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대부분의 문파들이 그렇듯 개방도 입구는 딱 한 곳뿐이었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개방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침입을 시도한 자도 없거니와 누가 거지들 소굴에 쳐들어가겠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개방도 무인의 집단이니 그 정도 방비는 해두었다.
물론 정문 외에 개방을 내려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더 있기는 했다.
하나는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한 비밀 통로로, 개방 내에 두 곳에 있었다.
첫 번째는 방주의 집무실에 있었고, 두 번째는 개방의 제일 내부 걸화가 사용하는 별채의 내당에 있었다.
물론 이 비밀 통로도 만들어 놓은 이래 사용된 적은 없었다.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었고, 다행히 개방에는 그런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 문은 말 그대로 비상시에 개방 내부에 큰 문제가 있을 때 사용하는 은밀한 통로였다.
천상은 비상통로로 걸부를 보낼까 하고 고민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을 위해 은밀히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를 이런 일로 사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나머지 길은 뒷산이었다.
개방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과 개방의 모든 전각은, 끌어안듯이 소령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산은 험하고 넓었기에 침입이 어려운 지형이었지만, 개방 내에서는 완만한 언덕을 올라 험준한 숲으로 이어졌다.
깊고 험한 산을 뚫고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볼 만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천상은 다시 침음을 흘렸다.
자신의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내가 어쩌다가….”
천상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걸화를 떠올릴 때처럼 속이 홧홧했다.
“…….”
누이동생 때문에 개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걸부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걸부의 성격이 그랬다.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고, 묵직하게 자신과 주변을 지켰다.
“애비 술 한 잔 받거라.”
천상은 자신이 비운 술잔을 걸부에게 내밀었다.
“…….”
걸부는 천상에게 술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잔을 비웠다.
“내가 걸화 그것을 낳고 어찌나 좋던지… 개방의 방주가 될 때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지, 세상을 다 가진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더구나.”
천상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옛 생각에 흐뭇한 얼굴이었다.
“네, 제가 일곱 살 때이니 기억이 납니다. 조그마한 것이 어찌나 빽빽 울어대던지.”
걸부가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그랬지, 생각해보면 태어나서부터 성질이 그 모양이었는데 그때는 몰랐구나… 자라면서 참으로 예뻤지. 내가 그 녀석 한창 클 때까지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하게 했어, 틈만 나면 안고 살았지.”
“네, 저도 많이 예뻐했지요.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그런 미인이 없을 겝니다.”
걸부가 온화한 웃음을 띠었다.
“가만히 있질 않으니 문제지! 내가 그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다 깬다, 언제 철이 들려는지….”
어느새 천상의 얼굴은 심려와 근심이 서려 있었다.
“좀 크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걸부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벌써 나이가 열하나다, 열하나. 여염집에서는 시집갈 준비도 하는 나이야, 열하나면!”
천상은 속이 답답했다.
“…….”
걸부는 온순한 얼굴에 작게 미소를 걸칠 뿐이었다.
걸부의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한 걸화였다.
걸화를 아는 모든 개방도는 물론이고 유모도 이제는 천상조차도 걸화의 망나니짓에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데, 걸부만은 아직도 누이동생을 어여삐 보았다.
걸화의 성격이 저 모양인데 꽤 큰 몫을 한 사람 중 하나가 걸부였다.
무슨 짓을 해도 그저 예뻐만 했으니…….
“저래서야 어디 시집이나 보낼 수 있을지, 그렇다고 계속 개방에 둘 수도 없지 않느냐?”
“다 제짝이 있겠지요…….”
아버지 천상과 대화를 나누던 걸부는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방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걸화가 없는지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조심히 밖으로 걸었다.
잠시 뒤.
“흠…….”
걸부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개방의 입구 한편에, 걸화가 넝마를 걸치고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흙길에다 자잘한 돌도 많은 바닥이었건만, 걸화는 제집 안방처럼 편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걸부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천상 개방 식구구먼…….”
걸부는 입고 있는 윗옷을 벗어 걸화에게 덮어주고, 흙과 지푸라기가 엉킨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쯧쯧… 사내로 태어나지 못한 게 이 오라비도 안타깝구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개방도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후 개방을 빠져나갔다.
* * *
“거기가 어디라고 다 큰 애기씨가 길에서 잠을 잡니까? 길에서!”
유모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
걸화는 입을 삐죽였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걸화는 걸화대로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아버지와 큰형, 걸부의 눈치를 보건데 조만간 무림으로 떠날 것 같아서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섰건만 놓치다니.
이놈의 잠! 이놈의 잠!!
