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왜 나만 이러고 다녀야 해?】
오 년 전, 크지 않은 움직임에도 진득한 땀이 배어나는 늦여름.
녹음의 짙은 푸름은 서서히 사라지고, 결실을 볼 준비를 하는 시기였다.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햇살은 서서히 힘을 잃고 있지만, 따끈따끈한 열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시각.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거친 숲길을 내달렸다.
햇살에 데워진 마른 땅에 뿌연 흙먼지가 일며, 아이가 지나간 자국마다 조그마한 발자국이 콕콕 찍혔다.
덥고 습한 공기에 실린 먼지가 아이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옷소매로 코를 쓱 문질렀다.
아이의 고급스러운 진주색 비단옷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긁혀서 올이 나간 곳 투성이었다.
진주 구슬이 달려있던 치마 아랫단은 한 뼘쯤 찢겨 나가 있었고, 치마 끝단의 너덜너덜한 실밥이 걸음걸음마다 흐느적거렸다.
정갈하게 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묶어 올렸을 머리카락은 어디에서 집어 뜯겼는지 여기저기 한 움큼씩 삐져나와 있었다.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머리카락 곳곳에 초록 잎사귀와 버스럭거리는 돌 부스러기가 끼어있었다.
심연같이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는 잠시 멈춰 서서 달려오던 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떨렸다, 다시금 입을 앙다물며 오르막길을 내리 달렸다.
한참을 달리더니 기운이 떨어진 것인지 작은 다리가 마른 바닥을 질질 끌며 황토색 흙먼지를 일으켰다.
밝은 비취색이었을 비단 신발과 치맛자락에 황색 흙가루가 올라붙었다.
아이는 쉬지 않고 앞으로 향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뒤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저쪽이다!!”
능선 아래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외쳤다.
“하악… 하악… 아잇… 벌써…….”
아이는 가쁜 숨을 내쉬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자신의 키보다 높이 우거진 갈대밭으로 뛰어들었다.
삐익―
하늘 높이 날던 매 한 마리가 소리를 길게 빼며 울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이를 향해 내리꽂혔다.
소리를 내뱉은 매는 갈대밭 위에 우아한 원형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녹황색의 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목표물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유 있게 유선형을 만들며 고도를 낮추었다가 높이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추격자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저쪽!! 저쪽, 갈대밭 쪽으로!!”
줄곧 하늘을 주시하던 이의 목소리가 외쳐지자, 먼지를 흩날리며 한 떼의 추적자 무리가 우르르 달려왔다.
힘든 기색도 없이 산길을 오른 사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아이가 달려들었던 갈대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잔잔하던 갈대밭이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쫘악 쫘악 갈라졌다.
자갈색의 작은 꽃이 영글어가던 가느다란 갈대 줄기가 휘청거렸다.
추적자들은 빽빽한 갈대를 양손으로 휙휙 가르며 촘촘히 훑어대었다.
조밀하게 줄이 서 있던 갈대들이 땜통처럼 바닥을 보이며 우수수 쓰러져 갔다.
추적자들로 인해 넓지 않은 갈대밭에 바로 서 있는 갈대가 몇 남지 않았다.
진흙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아이는 추적자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자, 바닥에 더욱 몸을 밀착시키고, 꿈틀꿈틀 앞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러운 뱀과 같은 몸놀림이었다.
바닥의 질척한 진흙이 온몸에 들러붙었지만, 아이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갈대밭을 빠져나가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듬성듬성한 갈대 사이를 가르며 여자아이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으악, 으아아아악~!!”
놀란 여자아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넓은 산을 뒤흔들었다.
손을 내밀었던 사내가 주춤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맞추어, 갈대밭에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여자아이 주변에 추격자 무리가 우글우글 둘러쌌지만, 아무도 아이를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아악!! 악! 아악!!”
아이는 비명으로 사내들을 쫓아내기라도 할 듯 빽빽 악을 써댔다.
이 기묘한 상황을 참지 못한, 한 사내가 머리를 벅적벅적 긁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는 혼자 바동거리며 악악거렸다.
진흙밭에 흙이 푹푹 파이며, 아이의 전신에 질척질척 들러붙었다.
“나 잡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둔다! 니들 다 죽었어!! 이야아아아!!”
작은 아이의 협박에 다가간 사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아이를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나머지는 아이와 그녀를 잡은 사내를 포위하듯이 빙 두르며 자리 잡았다.
“놔! 놔! 아놔, 이거 안 놔!!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잡힌 여아가 소리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쳐댔다.
아이의 몸에 짓이겨진 진흙 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어! 내가 얼굴 전부 다 기억해 뒀어!! 엉!!”
사내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상체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
뒤에 선 사내들은 여아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서산에는 다홍빛 노을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의 아련한 노을빛이 잔잔한 감성을 울릴 법도 하건만, 갈대밭의 그 누구의 눈에도 노을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악다구니를 쓰는 작은 여자아이에게 온 신경이 쏟아졌다.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아이는 사람이 아닌 괴이한 생명체 같았다.
