흘렀다.
어딜 가도 인물 하나는 자신 있는 장자방이, 혼자서 김칫국을 국솥째로 들이 마셔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