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메마른 흙바닥을 녹여버릴 듯 들끓어대는, 태양이 만들어낸 아지랑이가 대지 위를 꾸물거리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흔들었다.
공기의 흐름조차 멈춘 것처럼 바람 한 점도 일지 않는 이곳은 숨 막히는 열기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시커먼 잎사귀도, 시뻘건 토양도, 파란 하늘조차도…….
허옇게 마른 입 안에 흙 부스러기가 버석거리고, 잘려 나간 식물의 역한 풀 비린내가 코끝에서 진동을 하고, 극성스러운 날벌레가 귓가에서 시끄럽게 윙윙대어도 그의 굳은 표정에는 작은 변화도 없었다.
그저 홀로 만든 덩그런 무덤을 우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검붉은 흙을 그대로 드러내 놓은 봉분이 아픈 스승이라도 되는 듯,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늘 하나 없는 무덤 앞에서 묵묵히 절을 올렸다.
자신이 만든 묘지에 쓸쓸히 절을 하는 백연천에게 세상에 홀로 남은 두려움과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 * *
며칠 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장년인이 연천의 어깨를 토닥였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 같던 그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으려고 그러느냐? 그만하고 내려가자.”
침중한 얼굴의 장년인이 연천을 타일렀다.
장년인이 오기 전까지 산소 옆에서 지낸 연천의 낯빛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산소 옆에서 며칠이나 넋을 놓고 있었으니, 병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장년인은 무덤 아래,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낡은 초막으로 연천을 끌고 내려왔다.
먹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 그에게 억지로 죽과 물을 먹였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초상을 한 번 더 치러야 할 판이었기에…….
장년인은 자신의 의형이 며칠 전 영면에 든 것을 이제야 알았다.
요 근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기에, 죽을 싸 들고 올라왔던 것이다.
“어찌 내게 연락도 하지 않았단 말이냐?”
장년인의 말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연천을 위로해야지 하면서도, 의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프도록 안타까웠다.
그 마음을 풀어낼 사람이 연천뿐이었다.
“스승님께서… 숙부님께는 이미 유언을 하셨으니 힘들게 부를 필요가 없다고 하시어…….”
기운 없는 연천의 말끝이 흐렸다.
“그래도 네가 연락을 줄 수도 있지 않았느냐? 쯧쯧쯧…….”
장년인은 답답함에 혀를 찼다.
연천은 스승을 극진히 모셨다.
그의 말이라면 작은 것도 거스르지 않고 따랐다.
스승이 죽으라고 했다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끊을 아이였다.
착하고 순했지만, 과하게 우직한 면이 있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너까지 큰일이 날 뻔했어!! 어찌 이러고 있었던 게야?”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지만, 상황이 언짢고 못마땅해 짜증이 튀어나왔다.
스승 하나만 보고 산 아이가 스승을 잃었다.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를 보니 속이 상했다.
“…….”
연천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다, 나도 속이 상해 그런 게지…….”
풀 죽은 연천의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알고 있습니다.”
연천이 숙부의 마음을 헤아려 답했다.
역정을 내는 마음을 이해하니 자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 연천이었다.
스승의 말을 지나치도록 우직하게 지킨다는 점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니, 그 고지식함 덕분에 나이에 맞지 않는 무공까지 갖추었으니 그것도 나무랄 것이 못 되는 것인가.
“형님께서 네게 삼년상을 치르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장년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연천의 대답에 장년인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천이 끝까지 스승의 무덤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피울까 봐 걱정을 했던 것이다.
“이곳에 어찌 혼자 있겠느냐? 나와 함께 가자.”
장년인의 눈이 초막 밖으로 향했다.
흙이 판판하게 다져진 너른 앞마당을 제외하고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 한가운데 지어진 이 초막에 연천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
연천은 장년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어찌 대답이 없는 게야?”
장년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연천을 다그쳤다.
연천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하고 진중했다.
그가 크는 것을 보아온 장년인은 그것이 자라 온 환경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곳에서 삶을 초탈한 스승과 단둘만 살았으니, 어린 것이 저리 나이에 맞지 않게 자랐다고.
연천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녕…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내내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것 또한 형님의 유언이다. 너는 형님의 제자일 뿐이다. 형님의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네 인생을 살라지 않으시더냐!”