작은 손과 발을 되는대로 휘두르며 몸에 닿는 것은 무조건 쳐댔지만, 덩치 좋은 사내는 여아를 한번 추켜올리고 덤덤하게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나머지 사내들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이씨…….”
흑회색 진흙 덩어리가 된 여자아이의 허연 흰자위와 새까만 눈동자만 번뜩거렸다.
아이는 눈을 부라리며 씩씩거렸다.
갈대밭을 빠져나오자 나이 지긋한 여인과 사내아이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여인은 힘이 드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아이는 그런 여인의 팔을 잡고 힘에 부쳐 하는 여인을 도왔다.
힘이 들 법도 하건만 사내아이는 연신 생글거렸다.
“흐읍!! 애.기.씨!!”
달려오던 여인이 여아를 향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덩치 큰 사내의 어깨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악을 써대던 여자아이는 그 목소리에 힘을 쭉 빼고 시무룩해졌다.
그 작은 여자아이의 이름은 배걸화.
‘뛰어날 걸(傑)’ 자에 ‘꽃 화(花)’ 자를 사용하여 뛰어난 꽃이라는 의미로, 아이의 아비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녀는 십육 대 개방 방주의 막내이자, 고명딸이었다.
그리고, 걸화를 쫓던 이들은 개방의 거지들이었다.
무공까지 익힌 한 무더기의 개방도들이 작은 여자아이 하나를 찾아오는데, 무던히 애를 먹고 있었다.
걸화를 어깨에 멘 거지가 앞장서고 다른 거지들이 주위를 에워싸며 호위하듯 따랐다.
뒤를 따르는 개방도들은 자신을 노려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들을 뒤따르던 유모 이화는 두통이 오는지 한쪽 이마를 짚었다.
수척하게 야윈 유모의 걸음은 힘없이 휘청거렸다.
이따금 사내아이가 유모의 손을 잡아주었다.
유모 옆에서 촐랑거리며 뛰던 사내아이가 침울한 걸화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사내아이의 얼굴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 걸화의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야! 너!”
버럭 소리를 지르던 걸화는 유모 이화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힘을 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답답하고 분해서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계속 혀를 날름거리는 남아는 그녀의 오라비이자, 개방주의 둘째 아들 배걸윤이었다.
걸화는 걸윤을 노려보며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화딱지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걸윤은 양쪽 볼에 엄지손가락을 붙이고, 다른 손가락들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더욱 약을 올렸다.
걸화는 부아가 뒤집혔지만, 지금 화를 내어보았자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매달린 걸화는 눈에 불을 뿜을 것처럼 걸윤을 노려볼 뿐이었다.
‘두고 보자, 배걸윤!’
* * *
“다 큰 애기씨가 꼴이 이게 뭡니까? 이게!”
뿌연 수증기가 꽉 찬 방안에 언짢은 목소리가 울렸다.
유모 이화가 무명천 조각을 들고 걸화에게 역정을 냈다.
걸화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따뜻한 물속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유모는 깡마른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걸화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문질렀다.
“아! 아퍼…….”
붉은 꽃잎이 둥둥 뜬 물속에 앉아 있던 걸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뽀얀 살결에 까끌까끌한 천이 지나간 자리마다 연홍색으로 변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유모는 못마땅한 얼굴로, 걸화의 등을 더욱 세게 문질러댔다.
“아… 아…….”
걸화의 작은 손이 유모 손에 들린 무명천을 밀어냈다.
흥분했던 유모가 천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애기씨는 개방 방주님의 금지옥엽이세요. 항상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지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입니까? 이게…! 으흠…….”
유모가 깊은 침음을 흘리고, 천을 든 손에 다시금 힘을 주어 걸화를 문질러댔다.
“아… 아, 아프다니깐…….”
걸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서 목욕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유모는 대꾸 없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문질렀다.
“…아버지도 형들도 거지야, 그런데 왜 나만 이러고 다녀야 해? 왜 나만 무공을 못 배우게 해?”
걸화가 따지듯 물었다.
억울했다, 오라비들은 무공도 배우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데 자신만 비단옷을 차려 입히고 멍청하게 앉아만 있으라고 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알아들어요? 도련님들은 개방을 이으실 분들이에요, 개방을 이끌기 위해 무공과 거지 모양새가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애기씨는 달라요. 방주님이 곱게 키워서 좋은 가문으로 시집을 보내실 겁니다. 개방을 이을 필요가 없다구요.”
유모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야…….”
다시 들어도 이해가 안 됐다.
‘왜! 나만 개방을 못 잇고 왜 나만 시집을 가야 하는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야기해보았자 유모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갈 뿐이었고, 그럼 자신만 손해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