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내가 은원은 확실한 사람이지】
하남의 문파라고 하면 대부분 숭산에 있는 소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하남 개봉성에 소림에도 뒤지지 않는 규모와 역사를 가진 방파가 있었다.
하남, 소령산 방향으로 잘 닦인 관도를 따라 쭉 나아가면, 크고 넓은 대로변 끄트머리에 외길이 나온다.
외길 또한 폭이 넓고, 판판하게 잘 닦여있는데 소령산을 향한 비스듬한 오르막길이었다.
그 길을 한참 오르면 꽤 커다란 문이 나왔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그 문으로 너저분한 거지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그곳이 바로 유구한 역사와 거대한 규모를 가진 개방 거지들의 본거지인 개방의 총타였다.
움막을 걷어낸 개방 총타에는 아담한 전각이 수없이 세워져 있었다.
단순하고 수수한 전각이었다.
그 무던한 전각들 사이에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전각이 하나 있었다.
개방의 여느 전각들과 다르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그것은 총타의 가장 내부에 있는 별채였다.
붉게 칠한 유선형의 기둥에 다채로운 문양이 그려진 서까래와 날렵하게 하늘을 찌르는 처마, 개방에서 유일하게 색과 무늬를 넣은 건물이었다.
별채의 앞마당에는 방주의 지시로 계절마다 꽃을 심어놓았다.
개방 거지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생경했지만, 별채만 따로 두고 본다면 웬만한 가문의 별당 못지않게 고매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개방주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개방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그 아름다운 별채, 내당의 문이 빼꼼히 열렸다.
이어서 윤기 나는 뽀얀 얼굴이 열린 문틈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크고 동그란 눈에 맑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간다.
그리곤 슬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걸화가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나와서 화려한 꽃무늬가 수 놓인 비단신을 재빠르게 꺾어 신고 서둘러 별채를 나섰다.
어디서 구했는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누더기를 걸치고, 반듯하게 빗어 올린 머리를 한 모양새는 거지라기보다는 머리에 꽃을 꽂으면 딱 어울릴 듯싶었다.
기민하게 별채를 벗어난 걸화가 익숙하게 산길을 올랐다.
바닥을 두리번거리다 쪼그리고 앉았다.
“으드득… 내 반드시…….”
다시 일어선 그녀는 바닥에서 뽑아낸 주먹만 한 돌멩이를 꽈―악 쥐고 있었다.
걸화는 다시 바닥을 살피고, 쪼그렸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 * *
흑견 대붕의 허리에 세 개의 매듭이 덜렁거렸다.
개방의 삼 결 제자라는 뜻이었다.
그의 양쪽 팔과 같은 망충과 길상은 그의 양쪽 팔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오른쪽과 왼쪽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대붕은 불룩한 배를 툭툭 두드렸다.
배부른 거지의 걸음은 느릿했다.
“아~ 분타로 가기 싫다, 역시 총타에 들어오니 좋구나… 길바닥에 안 돌아다녀도 이렇게 배터지게 먹고… 하아암…….”
대붕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대붕과 망충, 길상은 개방 총타에서 멀지 않은 하북의 한 분타 소속으로, 총타와 분타를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 년의 절반은 총타에 들어와 있었지만, 어찌하면 총타에 눌러앉을 수 있을까 궁리하곤 했다.
그러다 분타로 내려가면 또 잊어버리고 뛰어다녔지만.
“끄어억…….”
하품을 하던 입에서 걸쭉한 트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충 비벼서 뱃속에 욱여넣은 음식물 냄새와 오랫동안 닦지 않은 입 냄새가 뒤섞여 흘렀다.
구토를 일으킬 것 같은 고약한 냄새였다.
하지만 대붕도 양옆의 이 결 제자인 망충과 길상도 냄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에 뭐가 끼여서 영 개운치 않은지 대붕이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꼬질꼬질한 손가락을 자신의 입속 깊이 넣어 헤집을 뿐이었다.
“으~다다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따땃하고… 어디 구석에 가서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자.”
이미 총타와 분타의 분위를 파악하고도 남은 대붕이었다.
급한 일도 없으니, 총타에서 며칠 더 개기다 갈 작정이었다.
분타주가 늦게 왔다고 지랄하겠지만, 적당히 방주 핑계를 대거나 총타에 일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좋죠.”
망충도 총타에서의 농땡이에 익숙한 듯 기분 좋게 받아쳤다.
“가시죠.”
길상이 헤헤거리며 대답했다.
대붕이 사람들이 없는 산길로 걸음을 옮겼고, 망충과 길상도 대붕을 따랐다.
“이놈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외길에서 만나는구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애당초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원석지존이 오늘 네 놈들을 벌할 것이야! 으하하하하.”
호기롭게 말을 하는 사람은 땟국 흐르는 넝마를 걸친 조그만 여자아이, 배걸화였다.
어느새 나타나 대붕과 망충, 길상의 앞을 막아선 걸화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호방하게 웃어 재꼈다.
“아이… 아가씨…….”
망충은 걸화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늘도 편하게 넘어가기는 글렀구나.
“형님, 어쩌죠?”
길상도 얼굴을 구기고 대붕을 쳐다보았다.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는 것이었다.
“하… 이거 참… 날씨가 좋네.”
대붕은 걸화를 못 본 척, 먼 산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하늘은 유난히 높고, 파랬다.
대붕의 갑갑한 속을 풀어줄 듯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무심하게도 깨끗하고 선명했다.