장년인이 과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은 제게 어버이셨습니다. 부모의 과거가 어찌 자식과 상관이 없다 하십니까? 저는 스승님에 대해서 알아야겠습니다.”
연천의 우직한 표정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어허!! 네 스승의 유지를 어길 셈이냐?”
장년인이 엄격한 얼굴로 나무랐다.
의형이 여러 번 당부했던 것이었다.
스승의 말이라면 갑갑하도록, 곧이곧대로 따르는 연천이 저것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
연천이 입을 다물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만 내려가자.”
장년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숙부님!”
연천의 묵직한 부름에 장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고수한 적도, 고집을 부려본 적도 없는 아이가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끝까지 그 뜻을 꺾지 않는다면 이야기 해 주어야 할까?
의형이 남긴 단 하나의 유언을 어겨야 하는 건가.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장년인은 자신의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무림에 나가보고 싶습니다.”
연천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전혀 생각지 못한 연천의 말에 장년인의 말문이 막혔다.
“제 나이 이제 열아홉입니다. 거의 평생을 사부님과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 사는지, 무림이라는 곳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습니다.”
말수가 적은 연천이 제법 길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연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연천은 인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그저 무공, 그것 하나만을 배우며 살았다.
나이가 열아홉이나 되었지만, 무공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백지와 같다 할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몇 년 무림행을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리하여라, 얼마나 다녀볼 생각이냐?”
장년인은 연천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직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천이 반듯하게 대답했다.
“하긴… 무림행이라는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몇 년 돌아보고 내게 오너라. 내, 너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장년인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나는 네 몸이 걱정이다. 이리 몸이 상해서 되겠느냐?”
연천은 며칠 사이 살이 내리고 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나와 함께 내려가서 몸을 추스른 후에 나서도록 하여라.”
장년인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연천을 혼자 세상 밖에 내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스승님의 짐 몇 가지만 정리하고, 곧 떠나고 싶습니다.”
연천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리 빨리?”
장년인은 연천을 바라보았다.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결심이 선 연천을 만류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싶었다.
“…….”
말 없는 연천의 얼굴은 장년인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장년인이 품을 뒤져 자신의 전낭을 내밀었다.
“미리 알았으면 준비를 하는 건데… 지금 가진 것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아닙니다, 숙부님.”
연천이 손사래 쳤다.
“어허! 형님께서 그렇게도 내 도움을 받지 않겠다 하여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상했는지 아느냐?”
장년인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십수 년 동안 의형에게 쌓인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묵묵한 연천의 얼굴을 보고 잔뜩 쌓인 뒷말을 삼켰다.
“숙부님 덕분에 이곳에서 산 것 아닙니까? 그 은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너는 내 의형의 제자다! 내게는 조카와 같아. 숙부가 조카에게 이런 것도 못 해준단 말이냐! 시끄럽다! 긴말 말고 이것은 챙기도록 해라,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런다. 어딜 가더라도 돈은 필요한 게야!”
장년인이 역정을 내었다.
“네, 숙부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연천이 고개 숙여 답하고 전낭을 받아 챙겼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나를 찾아오거라, 내가 사천당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압니다.”
“그래, 몸을 잘 챙기도록 해라.”
“네, 숙부님.”
“무슨 일이 없어도 사천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꼭 들르거라, 네가 잘 있는걸 봐야 나도 안심하지 않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연천이 일어서서 그의 숙부에게 절을 올렸다.
장년인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을 내려갔다.
자신에게 임종도 지키지 못하게 한 의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도 자신을 밀어내던 덤덤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가가 젖어 들었다.
* * *
무림행을 나서는 연천에게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속옷과 자잘한 물건이 든 작은 바랑과 스승님이 남겨준, 검 한 자루가 고작이었다.
연천은 어색하게 산을 내려갔다.
산 아래의 마을은 가끔 다녀본 적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의복을 입은 사람들… 사내도 여인도, 아이도 노인도 있었다.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건만, 수많은 사람을 보는 것이 껄끄럽고 낯설어 다시 산으로 오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복받쳤다.
그럴 때면 스승님이 남긴 검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리하면 열없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몇 날을 돌아다니다 보니 무림행에도 요령이 생기긴 했다.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다니고, 그것에 지치면 산을 통해 다음 마을로 이동하곤 했다
연천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숙부님도 스승님도 말렸지만, 연천은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했다.
그래서 알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