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배걸윤… 이 철천지 웬수 같은 놈!’
담벼락 옆에 쪼그려 앉은 걸화가 걸윤을 노려보았다.
걸화의 눈빛만 보면 걸윤은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되는 것 같았다.
걸화는 그 나름대로 걸윤에게 쌓인 게 많았다.
걸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의 개방도들이 타구봉법을 수련하지만, 걸윤은 장법과 권법을 집중적으로 연마 중이었다.
그 둘의 공통점은 애병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온몸을 특히 손을 무기로 단련해야 했다.
세상에 쉬운 무공이 어디 있겠냐 만은 장법과 권법은 자신의 손과 팔, 온몸을 무기로 만드는 과정이 필수로 선행되어야 하므로 특히나 힘든 수련이었다.
개방 공터 곳곳에는 황동과 무쇠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손바닥이나 주먹을 단련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도 중간중간이 우글쭈글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수련용으로 사용하는 황동과 무쇠를 사용하는 데 있어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절대 내공을 사용하지 말 것.
십 년 정도 수련을 하면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황동이나 무쇠의 모양에 변형을 줄 정도의 타격이 가능했다.
거기다 내공까지 사용한다?
뭐가 남아나겠으며, 싼값이 아닌 황동과 무쇠를 또 어찌 구하겠는가?
손바닥으로 황동 덩어리를 두드려대는 걸윤의 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걸윤은 상의를 벗어 던졌다.
탄탄한 근육 위로 땀방울이 번들거리며 흘러내렸다.
“흥!”
걸화는 그런 걸윤을 보고 콧방귀를 뀌어댔다.
걸윤은 자세를 바꾸어 손날로 황동을 두드렸다.
‘하아암… 쟤는 언제까지 저걸 한데…….’
나른하게 하품을 하던 걸화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걸화를 아늑한 수면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그녀는 한낮의 꿀 같은 단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담 옆에 쪼그려 앉아서 졸던 걸화는 사지를 쭉 뻗고 코까지 골아가며 깊게 잠이 들어 버렸다.
어찌 저리도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지… 개방의 핏줄이라 그런가……?
“드르렁~ 드르렁~”
지나가던 거지들은 익숙한 모습에, 개방에 굴러다니는 돌덩어리 보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조그마한 코에서 어찌 저리 큰 소리가 나는지 궁금해 한번 쳐다볼 뿐.
“쓰…으…읍…….”
걸화가 흐른 침을 닦으며 쩝쩝거렸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사위는 조용했고,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작은 공터에 있던 걸윤과 그의 사부인 거지도 없었다.
이미 시간이 제법 흐른 듯, 따뜻하던 바람은 제법 쌀랑했다.
“하아암… 아이… 배고파…….”
머리를 벅적벅적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걸화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일단은… 배가 고팠다.
* * *
다음날, 걸화는 다시 걸윤의 수련을 훔쳐보았다.
오늘은 절대 잠들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걸윤은 오늘도 부지런히 수련 중이었다.
‘제발 좀 그만해라!’
걸화가 속으로 짜증을 내뱉었다.
그만큼 걸윤은 오랫동안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랴? 배걸화 아닌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다, 복수는 꼭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난한 기다림이 계속되었지만 걸화는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콧구멍을 후비적거리다 배를 벅벅 긁고, 머리카락에 잡히는 지푸라기를 뽑아내다 때 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드디어 걸윤의 수련이 끝났다.
이게 웬 떡이냐? 오늘은 걸윤의 사부도 없었다.
걸화도 눈치가 있기에 건드려도 될 사람과 아닌 사람 정도는 구분했다.
걸윤을 가르치는 거지는 개방의 장로로, 개방 내에서도 무공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아버지인 천상의 측근이었다.
즉,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다.
‘호호호호 오늘이 날이구나, 내 기다림에 하늘도 감복하여 이런 기회를 주는구나.’
걸화의 입이 옆으로 찢어지게 벌어졌다.
하루종일 황동과 무쇠 덩어리를 두드려대던 걸윤이 윗옷을 어깨에 대충 걸치고 나오는 것 아닌가.
‘너 오늘 죽었어.’
걸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걸윤이 갑자기 멈칫했다.
개방의 공터가 연무장으로 쓰이면서 작은 연무장에는 그 주위를 사람 키만 한 담으로 둘러놓았다.
개인이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권장하고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저 연무장에서 나오는 길은 딱 한 곳, 걸화가 기다리는 곳뿐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걸윤이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쟤 왜 저래?’
걸화가 빼꼼히 쳐다보았다.
걸윤이 다시 연문장으로 돌아가더니 걸화가 있는 곳 반대쪽 담을 훌쩍 넘어 사라져버렸다.
“아잇! 저런 변태같은 놈!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담을 넘는데? 에잇! 해파리! 멍게! 해삼! 말미잘! 와아, 짜증나! 가다가 자빠져서 코나 깨져라!”
걸화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혼자서.
