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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3화 (13/230)

13화

【유모도 자기 인생 살아야지!】

천상이 걸화를 머리에서 아래로, 발끝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 걸화는 몸을 움츠렸다.

“이 녀석! 꼴이 그게 무어냐!!”

천상의 눈에, 아니 그곳에 있는 모든 이의 눈에 걸화는 그냥 딱 거지였다.

지저분한 거적때기를 걸치고 머리는 산발을 해서 꼬질꼬질한 게, 그게 거지지 뭐겠는가?

피는 못 속인다고 어쩜 저렇게 어울릴까.

걸화가 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연무장 거지들 틈에 섞여 있었다면 천상도 걸화를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내 꼴이 뭐요……. 개방도가 거지꼴을 하는 게 뭐가 어때서…….”

걸화가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천상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걸화였다.

“후…….”

천상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전혀 마음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천상 주변의 수하들이 긴장했다.

저 모습은 천상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

걸화도 아무 말 없이 천상의 눈치를 살폈다.

“유모는 어디 계시는 게냐?”

천상이 유모를 찾았다.

“몰라요…….”

걸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모른다니?”

천상의 표정이 바뀌었다.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기에 그 모습에 마음을 놓는 걸화였다.

“유모가 아무래도 요즘 좀 이상해요.”

걸화가 대단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입을 열었다.

“……?”

천상이 의아한 눈빛으로 딸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연애를 하나? 나 빼고 어디 꽃놀이라도 갔나…? 설마! 노름 같은 거에 빠진 건 아니겠죠?”

걸화가 나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뭐… 뭐……?”

천상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섰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내가 좀 쉬라고 그랬거든요. 유모도 유모 인생 살아야죠, 언제까지 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걸화는 천상의 이마에 불룩 솟은 혈관을 보고 그가 대단히 노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유모가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유모를 변호하고 있었다.

“그, 그래서 지금 유모가 어디 계신다는 게냐? 얼른 가서 유모를 모시고 오너라!”

천상이 옆에 있는 수하에게 명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에이… 없어, 어젯밤에도 안 들어왔어요.”

걸화가 유모를 찾으러 나서려는 거지를 말렸다.

“뭐?”

천상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젯밤에 안 들어왔다니깐요.”

천상의 마음도 모른 채, 걸화는 태평하기만 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유모가 자기 볼일 본다고 며칠 안 들어오는 게 뭔 대수랴.

걸화의 눈에 유모는 어른이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되어 그랬지만, 천상에게 유모는 아이들밖에 모르는 약하고 여린 여인이었다.

게다가 유모는 친인척이라고는 없었다.

딱히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고, 유모 성격상 걸화를 두고 말없이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천상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감이 점점 더 명료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뭐라? 정확히 언제부터냐?”

천상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물었다.

“안 들어온 지 좀 됐어요. 와~ 나 뒷간 갈 때도 쫓아와서 기다리더니, 며칠이나 집에 안 들어오는 거 보면… 후훗… 뭔가 재밌는 걸 하긴 하는 모양이야.”

걸화가 배시시 웃었다.

이게 얼마나 잘된 일인가?

유모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을 찾아 바쁘고, 걸화는 덕분에 맘대로 뛰놀 수 있으니.

“별채에 일하는 아이들을 불러오거라, 어서!! 아니 내가 별채로 가겠다.”

천상이 얼굴을 굳히며 서둘러 별채를 향해 걸어… 아니, 뛰었다.

천상의 수하들이 우르르 그를 따랐다.

천상과 그 수하들을 뒤흔들고 있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천상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유모를 보아온 개방도들의 얼굴에 우려와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제야 걸화도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는지 서서히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천상은 개방 총타에 여인을 들이지 않았다.

거지라고 하나 혈기왕성한 사내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기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았다.

아주 가끔 분타에 여자 거지를 들이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거기까지는 천상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총타에는 만약에 생길 사고를 염려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천상의 여식인 걸화는 개방 총타에서 나고 자랐기에, 어린 걸화를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딸아이가 있는 별채에 사내놈들을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딱 필요한 만큼, 유모와 두 명의 여자 개방도만을 두었던 것이다.

여자 개방도들도 천상과 개방도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제부터 유모를 못 뵈었지요.”

여자 개방도 하나가 씩씩거리는 천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내게든 아니면 총관에게라도 말을 했어야지!”

천상이 유모에 대한 걱정이 넘쳐, 여자 개방도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이들밖에 모르던 유모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달이 나도 보통 사달이 아니었다.

“아가씨도 같이 안 보이시기에 두 분이 출타하신 줄 알았습니다…….”

다른 여자 개방도가 말끝을 흐렸다.

