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5장 (196/199)

 # 195

195.

‘으음… 이번에는 무사히 일을 마치도록 하자.’

구암은 살짝 소매를 걷어 지난번 싸움에서 입은 상처 자국을 살펴봤다. 팔꿈치 아래 검지손가락만한 길이로 칼에 맞은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그의 뇌리로 두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그 밤에 곤륜산 서쪽에 위치한 사갈파가 기습을 해왔었다. 하지만 곤륜사인방이 누구던가. 그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불 같은 힘을 발휘해 끝내 격퇴시켰다. 그리고 받은 선물이 바로 팔꿈치 아래쪽의 상처와 사타구니 바로 밑 허벅지에 톱으로 긁혀 살이 파헤쳐진 상처였다. 톱이 제대로 파고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잘못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톱을 무기로 쓰는 놈의 갈빗대를 세 개 부러뜨린 것으로 끝냈지만 그 후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약하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모두 아물었지만 그날 밤은 참으로 위험천만이었다.

‘그때처럼 오늘도 난 반드시 승리한다!’

구암은 그렇게 다짐하고 이 장여 떨어진 곳에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제 12살인 막여성을 눈짓으로 불렀다.

막여성은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났고 특히 상황을 표현함에 있어서 탁월했다. 그래서 이런 격전을 벌이기 전 망을 보거나 적의 동태를 파악할 때는 꼭 필요한 녀석이었다. 또한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또 다른 이점이 있었는데 망을 보다가 걸려도 전혀 건달같이 보이지 않아 그냥 넘어갈 소지가 많다는 것이었다.

눈짓을 받은 막여성이 마지못해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적을 찾아갔다.

‘헉! 이건 뭐지? 아무도 없잖아.’

그는 여기저기 자세히 살핀 후 다시 고개를 내리고 구암에게 본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구암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게 그러니까… 적이 안 보입니다.”

“뭣이라?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까 제 말씀은 양아치나 건달들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대체로 대장님 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야 양아치들이잖습니까?”

“그렇지.”

상당히 불량스런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구암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근데 다 거지들뿐입니다. 그것도 진짜 거지라굽쇼. 거기다 개까지 한 마리 있는걸요.”

“거지라고?”

거지라는 말에 잔뜩 긴장했던 구암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정말이냐? 하하, 거지 녀석들이 버르장머리없이 나타났더란 말이지.”

그는 의기양양하게 뇌까렸다. 하지만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터라 조심스럽게 바위 위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허허, 정말이네.’

그의 눈에 저만치 거지 다섯 명이 뭐라고 주절대는 것이 보였다. 거지 세 명이 바닥에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호리병을 주렁주렁 세 개씩이나 매단 젊은 거지가 아직 어린 거지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누워 있던 거지들 중 하나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것이 보였고 그러자 여러 거지들이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다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여 바위 밑으로 몸을 감췄다.

‘저것들이 반갑다고 손짓하는 것에 넘어가면 나중에 후려팰 때 마음이 약해지게 되지. 모질어야 해.’

구암이 사인방의 아우들에게 살펴보라고 하자 그들도 모두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이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쳇, 싱거운걸.’

‘김빠지긴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몸은 풀어야겠지. 거지 놈들 잘못 걸렸다.’

오유태의 거처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경비가 이루어졌다. 약속한 날이 되기 전에 열쇠를 탈취하려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각 문파 별로 그 위치를 정했는데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하고 고수가 제일 많은 곳은 개방이었기에 개방은 일단 외벽 전체와 중앙 등을 분할해서 맡아 경계를 섰다. 핵심이 되는 집 주위는 장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가히 철옹성을 이루고 있었다.

바깥쪽 수비를 맡고 있는 개방 분타주 당문천이 옆에서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운 묘진에게 말했다.

“이보게, 저기 저놈들 설마 이곳으로 오는 것은 아니겠지?”

묘진이 눈을 들어 50여 명 정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놀러 나온 녀석들인가 본데요.”

같은 분타주여도 당문천의 나이가 십여 살 더 많은 까닭에 묘진은 존대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 명성이 자자한 당문의 문주가 아니었던가.

“으음… 그렇지, 발걸음을 봐선 말야.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좋겠군.”

두 사람이 본 것은 바로 곤륜사인방과 그 패거리들이었다. 두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나름대로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때에 표영이 제갈호와 지문환, 그리고 제자 혁성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어… 아무 일 없겠지?”

당문천과 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표영에게 예를 취하며 답했다.

“저쪽에 마을 청년들이 단합대회를 하러 온 건지 바위 뒤편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래?”

표영이 그쪽을 바라보자 바위틈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이제 12세인 소년 막여성의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인 걸 확인하고 표영이 무슨 대단한 걱정을 가진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묘진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방주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이라… 그렇지. 고민이 있다마다.”

표영의 뒤에 있던 제갈호와 지문환은 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듯 입을 가렸고 혁성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부님! 정말 그러실 겁니까? 여기까지 와서 또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밉습니까? 정말 말로만 듣던 작은아버지를 만나고 또 동생을 만난 이 기쁜 자리에서까지 수련을 하라니요! 너무하시잖습니까? 게다가 이곳엔 정파의 고수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의 눈이 모두 지켜보고 있잖습니까!”

