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7장 (198/199)

 # 197

197.

이 밤의 광경은 세 부류로 나누어 진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오유태의 거처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는 약 만여 명의 정파인들이었다. 거기엔 구대문파의 정예들, 오대세가의 고수들을 비롯해 작은 군소방파들이 모여 있었다.

또 하나는 정파인들로부터 남쪽 방향으로 약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일이관지 소하천과 그의 수종들의 천막이 자리했다. 이들이 바로 정파와 사파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일이관지 소하천은 내일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이관지 소하천의 천막에서 정파의 반대되는 방향으로 혈곡을 위시한 사파의 무리들이 약 만여 명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저 만 명이 모여 있다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것과 실제 만 명이 운집해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 자리에 함께 있는다는 건 너무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도합 2만여 명이 뿜어내는 숨결은 어두운 곤륜에 더욱 긴장감을 배가시켰고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어느 순간에 땅을 갈라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두 세력은 각기 만여 명이 한 덩이로 변한 듯 보였다.

정파의 세력이 하나가 된 용과 사파의 세력이 하나가 된 커다란 호랑이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처럼 둘의 기세는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 중에는 비급에 대한 욕망없이 그저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은 이 밤이 흐르는 것이 한없이 빠르게 느껴져 조급하기만 했다.

재앙을 감지하는 곤충이나 벌레들처럼 그들은 대살육이 이 곤륜에서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그저 두려움에 의해 생겨난 망상이 아니었다. 천보갑이 열리면 누구도 양보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천선부를 위시한 그 어느 누구도 신공이 적힌 비급이 혈곡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무림 사상 가장 큰 정사대전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늘 보는 달빛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 오래도록 달을 바라보았다.

인시 초(寅時初:새벽 3시경).

오유태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표영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잠이 오지 않나요?”

오유태가 표영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개방 방주 표영에게 인간적으로 감복한 상태였다.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차라리 이 밤이 이렇게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군요. 내일이란 것이 없도록 말입니다.”

오유태는 정사대란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길로 와버린 것이다.

“잠깐 걸을까요?”

표영의 말에 오유태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그나마 그중에서도 약간 거리가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표영이 자리를 잡자 그 옆으로 오유태가 앉았다. 잠시 말이 없던 표영은 침묵을 깨고 여느 때와는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인께서는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렇지요.”

오유태의 목소리는 스치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곧바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 못난 놈은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표영은 그의 말속에서 ‘돌아가시기 전 용서를 빌었어야 했습니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비원과 그의 아들 오유태는 그렇게 다른 세상에 놓여 있게 된 이 시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방주님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표영은 그 부탁에 대한 이야기부터는 전음을 사용했다.

“내일 천보갑이 열린 후에 비무가 있게 될 것은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우리는 비무에서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반드시 이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게 비무의 결과가 우리 측의 승리로 결정이 나면 비급을 없애 버렸으면 합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대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미 금환신공은 천선부에 원본이 있고 새롭게 창안한 것이라면, 사실 익힐 마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뒤의 분쟁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전음을 듣는 오유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일로 인해 방주께서 위험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제게 있어선 어떤 대단한 신공이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본 것으로 족하답니다. 저는 현재의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이미 큰 형님께서도 천선부를 잘 이끌고 계시니 제가 돌아갈 이유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원망을 사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표영의 각오는 확고했다.

“분명 그 자리에서 즉시 소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면 문제는 더욱 커질 겁니다. 하지만 비급이 사라지게 되면 그때부터 목표는 비급을 없애 버린 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유태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아무래도 비급을 파기하는 것이 참혹한 비극을 초래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 분명했다.

‘걸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하고도 신비롭구나. 도대체 방주의 삶이 어떠하기에…….’

지금 이 순간 초라한 외모의 표영은 거대한 산처럼 위대해 보였다.

“부디 방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빌겠습니다.”

표영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옅게 번졌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내일 행동에 옮길 때까지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씀해선 안 됩니다. 정파인들 중에서도 신공을 탐내는 자들이 있어 비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거기까지 대화를 나눈 후 아무 말도 없이 앞만 응시했다.

운명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정오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곤륜에 감도는 욕망에 찬 공기들은 그런 맑은 하늘과 기묘한 어색함으로 맞물려 있었다.

특히나 욕망에 찌든 영혼들은 더욱 그러했는데 어두운 구석에서 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갑작스레 너무도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춰 당혹감에 사로잡히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땅을 딛고 있지만 어설프게 몸이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이랄 수 있었다.

이런 날은 먹구름이 짙게 끼어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날은 비라도 실컷 퍼부어준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야속하게도 햇살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에서 강렬하게 지상으로 쏟아졌다.