천상의 코가 벌렁거리며, 날숨과 들숨이 눈에 보이도록 크고 다급하게 숨을 쉬어댔다.

심기가 단단히 불편하다는 표시였다.

“유모를 찾아라! 어서! 아랫마을에도 내려가 보아라, 주변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천상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개방도들이 급히 흩어져 유모를 찾기 시작했다.

천상이 걸화를 내려다보았다.

걸화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유모가 없어진 지 사흘이나 되었는데도 내게 말도 안 했단 말이냐?”

천상이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유모 인생 살라고 해서… 뭐 어디 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다니깐요…….”

걸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말했다.

“그래서 어미 같은 유모가 없어졌는데 찾을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너 감시하는 사람 없어졌다고 좋아서 희희낙락거렸단 말이더냐!!”

천상이 걸화를 꾸짖었다.

“희희낙락은 아니고…….”

걸화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유모는 항상 걸화를 단장시키고, 그녀를 지켰다.

답답한 걸화가 유모도 유모 인생을 살라고 말했고 유모도 그러고 싶다고 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유모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조금 섭섭했거니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리 심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 천상의 추궁에, 유모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으이그… 이 철없는 녀석아… 쯧쯧쯧…….”

혀를 끌끌 차는 천상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방주님.”

거지 하나가 급하게 천상에게 달려왔다.

“아무래도 유모께서 산속으로 들어가신 듯합니다.”

거지의 손에 유모의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유모가 산속으로는 왜?”

천상이 물었다.

“가끔 가셨습니다.”

“그러니깐 왜?”

여자 개방도가 걸화를 힐끗 보고 입을 열었다.

“아가씨 찾으러…….”

“끄응… 산이 깊고 험하다. 산짐승도 많고 위험한 곳에 그 나이 든 여인이 홀로… 서둘러라! 모두 산으로! 서둘러 찾아라!”

유모에 대한 걱정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천상은 개방의 방주였다.

중원 끝에 있는 분타에서 일어나는 일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천상이 코앞에 있는 총타의 일을 모를 리 없건만, 걸화와 관련된 보고는 적당히 띄엄띄엄 들었다.

아니, 보고 받고도 못 본 척하거나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게 태반이었다.

걸화가 워낙 유난스럽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를 쳐대는 통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수록 골치만 지끈거렸다.

벌을 주고 혼을 내어도 그때뿐이니 알고 싶지 않은 게 진심이었다.

거지들도 눈치껏 중요하지 않은 일은 대강대강 넘어갔다.

걸화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했다가는 개방의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그렇다 보니 유모의 일도, 별채의 일에도 소홀한 것이 사실이었다.

유모에게만 걸화를 맡겨놓고 손을 놓았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유모를 믿었기에 그랬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유모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뒤범벅되어 천상을 괴롭혔다.

* * *

천상의 지시로 유모를 찾기 시작한 지 한 식경쯤 되었을까?

거지 하나가 유모를 업고 산에서 내려와 의약당에 눕혔다.

유모는 한쪽 발목이 퉁퉁 부은 것 외에는, 눈에 띌만한 외상은 없었다.

미약하게 숨을 쉬었지만, 의식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차고 안색이 파리했다.

걸화가 유모에게 달려들었다.

“엉엉엉엉, 유모오… 흑…흑…엉…….”

서늘한 유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터트렸다.

걸화가 자유롭고 싶어서 유모를 피하고 도망 다녔지만,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유모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어미 없는 걸화에게 유모는 어머니였고, 거지들만 우글거리는 개방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유모가 잘못될까 봐, 걸화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 큰… 애기…씨가 꼴이 이게… 뭡니까…….”

유모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엉어어엉엉엉… 유모… 미안해, 미안해……. 나는 유모가 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어…….”

걸화가 야위고 거친 유모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훌쩍훌쩍 들이마시던 콧물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으흐흑…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호…호…….”

유모의 두 손을 잡고 입김을 호호 불었다.

칠순을 코앞에 둔 유모는 멀리 가지도 못했다.

산 초입에 발목이 접질려 쓰러진 것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조용히 하거라, 의원이 진료 중이지 않더냐.”

천상이 걸화를 타일렀다.

“음흐흐흥… 흠… 으흥… 훌쩍…….”

걸화가 입을 꽉 다물고 흐느꼈다.

차가운 유모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계속 비벼대면서.

“어떤가?”

천상이 침중한 얼굴로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이 유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걸화를 보고, 천상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의약당 밖으로 나갔다.

천상이 밖으로 나오자 의원이 의약당 담벼락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원에게 다가가는 천상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의원과 천상이 얼굴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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