“하하, 그래서 내가 이쪽으로 널 데리고 온 것 아니냐. 이 사부가 적당한 놈들을 고를 테니 너는 가만히 구경만 해라.”

대화가 이쯤 되자 당문천이나 묘진도 무슨 고민인지 알아차리고 약간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혁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까 말씀하셨던 늑대를 잡아오겠다는 그 이야기를 하실 거라면 그건 안 돼요. 이곳을 이탈하면 안 된다고 사부님께서 먼저 이야길 하셨잖습니까?”

바로 표영의 고민은 혁성의 말대로 늑대를 불러오긴 와야겠는데 그 여건이 허락칠 않아 난처한 상태였다.

대화가 그쯤 되었을 때 바위 뒤에 있던 구암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며 바라보았고 표영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표영이 굳이 견치지겁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을 즈음에 곤륜사인방 패거리들이 바위에서 솟구치듯이 올라오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봐, 거기 거지 놈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네놈들이 깝죽거리는 것이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냐?”

“네깟 놈들 때문에 강호에 안녕과 질서가 이루어지질 않는 거야. 응, 이 죽일 놈들아!”

“오늘 혼구녕을 내주겠다!”

그런 외침에 표영을 비롯해 모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심난하던 혁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들아! 썩 꺼지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날뛰는 거냐! 동네 창피하니까 어서 썩 꺼져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표영이 혁성의 뒤통수를 갈겼다.

따악!

“어디서 큰소리냐! 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난리를 치는 거냐!”

혁성을 나무라는 소리에 곤륜사인방 패거리들은 분통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에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생각있는 놈이 있었군.’

혁성을 뒤로 제치고 표영이 구암 쪽을 보고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파냐?”

곁에 있던 제갈호나 지문환, 그리고 당문천과 묘진은 방주가 개입한 이상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으로 여유롭게 상황을 바라보았다. 별 대수롭지도 않는 건달들이 무슨 파든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도 물어본 데는 분명 다른 뜻이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구암이 이젠 좀 말이 통하는 놈이 나왔구나라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답했다.

“우리는 그 유명한 곤륜사인방이다. 네놈들은? 으음, 물어보나마나 거지파라고 하겠지? 크하하하!”

구암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웃긴지 뒤쪽을 돌아보며 아우들과 수하들을 보고 마음껏 웃어 젖혔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묘진과 당문천은 민망한 건지 아니면 따분한 건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를 하고 있었고 제갈호와 지문환은 실소를 머금었다.

“우리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았느냐?”

표영이 이마에 손가락 하나를 꽂고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생각하는 척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뭣이라,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냐?”

표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구암이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넷째야, 어서 나와서 이놈들에게 시범을 보여주도록 해라!”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가 원하던 상황이었다. 그냥 무턱대고 싸우기보단 시범을 보여 상대를 놀라게 한 후 제압하는 것이다. 일이 잘 풀리게 되면 그냥 거저먹게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하지 않았던가. 승리해도 상처받은 영광을 안고 싶지 않았다.

넷째 엽상이 튀어나와 먼저 몸을 풀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하고 또 두 손을 깍지 낀 채 앞으로 쭉 뻗었다가 모았다가 하면서 몸의 근육을 풀었다.

‘무지하게 진지하네.’

‘대관절 무엇을 보여주려고 저 지랄을 떠는 걸까나.’

‘허허, 거참…….’

표영이 워낙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그저 속으로만 궁시렁거릴 뿐이었다.

긴장되는 순간 엽상은 몸을 다 풀었는지 긴 호흡으로 마무리하고선 갑작스레 몸을 공중으로 붕 띄웠다. 그리곤 공중에서 두 다리를 옆으로 쫙 벌리고 그 자세 그대로 지면에 착지했다.

찌익-

바닥에 닿으면서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엽상은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일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읍……!”

그는 혼신의 힘으로 다리를 일자로 뻗으려고 노력했고 아직 지면과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간격이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를 악물고 다시 체중을 실어 몸을 내리자 다리가 확 찢어지며 온전히 일자를 이루었다. 참으로 지켜보기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혁성은 사부 표영과 -놀란 듯 입까지 벌이고 있었다- 다리를 찢고 있는 엽상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엽상은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고 그 뒤로 패거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야, 역시 대단하다, 대단해.”

구암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칭찬과 격려를 보냈고 표영도 박수를 보내주었다.

“오호, 대단하군.”

표영이 껄껄 웃으며 박수를 보내자 수하들도 일제히 박수를 쳤다. 진짜 웃긴 놈들이었다. 천보갑으로 인해 긴장이 감도는 곤륜에서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 깔보는 것을 인식했음인가, 구암은 바로 셋째를 불렀다.

“두위종, 네가 확실히 보여줘라.”

“네, 형님.”

셋째 두위종은 미리 정해놓은 듯 건달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고 건달 다섯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일렬로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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