아주 운이 좋은 날은 걸화를 못 본 척 딴청을 부리고 있으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쫓아가거나 더 괴롭히고 싶은 사람을 따라가기도 했다.
오늘은 그리 운이 좋은 날이 아닌가 보다.
“내 평생을 갈고 닦은 십팔원석신공을 받아랏!!”
걸화가 옆구리에 찬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짱돌을 꺼내 대붕 일당을 향해 집어 던졌다.
대붕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짱돌을 한걸음 옆으로 피했다.
“…이런!”
딱!!
틀림없이 보고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선 짱돌에 교묘히 가려진 작은 돌멩이가 연이어 날아와 대붕의 이마를 가격했다.
“하하하하!! 십팔원석신공 제십이 초식 십이원석 맛이 어떠냐? 이놈들!”
걸화는 이제 짱돌을 양손으로 쥐고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아하하하!!”
그녀는 신이 나서 돌을 던지면서도 계속 가가대소하였다.
그 모습이 섬뜩하다고 생각하는 길상이었다.
“야, 알아서 피해.”
대붕이 외쳤다.
“예, 형님.”
대붕 일당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짱돌을 이리저리 피했다.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자기 덩치에 절반만 한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돌을 담아 왔는지 돌멩이가 끝도 없이 날아왔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돌팔매질이 드디어 멈추었다.
“에잉?”
한참을 신나게 던지던 걸화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이참…….”
걸화는 아직 얼굴을 가리고 허둥대는 대붕 일당을 한번 돌아보고 소리쳤다.
“내 이 원수들의 얼굴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
그리고는 흙바람을 일으키며 잽싸게 튀었다.
며칠 전 갈대밭으로 도망간 걸화를 어깨에 메고 내려온 것이 대붕이었다.
원수, 원수. 들먹이는 것을 보니 그것에 대한 복수인 모양이었다.
“…어? …형님?”
“…저, 저기… 아가씨 튀신 거 같은뎁쇼?”
망충과 길상이 눈을 껌뻑이다 대붕을 바라보았다.
“야! 이씌, 잡어! 아가씨 잡어! 어서!”
대붕이 걸화를 쫓으며 소리 질렀다.
망충과 길상도 대붕을 따라, 걸화가 도망가는 쪽을 향해 달렸다.
“놓치면 또 온 산을 헤집으며 찾아야 한다! 절대 놓치면 안 돼!! 잡아!!”
대붕이 악을 쓰며 걸화를 향해 뛰었다.
* * *
얼마 뒤, 한낮이 되어서야 잡힌 걸화는 익숙하게 대붕의 한쪽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대붕은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걸화를 한쪽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갔다.
망충과 길상이 그들 뒤를 따랐다.
한번은 걸화를 잡아서 어깨에 메고 내려오는데, 잠시 방심한 틈에 등 뒤로 몸을 굴려 다시 도망간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걸화를 멘 사람 뒤에 누군가가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아이 진짜, 아가씨! 우리도 힘들어요, 그만 좀 해요!”
대붕이 얼굴 옆에 걸쳐진 걸화의 엉덩이를 힐끔 보고 얼굴을 다시 앞을 향하며 투덜댔다.
‘분타로 내려가기 전에 며칠 정도 농땡이도 치고, 좀 쉬려고 했는데…….’
걸화를 쫓는 건 분타에서 구르는 것보다 더 빡셌다.
암만 생각해도 총타에서 더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누가 나 잡으래?”
걸화가 뿌루퉁하게 답했다.
걸화는 걸화대로 거지들에게 불만이었다.
힘들다고 투덜대면서, 꼬박꼬박 자신을 잡아서 유모 앞에 가져다 바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주님이 찾아오라잖아요!”
대붕이 답답하다는 듯 하소연했다.
“치… 뭐 덕분에 경공술도 늘고, 추적술도 늘고 좋지 뭐….”
걸화가 혼잣말하듯 구시렁댔다.
뭐… 아버지가 시켜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되기는 했다.
“아효! 그 시간에 무공을 연마하면 그게 더 좋은 거죠!”
대붕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깐 제발 좀 나 좀 찾지 마아!”
걸화는 걸화대로 애원했다.
“우리가 뭔 힘이 있어요! 방주님이 찾아오라면 찾아야지!”
걸화가 보지 못했지만, 대붕도 한껏 억울한 얼굴이었다.
“아잇…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려? 나도 잘 뛰는데…….”
“아가씨 말대로 아가씨 잡으러 다니다 경공이 늘어서 그렇죠!”
“아!! 나 앞으로 절대 도망가거나 안 숨을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걸화가 대붕의 등 쪽으로 향해 있던 머리를 들어 대붕을 보려 애쓰며 말했다.
“아! 움직이지 마요! 이젠 무겁단 말이에요!”
“그러니깐 이제 나 안 메고 다녀도 된다니깐, 내 부탁 딱! 하나만 들어주라! 응?”
“무공은 안 돼요.”
대붕은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쳇! 개방을 나가서 점집을 차리지 그래!”
걸화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아가씨!!”
저 멀리서 유모가 달려오며 걸화를 불렀다.
“아아아아―”
대붕의 어깨에 걸쳐진 걸화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뒤헝클었다.
대붕은 유모 앞에 걸화를 내려놓고, 유모에게 목 인사를 했다.
“참… 고생이 많아요.”
유모는 대붕이 정말 안쓰러웠다.
대붕뿐 아니라 며칠에 한 번씩 걸화를 들쳐 메고 오는 개방도들이 딱했고, 괜히 그들에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