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형! 나랑 같이 가자!】
내일 자신이 죽는 것을 아는 사람의 표정이 저럴까?
걸화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얼굴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모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주워오는 건지, 버려도 야단을 쳐도 거지들이 입는 넝마를 잘도 구해왔다.
하긴 사는 곳이 거지 소굴인데 거적 쪼가리 구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우랴.
오늘 입은 넝마는 유난히 크고 더러운 것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아침에 곱게 빗어서 양 갈래로 땋아 준 머리카락을 어찌 저리 봉두난발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꽃 자수가 놓인 비단신은 주인을 잘못 만나 어디서 주워 신은 양 흉해 보였다.
“…으흠.”
유모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깊은 침음을 흘렸다.
유모의 침음소리에 걸화도 잘못한 것을 아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일단 방주님께 갑시다.”
유모가 걸화의 손목을 잡고 급하게 이끌며 말했다.
“아버지는 왜?”
걸화가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이 걸부도련님 무림행을 나서는 날이잖아요. 얼굴은 뵈어야지요!”
“뭐? 오늘이 그날이라고?”
의욕 없던 걸화가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달포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달포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걸화는 자다 깬 사람처럼 방주의 집무실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형!!”
방주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걸화가 다짜고짜 큰 오라비인 걸부에게 안겼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 네 얼굴도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잖느냐?”
걸부가 부드럽게 말했다.
넝마 쪼가리를 걸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화건만, 걸부는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였다.
“네 눈에 애비는 안 보이느냐? 애비를 보면 먼저 인사를 해야지!”
걸화의 아버지이자, 개방의 십육 대 방주인 배천상이 걸화에게 호통을 쳤다.
“아부지…….”
걸화가 걸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서 아버지 천상을 보고 웅얼거렸다.
“아버지 아니고 방주님이라고! 형 아니고 오라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게야!”
볼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천상의 언성이 높아졌다.
“걸윤이는 형이라고 하는데 왜 나만 오라버니라고 해야 해요?”
걸화가 천상에게 대들 듯이 물었다.
“걸윤이가 뭐냐!! 걸윤이가! 작은 오라버니라니깐!”
결국 천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걸윤이가 걸윤이지 무슨 오라버니라고…….”
걸화가 걸부에게 꼭 붙어서 구시렁댔다.
“너, 너… 그 꼴이 뭐냐! 내가 조신하게 있으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쯧쯧쯧…….”
천상은 자신의 여식, 걸화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
걸화는 입을 삐죽이며 걸부에게 더 달라붙었다.
* * *
소령산 아래, 개방 총타의 터는 넓었다.
개방도의 수도 많지만, 규모 또한 굉장히 광범위했다.
그러다 보니 전각도 띄엄띄엄 지어져 있고, 곳곳에 공터도 많았다.
총타의 입구는 커다란 문만 하나 덜렁 있을 뿐, 허허벌판처럼 아무것도 없이 크기만 덩그렇게 컸다.
그 휑한 입구에 오랜만에 개방도들이 버글거렸다.
평소 넓은 터 곳곳의 제 위치에서 자기 일을 하던 거지들이 걸부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만큼 걸부는 총타 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
방주 천상과 유모, 걸윤 그리고 장로들까지 총타의 거의 대부분이 나와 있었다.
“아! 싫어! 못가! 나 안 데리고 가면 못가아아아아!!”
개방 총타 입구에서 걸화가 걸부의 허리춤을 꼭 잡고 늘어졌다.
덕분에, 입구에 나와 있는 총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화의 악다구니를 들어야만 했다.
산발한 머리에 커다란 넝마를 걸치고 걸부의 등에 딱 붙은 꼴은 꼭 원한에 찬 혼백 같았다.
거기다 어찌나 악을 써대는지, 꿈에 나올까 무서운 몰골이었다.
“걸화야, 오라비 가야 한다. 오래 안 걸려, 딱 이 년만 있으면 올 거야.”
걸부가 뒤에 매달린 걸화를 타일렀다.
“그래, 딱 이 년인데 나도 같이 가아아!!”
걸부를 끌어안은 걸화가 손에 깍지까지 끼고 매달렸다.
“이 녀석아!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간다는 게야!! 얼른 그 손 놓지 못해! 어디서 오라비 가는 길을 막는 게야!”
천상이 걸화에게 호통을 쳤다.
유모는 길고 깊은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뭣들 하는 게야! 얼른 걸화를 떼어내라.”
천상이 옆의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네!”
옆에 섰던 거지들이 걸화에게 달려들었다.
“안 놔? 이거 안 놔!! 야! 야!! 나 건드리기만 해 봐, 내가 가만 안 둔다!! 엉? 내가 복수는 꼭 하는 거 알지? 이거 놔! 안 놔? 놔~아!!”
양손으로 걸부의 허리춤을 꼭 끌어안은 걸화는 뒷발로 천상의 수하인 거지들을 차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아… 걸화야…….”
걸부는 난감한 듯 뒤에 매달린 걸화를 돌아보았다.
천상이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떼어 놓으라니깐, 뭣들 하는 게야!”
“옙!!”
