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
오유태는 형으로부터 아버지의 부음에 대해 듣고 오열했다.
왜 진작 용서를 빌지 못했나.
왜 나는 자존심만 내세웠단 말인가.
왜 다시 한 번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지 못했던가.
아마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다 슬픈 마음으로 마지막 호흡을 들이키셨을 것이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오유태는 천선부가 위치한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그 옆에는 어느새 다가온 그의 아내 연설하와 이제 철이 들기 시작한 아들 후가 함께 큰절을 올렸다.
그렇게 세 사람은 숭고한 의식으로 뒤늦은 인사를 드리고 무릎 꿇은 자세로 말했다.
“아버지, 부족한 이 못난 놈이 가정을 꾸리고 처와 아들과 함께 인사 올립니다. 부디 저 먼 곳에서라도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정파 인사들의 마음에도 애틋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끈이라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그 다음 오유태는 천보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천선부에서 쫓겨나면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천보갑의 열쇠였다니.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었다. 그저 단순히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그나마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마지막 유물로써 자신에게 보내질 것을 생각지 못한 오유태로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풀어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오유태는 이 천보갑에 대한 미련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큰형 오경운과 독대한 자리에서 그가 진솔하게 말했다.
“형님, 아버지께서 제게 천보갑을 보내신 것은 그만큼 저를 아끼셨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단한 것이 들어 있다면 분명 제가 그것을 들고 다시 천선부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을 두려 하심이지 결코 제게 천선부를 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저 저로선 아버지께서 저를 잊지 않으셨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유태의 진솔한 마음만큼이나 오경운의 마음에도 전혀 악의가 없었다.
“아니야, 네가 천선부에 있을 때 이미 아버지는 널 다음 부주로 내재하신 상태였었다. 이번에 천보갑을 보내신 데는 너를 다시 천선부로 불러들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최고의 무공으로 훌륭한 부주가 되길 바라셨던 것일 게다. 너는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저버려선 안 될 것이다.”
이건 오경운의 진심이었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오유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휴∼ 그건 형님께서 아버지를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무엇이 말이냐?”
“아버지께서는 천하제일고수라 칭함을 받았고 정파의 선봉장이셨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 입으로 두말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런 아버지시기에 저를 후일을 위해 안배해 두시고 형님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약한 소리 하시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매우 서운해하실 겁니다.”
그 말이 맞는 듯했으나 오경운의 입에선 길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그 무엇도 확인된 것은 없다. 천보갑이 열리게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지리라.
제18장 침입자들
정도무림맹의 결정에 따라 전국 각지엔 대대적으로 천보갑에 대한 방이 나붙었다.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소문으로 떠돌던 천보갑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터였던지라 곤륜에서 모여 천보갑을 개봉한다는 방의 내용은 그들의 온몸과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세상을 놀라게 할 보물을 구경하기 위해 짐을 꾸려 곤륜으로, 곤륜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이 다 각기 다르고 지문의 꺾이고 휜 방향이 다 다르듯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다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믿기엔 이미 강호엔 수많은 소문들이 떠돌았었고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짓 정보들이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몇 가지 헛소문만 살펴봐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천보갑을 차지하려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십만 명을 넘기고 있다.
-천보갑이 낙양에 나타났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고수들이 나타나 혈투를 벌였다. 피투성이로 승리를 쟁취하고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천보갑이 아니라 천모갑이라는 것이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용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천보갑을 빼앗아 달아났다.
-천보갑은 그 안에 비급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쪽 면에 무공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 외에도 수없이 많은 거짓 소문들이 퍼졌던 터라 거기에 질린 사람들은 이런 무림맹의 벽보도 거짓이라고 믿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주루에서는 천보갑을 안주 삼아 씹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어떤 미친놈이 심심했던 게야. 암.”
“흥, 그렇지. 이런 것들은 다 허세라구. 시간도 많지. 이런 장난이나 저지르고 다니고 말야.”
“그러게 말이네. 하여튼 요즘 것들은 할 일도 없단 말이여.”
“곤륜에 또 떨거지들만 잔뜩 모여들겠군.”
“크크, 지난번 낙양의 사건을 생각해 보게. 그때 결과가 어땠느냔 말이네. 천모갑이었잖아. 이번엔 아마 천부갑이라고 적혀 있을걸? 클클클.”
“쯔쯧, 이번에도 괜한 시비가 붙어 몇 놈이나 죽을는지…….”
“그러게 말이네. 에고, 저기 저놈들도 곤륜으로 가는가 보군.”
주루 이층에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톡 쏘는 술 한잔에 천보갑을 씹으며 그들은 밖을 문득 바라보다가 바쁘게 말을 타고 달려가는 십여 명의 무사들을 발견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혀를 찼다.
“쯔쯧.”
“미친놈들.”
“맞아.”
“하여튼 정신없는 놈들 같으니…….”
서로 맞장구치는 그들은 술을 홀짝거리며 무사들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들은 큰 소리로 모조리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가와 마음엔 곤륜으로 떠나는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넘실댔다.
그들의 달관한 듯한 말투는 그저 곤륜으로 갈 수 없는 자신들의 비루한 처지와 여건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그들도 어찌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차지하지는 못할망정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쩌랴.
인생사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없는 처지가 있는 것이니 그저 술 한 잔에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연신 술을 넘기면서 허세를 부려댔다.
거의 대부분이 이런 마음을 가졌지만 진짜로 믿지 못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주로 믿지 못하는 무리들이 사는 지역은 곤륜산 쪽에 터전을 둔 사람들이었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가 그러한 듯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부근에 있는 명승지나 명산, 혹은 명물들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경향을 띠게 된다.