지난밤의 긴장감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어느 누구도 눈을 비비거나 잠이 모자라다며 투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오히려 안광은 더욱 예리하게 번뜩거렸고 눈동자들은 곤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겠노라는 다짐과 각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해가 정확히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정, 사파 2만여 명의 고수들의 시선은 중앙에 위치한 일이관지 소하천에게로 향했다.

비급의 개봉.

정, 사파 대표 오 대 오의 비무.

그리고… 끝.

하지만 그것이 과연 끝일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이관지 소하천은 열 명의 수하들을 뒤로한 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 각기 천보갑과 열쇠를 가지고 다섯 분씩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웅후한 내력이 가득 담긴 맑은 음성이었다. 산을 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묘하게도 음성은 모두의 귓가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정파 쪽에선 개방의 방주 표영과 천선부주 오경운, 그리고 무당파 장문 운학, 화산파 장문 양천일, 곤륜파 장문 뇌추풍이 나왔고 사파 쪽에선 혈곡의 곡주 단천우와 그 뒤로 네 명의 장로가 뒤따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들인지라 천천히 걸어오는 듯 보였으나 어느새 몸은 가까이 이르러 있었다. 소하천으로부터 약 5장(16미터)여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모두는 걸음을 멈췄다.

소하천이 두 수하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수하가 각기 정파와 사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파 쪽에선 천선부주 오경운이 천보갑의 열쇠를 건네주었고 사파 쪽에선 단천우가 살기등등한 위협적인 얼굴로 천보갑을 건네주었다.

이미 중앙 쪽에는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두 수하는 각기 천보갑과 열쇠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소하천의 입이 열렸다.

“이제부터 천보갑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맺은 약속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천보갑을 열어 비급을 확인한 후 정식으로 비무를 이루어 승리하는 쪽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손을 쓰는 이가 있다면 그와 그 무리는 무림의 공적으로 모두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비무가 끝난 이후에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하천의 선언에 4만 개의 눈동자가 더욱 강렬하게 천보갑에 쏟아졌다. 이제 곤륜의 공기는 멈춰 버린 듯했고 어느 누구도 크게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소하천이 비취옥 같은 열쇠를 천보갑의 열쇠 구멍에 들이댔다.

스르륵.

‘오호… 이럴 수가……!’

소하천은 이 신기한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열쇠를 그저 천보갑의 구멍에 살짝 대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쪽에서 강렬하게 빨아들여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 변화가 일어났다. 열쇠 구멍으로부터 비취빛 광채가 뿌옇게 일더니 바깥으로 아지랑이같이 피어났다.

철컥.

귀영대의 대주 악풍과 백미마군이 그토록 열어보고자 했음에도 열지 못했던 천보갑이 드디어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것이다.

소하천은 진중한 표정으로 천보갑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잘 접힌 서신 한 장이 있었고 그 밑으로 비급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소하천은 서신을 들어 읽어 나갔고 그의 얼굴은 서서히 경탄스런 기색으로 물들었다.

‘보물이 바로 이것이었나……!’

다음으로 그는 서신 아래 있던 비급의 이름을 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곤진인, 그대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다시 나를 놀라게 하는구려.’

그때였다.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단천우와 혈곡의 네 장로가 일이관지 소하천을 덮쳤다. 고작 5장여 떨어진 거리였기에 이미 뭔가 움직였다 싶은 순간 단천우는 매의 발톱같이 손을 세우고 소하천으로부터 천보갑과 서신을 낚아챘다. 소하천이 어떻게 방비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와 더불어 정파 쪽 인사인 표영 등이 신형을 날려봤지만 어느덧 혈곡의 네 장로는 소하천과 그의 수하 세 명을 인질로 잡고 위협하고 있어 더 이상 어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냐!”

“무림의 공적이 되고 싶은 게요!”

“일대종사다운 면모를 갖추시오!”

큰 호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급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정, 사파 2만여 고수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이 좁혀들었다. 이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든다면 자칫 혼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틀림없이 대살육전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표영은 어찌 되었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호흡 길게 숨을 들이쉬고 비천신공을 운용하며 천음조화의 경(驚) 자결을 따라 큰 음성을 내뱉었다.

“모두 멈추시오!”

그 음성엔 내공이 가득 넘쳐 나 다가오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온몸의 피부가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정도로 위력적인 소리였다. 가까이에 있던 정, 사파 고수들조차 잠시 몸이 한차례 흔들거릴 정도였다.

그로 인해 다행히 매섭게 달려들던 기세는 한풀 꺾였고 무리들은 일반적인 걸음걸이로 가까이 다가섰다. 일단 난전은 피하게 된 것이다.

그때 인질이 돼버린 일이관지 소하천이 고요한 음색으로 단천우를 향해 말했다.

“단 곡주는 절대로 그 비급을 익힐 수가 없소이다. 지금 당장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시오.”

“하하하! 세상천지에 내가 익힐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단천우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비급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자전록(子傳錄)이라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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