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키가 크지만, 큰 덩치가 아닌 적당한 몸집의 사내가 보였다.
연천이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아이의 얼굴을 닦은 천이… 아니, 시커먼 걸레가 들려있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아이가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폐가를 둘러보며 물었다.
“숲에 쓰러져 있는 것을 데리고 왔소.”
연천은 짐승이 키운 아인 줄 알았다는 둥, 멀쩡한 사람이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서 놀랐다는 둥 하는 마음속의 이야기는 삼켰다.
“아… 헌데 누구십니까?”
“약초꾼이오.”
연천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시구나, 어쩐지… 독사에 물리기 전보다 정신도 맑고, 눈도 잘 보이는 것 같고 개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뭔가 좋은 처방을 하셨나 봅니다.”
아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연천은 상쾌하게 말하는 아이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정신이 맑고 개운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얼굴을 닦아주었소.”
“네?”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얼굴을 닦았더니 눈이 잘 보이고 개운한 느낌이 든 것이오. 그… 인물도 좋은 사람이 좀 씻고 사시지…….”
연천은 참았던 말을 뱉어냈다.
그의 말에 거칠게 문질러 벌게진 아이의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그, 그럼… 독사의 독은……?”
아이의 목소리에는 독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독이 없는 뱀이라 물린 자리에 큰 탈은 없을 것이고, 바닥에 구른 상처도 대수롭지 않은 듯하니 며칠 지나면 괜찮을 것이오.”
연천이 가볍게 말했다.
“네? 독사 아니었어요? 틀림없이 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는데요?”
아이는 연천을 못 믿겠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 꽁꽁 묶어두면 멀쩡한 몸도 피가 통하지 않아 마비가 되오.”
연천은 아이의 몸 곳곳에 묶인 끈의 정체가 새삼 떠올랐다.
정말 아이는 어딘가로 잡혀가던 것이 아닐까?
“아… 독사에게 물린 줄 알고, 독이 퍼지지 말라고 끈으로 묶어둔 것인데…….”
아이가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뱀에 물린 곳은 왼쪽 발뒤꿈치였다.
하지만 아이의 온몸, 곳곳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연천은 여전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 아이의 사정을 묻지 않았다.
연천은 피워놓은 불가로 다가가, 꼬치에 꿰어 굽고 있는 토끼고기를 살폈다.
‘역시… 토끼였어…….’
아이가 고기를 보고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뱃속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꾸루루루루―
소리 나는 배를 잡고 멋쩍은 표정으로 연천을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오, 아직 덜 익었소.”
연천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툭 터져 나온 웃음에 불과했지만, 정말 오랜만이었다.
자신이 얼마 만에 웃은 건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 * *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백연천은 검을 들고 폐가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과 함께하였던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던 새벽 수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어나야겠다든지, 수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몸이 움직였다.
연천은 폐가의 뒤편에 제법 너른 공터로 가서 그 한가운데에 섰다.
새벽이라고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각이라, 높이 뜬 달빛이 고고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문종이가 뜯긴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문짝도, 깨어져 바닥을 뒹구는 단지 사금파리도, 지붕이 뚫리고 축대가 무너진 축사도 달빛 아래에서는 하나의 그림처럼 고풍스럽게 보였다.
연천은 손에 들린 검을 검집 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검집이 사랑스러운 누구라도 되는 듯…….
어두운 감색의 가죽 검집은 세월과 연천의 손때가 합쳐져 낡았지만 예스러운 멋이 있었다.
그것이 연천이 가진 것 중, 그나마 가장 멀쩡한 물건이었다.
검을 내려다보는 연천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낡은 검집 밖으로 나온 검은 의외로 훌륭한 것이었다.
강철을 수만 번 정련하여 조금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검.
연천이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시린 달빛이 검날에 반사되었다.
보석보다 눈부신 광휘를 가진 검에 새하얀 달빛이 스미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검을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다시 올려 짧게 끊어치며 중단을 잡고 몸을 비틀어 옆으로 베었다.
연천이 달빛 아래에서 연마 중인 검초는 무림을 떠도는 하룻강아지도 코웃음을 치는 검법, 삼재검법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철전 두 닢이면 구할 수 있는 검법으로 검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그저 검을 베고 찌르는 몇 가지 초식을 나열해 놓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무인들이 걸음마를 떼고 나면 곧 배우는 검법인데··· 꼭 거치지 않고 대충 넘기는 이들도 수두룩한 그런 시시한 검법이었다.
지나치게 훌륭한 검으로, 지나치게 하찮은 검법을 단련 중인 연천.
지나가는 도둑이 이 장면을 봤다면, 비리비리한 검의 주인을 어찌하고 검을 훔쳐 갈 궁리를 할 법했다.
다행히 그 장면을 본 것은, 지나던 도둑이 아닌 소갈이 난 거지 아이였다.