걸화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또! 또! 집중하세요!!”
유모의 목소리에 걸화가 다시 바늘을 들었다.
반들반들 윤기가 나도록 빗은 머리카락에 하늘거리는 비단옷을 걸친 걸화는 자수틀을 앞에 두고 어젯밤 잠이 들어 걸부를 놓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옆에는 한바탕 걸화를 씻기고 단장시킨 유모가 노기 어린 모습으로 걸화를 지켜보고 있다가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후웃…….”
걸화가 아랫입술을 비틀어 내밀며, 앞머리를 훅하고 불었다.
상당히 껄렁한 모습이었다.
“그거 하지 마시라고요!”
유모의 말에 걸화는 콧구멍을 넓혀 콧김을 세게 ‘흥!’하고 내뱉었다.
“그것도 하지 마시라니…….”
유모가 입을 닫고,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보고 있으면 잠시도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껄렁하고 불량스러운 것이 아무리 자신이 잔소리를 해대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속이 꽉 막혔다.
유모는 걸화가 바늘로 두피를 긁적여도, 바늘이 들리지 않은 손으로 코를 쓱쓱 문질러도, 발가락을 쪼물대던 손으로 엉덩이를 벅벅 긁어도 참았다.
속에서 폭발할 것 같은 화가 치밀어도 참았다.
누가 도를 닦으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가?
걸화와 며칠만 같이 지내면 몸에서 저절로 사리가 나올 것이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고 자수를 놓고 있는 걸화를 보며··· 아니, 안 보려고 노력하고 있자니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다했어!!”
걸화의 입에서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모는 걸화가 놓은 자수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실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몸을 배배 꼬아가며 한 땀 한 땀 인내로 수놓은 걸화의 작품은 놀라웠다.
비단 천과 비단실을 사용하였는데도 거지의 넝마를 얼기설기 꿰어놓은 것과 같은 모양새.
천상 개방의 종자였다.
“흐음…….”
유모는 다시 이마를 짚고 침음을 쏟아냈다.
“다 했으니깐 이제 놀러 가도 되지?”
귀찮은 것을 해치웠다는 기쁨과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걸부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계산이 걸화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이…….”
유모는 뭐라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기가 차서 말이 턱턱 막혔다.
“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되는 거야, 나는 개방도라구. 자꾸 이런 것 시키지 마. 나도 힘들고 유모도 괴롭기만 하잖아.”
걸화도 미안한지 시무룩하게 말했다.
“…….”
걸화를 바라보는 유모의 눈은 측은함과 답답함과 짜증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라고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난 정말 개방도가 되고 싶어.”
“아가씨…….”
걸화는 유모의 말을 막고 자신의 말을 해댔다.
“무공을 배우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어. 난 구걸하고 길에서 자는 것도 좋아, 이런 비단옷이나 따뜻한 잠자리따위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
유모가 안타까운 눈으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나도 내 행복을 찾고 싶어, 유모도 마찬가지잖아. 형들이랑 나 키운다고 지금껏 고생했는데 이제라도 좀 편하게 쉬어야 되지 않겠어?”
“저도 쉬고 싶어요.”
유모는 진심을 말했다.
“그러니깐 유모도 유모 인생을 살아,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건 어때?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난 형을 따라갈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형을 따라잡을 수 있어. 제발 날 좀 이해해 줘, 유모.”
“…….”
유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모도 알고 있었다.
되지도 않을 짓을 시키고 있는걸.
그렇다고 이 예쁜 아이를 길바닥에 굴리며 키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유모, 나도 이제 열한 살이야.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어, 내 소원이야.”
“…….”
유모가 이마를 짚었다.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유모가 생각해도 내 말이 맞는 거 같지?”
걸화가 유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유모가 걸화를 낮게 불렀다.
“응?”
걸화가 눈을 반짝이며, 유모의 답을 기다렸다.
“서책 가지고 오세요, 공부할 시간입니다.”
“아잇……!!”
걸화가 벌떡 일어나서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바닥을 아주 깨부술 듯이 쾅쾅거리며 서책이 꽂힌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휴…….”
유모는 침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유모는 그 후로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걸화 곁을 지켰다.
걸화가 걸부를 따라간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그렇게 유모가 노심초사하길 며칠째, 기어코 걸화가 사라지고 말았다.
점심 식사를 같이한 후, 뒷간을 간다던 걸화가 돌아오질 않았다.
유모는 걸화를 찾아 총타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해 질 녘이 되어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유모는 걸화가 자주 가던 산등성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걸화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자신을 방해한 이들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아니, 복수의 짱돌을 고르고 골랐다.
하루 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