다른 지역에서는 먼 길을 달려 구경하러 오고 감탄하지만 그곳에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쭉 보아왔던 것이어서 너무 눈에 익숙해져 별반 대단해 보이지 않고 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지 사람들보다도 구경하는 횟수가 적을 때도 있다.
그래서 정작 관광을 하러 갈 때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기 지역 명물보다 훨씬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경을 하고선 ‘오오… 대단한걸’이라고 감탄하며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 관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자주 나타나는데 너무 가까이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면 진정 소중한 존재를 소중하다 여기지 못하고 그저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에 마음을 빼앗길 때도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 하겠다. 이런 이치로 천보갑을 개봉하는 대사건이 곤륜에서 일어난다는 벽보가 나붙게 되자 곤륜산 동쪽 밑 마을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곤륜사인방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들은 곤륜사인방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정작 제대로 부른다면 ‘곤륜의 네 무뢰배 놈들’ 혹은 ‘곤륜의 양아치들’이라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양아치의 ‘양’ 자나 무뢰배의 ‘무’ 자만 꺼내도 난리를 치는 탓에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곤륜사인방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있어 천보갑은 그저 ‘천보갑 따위’라고 불러야 제격인 물건에 불과했다. 이런 헛소문을 곤륜에 퍼뜨린 것은 필시 이곳 건달패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제삼 세력의 개입이라고 판단했다. 그들로서는 결코 자신들의 텃밭을 넘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인방 중 우두머리인 구암이 비분강개한 목소리를 발했다.
“야, 너희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이제 서른일곱 살로 이마에 일자로 길게 흉터 자국을 가지고 있었고 귀가 유난히 작았는데 일반인들의 귀에 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뒤통수를 바라보면 귀가 작아 호인일 것이라 예상되지만 막상 앞에서 바라보면 긴 흉터 자국으로 인해 누가 보더라도 인상은 흉악범 그 자체였다.
그의 특기는 이마에 흉터를 짐작해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건 박치기였다. 몸 상태가 좋을 때는 큰 소하고 머리를 부딪쳐 소를 기절시키기도 할 정도로 놀라운 돌머리라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양아치들 중에서 그의 머리보다 더 센 놈은 없었다.
구암이 얼굴을 찡그리고 말하는 통에 지렁이처럼 흉터가 쭈글쭈글거렸는데 그 이마를 살짝 바라보다가 사인방 중 서열 이위인 둘째 천붕이 말했다.
“정말 큰일입니다, 형님. 이 괴상한 짓거리로 인해 사방의 양아치들이 다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천붕의 말에 서열 삼위인 셋째 두위종도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선 안 됩니다. 우리 곤륜사인방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렴요. 절대 이렇게 좌시해선 안 됩니다요.”
역시 넷째 엽상도 말을 보탰다.
아우들의 열성적인 지지의 말을 듣자 첫째 구암의 양손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좋다. 가서 손 좀 봐주고 오자. 애들을 집합시켜라.”
“알겠습니다.”
곤륜사인방의 결의로 마을엔 비상이 걸리고 어지간한 건달들은 모조리 비상 소집되었다.
힘깨나 쓸 것처럼 보이는 건달로부터 시작해서 비리비리한 놈들, 그리고 이제 십이삼 세 정도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들까지 모조리 불러들인 것이었다.
결의를 다질 때만 하더라도 한주먹에 산악을 부술 것처럼 비분강개했던 그들 곤륜사인방은 한 명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듯 초조한 눈으로 한 명 한 명 인원을 점검했다. 개중엔 집으로 가는 도중 느닷없이 잡혀 ‘너, 힘 좀 쓰겠구나’라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잡혀온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일단 숫자는 많고 봐야 하는 것이다.
“다 모였냐?”
첫째 구암의 말에 절반 정도가 큰 소리로 답했다.
“네, 대장님.”
“목소리가 작다. 다 모였나?”
구암이 이마의 지렁이를 다시 꿈틀대며 말하자 그제야 일제히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일명 지렁이 효과였다.
“네!”
“좋아. 너희들은 아무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 늘 하던 대로 할 것이다. 사실 싸울 필요조차 없다. 간단히 시범만 보이면 놈들은 바지에 오줌을 저리며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니 말이다.”
“맞습니다!”
다시 한 번 큰 대답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곤륜사인방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놈들은 시범만으로 간단히 제압하는 그들이었다. 어찌 보면 무작정 싸우려 하는 무식함을 보이지 않아 이런 비상 소집도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해야 옳았다.
약 50여 명의 인원. 처음에 그들은 마치 군인처럼 간격을 맞춰 뛰어갔다.
척척척척.
맨 앞의 곤륜사인방을 따라 뛰는 모습은 질서 정연해 그것만으로도 보통의 상대라면 기가 죽을 것 같았다. 지나는 길에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럴 땐 인내심을 가지고 무시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저것들, 또 애들 데리고 패싸움하러 가는 거 아냐?”
“하여튼 나잇살 처먹어도 여전해.”
“그게 인생이 낙인 걸 어쩌겠나.”
엄청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못 들은 척하는 대인의 마음을 가져야 했다. 따지며 시비를 붙이기엔 이번 출동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자. 으음…….’
중간 정도쯤 갔을 때는 뛰지 않고 야무지고 씩씩하게 큰 보폭으로 성큼거리며 걸었다. 그 걸음과 기세로만 본다면 강호고수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는 발걸음이라 할 만큼 장엄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대충 이런 열정이 엿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러던 중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수그러들었고 다시 잰걸음으로 변했으며 거의 접근했다 싶을 땐 아예 처음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엉거주춤 숙인 자세로 여러 큰 바위들이 나열된 그 뒤편으로 몸을 숙였다.
곤륜사인방 중 첫째 구암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긴장된 손동작으로 모두 바닥에 엎드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구암은 적들이 약 20여 장(약 66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있음을 얼핏 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