걸화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걸화의 은잠술과 추적술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무인들은 걸음마를 떼고 나면 검을 잡든, 기본 초식을 배우든, 체력을 단련하건, 각자만의 방식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다.
걸화는 걸음마를 떼고부터 거지들을 괴롭혔다.
무공을 익힌 거지들을 괴롭힌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까딱해서 기척을 들키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니깐.
걸화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척을 숨기는 훈련.
즉, 은잠술을 꾸준히 수련해 왔다.
십수 년 동안 거의 매일, 그것도 거의 하루종일.
어제오늘만 보아도 걸윤이 수련 중인 종일 내내, 걸화도 은잠술을 수련 중이지 않던가.
당연히 은잠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넝마 쪼가리를 걸치고 산발을 한 거지들은 얼핏 봐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거지 중에 걸화의 표적을 찾아내야 했으니 추적술이 늘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누구도 걸화처럼 추적술과 은잠술, 딱 그 두 가지만을 저리 오랫동안 꾸준히 훈련한 사람은 없으니 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넘어섰다.
이것은 걸화 자신도 유모도 아버지 천상도 그 누구도 모르는,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걸화의 은잠술이 그리 뛰어남에도 걸화의 기척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개방에 딱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걸윤이었다.
걸화가 걸윤을 저렇게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걸윤에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수(?)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원하게 돌팔매질 한번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은데, 걸윤은 번번이 걸화를 피해 갔던 것이다.
“배걸윤… 이놈… 언젠가는 반드시 네 놈을 응징할 것이야.”
걸화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끓어오르는 성질을 다른 거지에게 돌리기로 했다.
“네 이노옴!! 내가 네놈들을 가만둘 줄 알았더냐, 감히 내 앞길을 막은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오늘은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될 게야!!”
목젖을 한껏 내리눌러 엄중하고 근엄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통에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하긴 쪼끄마한 거지꼴에 저런 언사를 쓰는 것 자체가 꼴사납긴 했다.
“아이… 참…….”
거지들은 그 소리만 듣고도 인상을 구겼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대체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다 나오는 것인지, 번번이 기척조차 없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으하하하하!”
앞을 척하니 가로막는 걸화의 모습에 거지들은 성가실 뿐이었다.
“아휴… 야! 가자!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자.”
걸화를 보고 앞에 선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말했다.
“도망가면 어떻게 해? 찾으러 다니기 힘든데….”
다른 거지가 말했다.
“저 주머니 좀 봐라… 도망가겠냐? 저거 다 없어져야 가.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면 잡기 쉬워, 연무장으로 가자!”
걸화를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토론을 마친 거지들이 뒤를 돌아 연무장으로 향했다.
“네 이놈들~ 네놈들이 도망가 보았자, 이 원석지존의 손바닥 안이거늘. 어디를 도망가는 게냐? 네 이놈들 게 섰거라아아아.”
걸화가 도망가는 거지들을 뒤쫓으며, 옆구리에 걸친 주머니에서 짱돌을 꺼내 던졌다.
딱!
“아… 아… 갈수록 타격률이 좋아, 요즘은 던졌다 하면 맞는다니깐.”
뒤따르던 거지가 돌에 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말했다.
“빨리 튀어.”
앞선 거지의 말에 거지들은 속도를 높여 연무장을 향해 달렸다.
“하하하하, 네놈들이 원석지존의 무서움을 아는구나! 게 섰거라, 으하하하하.”
신이 난 걸화는 있는 힘껏 짱돌을 던졌다.
거지들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을 요리조리 피하며 빠른 속도로 연무장을 향해 내달렸다.
* * *
개방의 연무장이라고 해보았자, 커다랗고 너른 공터일 뿐이었다.
개방 내의 큰 공터를 연무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천상이 방주가 되고부터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연무장으로 부르는 것과 아닌 것에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저 공터일 때는 바닥에 뒹굴며 낮잠도 자고 둘러앉아 수다나 떠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연무장이라 현판을 붙인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공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무장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뿐인데 공터에 가면 당연하듯 무공을 연마해야 하고, 낮잠을 자는 것도 수다를 떠는 것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방주 천상의 지시에 따라 시간을 정해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지만, 그 시각 외에 아무도 없을 때조차 당연히 무공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요상한 조화였다.
무공은 천상이 방주가 된 후 가장 세심히 살피는 부분이었다.
오늘도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 총타의 거지들이 줄줄이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슉―딱!
따악!
“으악.”
슉― 슈슉― 따다닥!
“아얏.”
“악!”
연무장에 모여 있던 거지 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그 사이로 통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거지들의 비명 소리에 걸화는 더 신이 나서 짱돌을 던져댔다.
쇽―딱!!
“아아악!”
“하하하하!!”
걸화가 짱돌을 들고 웃어 재꼈다.
“이놈~!!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내공이 들어간 소리는 넓은 연무장을 넘어 개방 전체를 뒤흔들었다.
연무장에 들어서던 천상이 걸화를 향해 노기 어린 목소리를 내지른 것이었다.
목소리의 근원지에는 얼굴이 뻘게진 천상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