아무리 걸화라고 하지만, 무공을 익힌 거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힘으로 떼어내는 걸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야아~아!! 이씨!! 다 죽었어!! 내가 니들 가만 안 둔다!! 혀~엉!! 형!! 가지맛!! 나랑 같이가아!! 혀엉!!”
어떻게든 걸부에게 가려고 발악하는 걸화를 걸윤이 꼭 끌어안았다.
“야!! 배걸윤! 너 이거 안 놔!!”
걸화가 걸윤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발을 버둥거렸다.
“…형님! 얼른 다녀오세요, 제가 걸화를 꼭 잡고 있겠습니다.”
걸윤이 걸화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걸부에게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걸윤과 걸화를 바라보던, 걸부가 뒤돌아 천상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방주님!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몸 조심히 다녀…….”
“혀어어엉!! 야!! 이거 놔!! 놓으라고! 아버지! 나도 갈래요! 보내 줘어어어!!”
“시끄럽다!!”
천상이 내공을 실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총타를 넘어 개방을 둘러싸고 있는 소령산이 울렁거리며, 놀란 산새들이 우르르 산 위로 날아올랐다.
귀가 먹먹해진 일동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넓은 터에 수많이 사람들이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
“…….”
“…….”
“…아버지가 더 시끄럽거든요!! 놔! 놓으라고!!”
주춤하던 걸화가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방주님, 아무래도 저의 무림행은 좀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걸부가 천상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휴… 어휴… 저 천둥벌거숭이!! 어휴우!!”
천상이 걸부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댔다.
걸부가 걸윤과 걸화에게 다가갔다.
걸화는 팔다리는 내저으며 걸윤에게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고, 걸윤은 그런 걸화를 저지하려고 꽤나 힘을 빼고 있었다.
“걸윤아, 그만 놓아주렴.”
걸부가 걸윤에게 말했다.
걸화는 쉬지 않고 발버둥을 쳤다.
“야! 놓아주라잖아!!”
“형님! 어서 가십시오.”
걸윤이 걸화를 꼭 잡으며 말했다.
“내 무림행을 미루기로 했다.”
걸부의 갑작스러운 말에 걸윤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 틈에 걸화가 냉큼 걸윤의 손을 풀고, 걸부에게 매달렸다.
“진짜? 안 가? 그냥 가자아아! 오늘 나랑 같이 가아아아.”
걸화가 걸부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아니다, 아버지도 걱정되고 아직 걸윤이 무공도 봐줘야 해서 신경이 쓰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걸부가 걸화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오늘 가지, 나도 가고 싶었는데…….”
걸화가 아쉬워하며 걸부의 손을 잡고 촐랑촐랑 안으로 들어갔다.
* * *
자시가 가까운 시각.
둥그렇게 커다란 달은 새하얀 빛을 뿜어내어, 소령산과 그 아래의 개방을 따뜻하게 비추어주었다.
걸부가 조용히 방주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방주인 천상은 침상에 들지 않고 있었다.
“지금 가려고 하느냐?”
천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방주님. 소자, 무림에 나가 눈을 넓히고 오겠습니다.”
걸부가 반듯하게 말하고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천상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걸부는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조용히 방주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허… 참… 나도 어쩔 수 없는 애비인가…….”
걸부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천상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했다.
무림행을 나가는 것은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걸부는 무공에도 재능이 있고 영민했다.
천상을 닮아 풍채가 좋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배려심이 깊고 온후했다.
천상이 방주인 것을 제쳐두고라도 차기 방주의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더 큰 곳에서 넓은 세상을 보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의 도리이건만, 염려되고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술상을 내어오너라.”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져 오고 아이들 어미가 생각났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을 듯했다.
“…갓 태어나 빨갛고 꼬물꼬물하던 녀석이 벌써 커서 무림에 나가다니… 하아…….”
천상이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번져나갔다.
“으흠….”
속 한번 썩힌 적 없는 아이였다.
개방 방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듬직하니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잘 다녀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서운했다.
든든한 뭔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뱃속이 휑했다.
다시 술잔을 비웠다.
쓴 술이 잘 넘어가는 것이, 오늘은 과음을 할 듯싶었다.
그때 누군가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집무실을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천상은 습관적으로 타구봉을 빼어 들고, 문 옆에 몸을 붙여 침입자의 공격에 대비했다.
조용히 쓱 하고 열리는 문틈으로 검은 인영이 재빠르게 들어왔다.
천상이 타구봉을 들어 내리치려는 찰라, 인영이 좌수를 들어 천상의 손목을 막았다.
“방, 방주님…….”
검은 인영이 천상의 얼굴을 마주 보고 숨을 내뱉었다.
그를 본 천상의 눈이 커지며,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검은 인영은 숨을 낮게 몰아쉬는 걸부였다.
“너… 너, 아직 안 가고 뭐 하는 게냐?”
천상이 타구봉을 내리고 놀라서 물었다.
“걸화가…….”
걸부가 말을 흐렸다.
“뭐? 뭐라고?”
여기서 걸화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천상이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화가 개방 입구에 있습니다.”
걸부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끙…….”
천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