급하게 많이 먹어서 그런지 심하게 소갈이나 잠이 깬 것이었다.
아이는 폐가에 몸을 숨긴 채, 연천이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우악스럽게 뜯어 먹은 토끼에게 감사했다.
‘찾았어, 이제부터 저분이 나의 스승이야. 저분께 꼭 무공을 배우겠어.’
아이는 연천에게 무공을 배워 고수가 되겠다고 혼자 각오를 다졌다.
사실 연천의 외모는 무림인으로서 강한 인상이 아니었다.
곱게 자란 것 같은 순한 얼굴에 덩치가 크지도 몸이 단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몸에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좋게 봐줘야 삼류 무사 정도였다.
거기에 낡은 검 한 자루를 끼고 있을 뿐.
멋모르는 거지 아이이니 기초적인 검초이지만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홀려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지, 무림에 발 한쪽이라도 담가봤다 싶은 사람은 연천에게 무공은 고사하고 탈탈 털어 동전 몇 닢 나올 것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거지 아이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십육 년 평생을 상상만 했던, 무림인을 만나서 무공을 배우는 일이 현실의 자신에게 일어나려고 하고 있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아이는 줄줄 흘려가며 물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설레고 가슴이 벅찼다.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와… 아… 너무 행복해…….’
그렇게 생각하고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 * *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떠오른 지 한참이 지난 해는 비추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달구었다.
구멍 난 문종이 틈으로 비추는 햇살에 먼지가 둥둥 떠다녔다.
달빛을 고고하게 받아들이던 폐가의 모든 것들.
뜯긴 문짝과 굴러다니는 사금파리, 구멍이 숭숭 난 지붕과 무너진 축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 흉물스러운 자태를 드러내 놓았다.
발갛게 타오르던 땔나무는 꺼진 지 제법 되어, 까만 재만 남아 있었다.
거지 아이가 잠들었던 마른 짚더미 위는 비어있었다.
어찌하였는지, 아이는 문간에서 문지방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편하게 드러누워 자는 거지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따뜻함이 계속되면 더운 법이다.
“쓰으… 흡…….”
아이가 한쪽 입가로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실눈을 떴다.
손에 묻은 검댕이 입가에 시커먼 자국을 남겼지만, 아이는 검댕 같은 소소한 일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박박 긁으며 폐가 안을 둘러보았다.
밤에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로 토끼를 구워 먹었던 꼬챙이와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
아무리 눈을 닦고 찾아보아도 약초꾼은 없었다.
그의 바랑도, 검도 없었다.
“어어?”
마음이 급해진 아이가 서둘러 폐가 안을 살폈다.
아이가 누워있었던 짚더미 위에 놓인 작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소협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소협이 곤히 자고 있어 차마 깨우지 못했소.
뱀에 물린 곳은 상처만 아물면 그만인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옆에 둔 것은 금창약이오.
뱀에 물린 곳과 긁힌 상처에 바르시오.
깨끗이 씻고 바르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남이 있을 것을…….
소협의 앞길이 무탈하기를 바라겠소.
“아잇… 나 버리고 갔어? 아~ 진짜… 찾아야 해, 그분이 이제부터 내 사부야.”
아이는 서둘러서 바랑을 들고 산길을 뛰어 내려갔다.
폐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키가 이만한 약초꾼 못 보셨소?”
아이는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무조건 잡아서 자신의 팔을 한껏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휴… 냄새!”
“어딜 잡는 게야! 이것 놓아!”
“…….”
하나같이 꼬질꼬질한 거지 아이의 손을 뿌리치며 인상을 쓰고 지나갈 뿐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 연천을 찾아서 돌아다니던 아이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들어 죽겠네, 아… 배고파…….”
아이는 아랫입술을 비틀어 내밀며, 앞머리를 훅하고 불었다.
상당히 껄렁한 모양이었다.
꾸르르르르―
아이의 뱃속에서 정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남들보다 조금 크기는 했지만.
아이는 배를 쓱쓱 문지르며 가까운 객잔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인상을 팍 쓰며 나왔다.
“적선할 거 없으니깐, 썩 꺼져!”
“걱정하지 마시오, 내 지불할 돈이 있소.”
아이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늙은이처럼 말하고는 자연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점소이가 눈을 끔뻑이며,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무림에서 점소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별의별 놈이 다 있는 곳이 무림이니.
점소이 경력이 무려 오 년이나 되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쥐뿔도 없는 게 뻔히 보이는데 노인처럼 말하며 여유로운 거지라……. 정말 쥐뿔도 없으면서 무전취식을 하려는 놈이거나,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놈 둘 중 하나인데…….’
저 쬐끄만 거지 놈이 어느 쪽인지 영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점소이는 일단 거지 아이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