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
“천보갑을 가지고 급히 나오는 바람에 사대비서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특히 근래 들어 사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사대비서를 넣어두는 금고의 열쇠를 다른 곳에 숨겨두는 바람에 전혀 기회를 엿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로선 한시 바삐 천보갑을 곡주님께 바쳐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온 터라…….”
그 대답에 단천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하긴 사대비서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금환신공에 비할 바가 있겠느냐. 됐다.”
머리를 조아린 구세경은 아무도 모르게 만족의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이제 난 혈곡의 십대고수가 되어 강호를 주름잡으리라.’
“너의 공로는 가히 무엇과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겠다. 이제 약속대로 널 혈곡으로 보내 특별 관리를 해주겠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혈곡에 널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물어볼 말이 있다.”
구세경은 마지막이라는 말이 약간 걸렸다. 말의 앞뒤를 보건대 곡주는 혈곡으로 지금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데 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사람처럼 마지막이라고 하는지 불안했다.
‘설마 곡주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천보갑을 열기 위해 악풍은 백미마군을 찾아간 것으로 안다. 아마 시간이 있었다면 백미마군이 천보갑을 열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는데 아쉽기 그지없구나. 너는 그의 수제자로서 천보갑을 열 수 있겠느냐?”
“죄송합니다만 아직 그런 능력은 되지 않습니다.”
실제 구세경은 오는 길에 천보갑을 열어보려 시도해 봤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만 했을 뿐이었다.
단천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그리고 이어 흑면조객 포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구 대협을 데리고 혈곡으로 가라. 깍듯이 모셔야 할 것이다.”
‘헉! 구 대협이라니!’
구세경으로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천하의 혈곡 곡주의 입에서 대협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깍듯이 모시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미 가슴은 진탕될 정도로 흥분되었다.
“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흑면조객 포양은 저승사자같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별호처럼 그가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그날이 제삿날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얼굴일수록 같은 편이라 생각하면 더욱 듬직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아니던가.
포양은 성큼 다가와 구세경 앞에 이르더니 손을 쭉 뻗어 머리를 낚아채서 바닥에 팽개쳤다. 구세경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이런 끔찍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무, 무슨 짓이오?!”
구세경이 놀라 혈곡의 곡주 단천우와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만이 남아 있을 뿐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습들이었다. 다시 흑면조객 포양이 채찍으로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살을 가르는 듯한 통증이 다리에 이어지고 흑면조객 포양은 그렇게 구세경을 끌고 갔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한데 난 구세경이오! 천보갑을 가져온 구세경이란 말이오!”
포양의 입이 싸늘하게 열렸다.
“앞으로 한마디 꺼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겠다.”
“나는 혈곡의 십대고수가 될 몸이란 말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포양은 발걸음을 멈추고 채찍을 풀어 십대고수라는 말에 맞추려고 했음인지 정확히 열 대를 내갈겼다.
살이 뜯기고 피가 튀었다. 구세경은 거의 혼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세상이 어찌 된 것이란 말인가.
“너는 분명 혈곡으로 간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후 포양이 말을 이었다.
“너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게 될 것이다. 그곳은 바로 혈광뇌옥이라는 곳이지. 크하하!”
혈광뇌옥이라면 혈곡에서 가장 잔악한 죄인들을 가두는 지하 6층 아래 둔 뇌옥이었다. 죽음의 땅인 것이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고 땅도 돌았고 구세경의 머리도 돌아버리 것 같았다. 사부를 배반한 대가는 죽는 그날까지 고통받으며 뇌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행운을 맞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결코 행운이 아니었다. 그가 첫 번째 행운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그는 남은 인생을 평안히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욕심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서서히 멀어지는 구세경의 몰골을 보며 단천우는 혀를 찼다.
“미련한 놈, 혈곡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란 말이냐. 혈곡은 결코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크크크크…….”
그는 다시 수하들을 쭉 둘러보며 힘있게 말했다.
“좋다. 이젠 곤륜이다.”
제17장 곤륜으로 모여드는 군웅들
이 못난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훌륭한 무인이었으며
할아버지는 진정 우리를 사랑했다고 말입니다.
앞으로의 삶도 아버지 보시기에 기쁜
가정이 되겠습니다.
- 곤륜에서 오유태
***
곤륜산 동쪽 기슭에 작은 언덕 위로 오유태의 가족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껏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오유태는 그의 아내 연설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끔씩 이렇게 언덕에 올라 하늘을 바라볼 때면 온 세상은 풍요롭게 다가왔다.
그들 뒤로는 이제 열두 살이 된 아들 후가 풀을 만지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부부의 모습과 아들의 모습이 잘 어울려 멀리서 바라본다면 분명 한 폭의 멋진 그림을 연상할 수 있을 듯했다.
오유태의 얼굴은 이미 떠난 건곤진인 오비원의 얼굴을 꼭 닮아 있었다. 오비원의 얼굴에서 주름을 거두고 피부를 젊게 한다면 바로 오유태의 얼굴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몸에서 뿜어나는 기상은 오비원과는 달리 자연인으로서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차이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연설하는 평범함에 현숙함이 깃든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유난히 눈동자가 맑고 투명했다.
한순간 황혼처럼 평온해 보이던 오유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 멀리 보이는 가옥 근처로 십여 명의 강호인이 접근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들 신법의 빠름이 가히 절정에 이르러 있어 보통 무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음…….’
만일 그들이 적이라면, 거기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것이라면 저들의 무공 실력으로 볼 때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휘돌았다. 이곳은 누군가가 -그것도 절정의 고수가- 아무 까닭 없이 지나갈 만한 지형이 아니었다.
‘혹시 천선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천선부였다. 적들이 천선부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삼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생각이 들어 그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천보갑의 열쇠를 확인했다. 어쩌면 이것을 빼앗기 위해 몰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어떤 경우든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손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것 같으니 이곳에서 후와 함께 기다리도록 해.”
오유태는 마음과는 달리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여자의 육감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짧은 말속에서도 무언가 불안함을 발견했다.
“좋지 않은 일인가요?”
“아니, 전혀…….”
오유태가 미소 지으며 걱정을 덜어주고 말을 이었다.
“좋지 않은 일은 아니겠지만 만약 좋지 않은 일이라면 좋은 일로 만들고 올게. 내가 올 때까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이곳에 있도록 해.”
연설하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걸 다 드러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미소로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남편이었다. 그리고 약속을 꼭 지키는 남편이기도 했다.
오유태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신법을 전개해 언덕을 내려갔다. 비록 그가 천선부에서 20여 세가 되었을 즈음 나왔지만 이미 그 당시에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곤륜으로 오고 난 뒤에도 꾸준히 무공 수련을 한 터라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불청객들보다 먼저 거처 가까이에 이르러 불청객들의 신원과 의도를 파악하고자 일단 몸을 은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덧 십여 명의 무림인들은 집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확실합니다.”
“초라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단아한 거처로군요.”
“녀석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귀 기울이던 오유태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 떠올랐다.
‘저 목소리는… 설마…….’
그가 설마 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로 제법 큰 음성이 들렸다.
“유태, 큰형이 왔다! 너는 안에 있느냐?”
이미 목소리를 듣고 설마설마 하던 오유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큰형님!’
확실했다.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큰형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신 것일까?’
오유태는 일단 긴장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진정 형님이십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선부주 오경운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었다. 그들은 곤륜으로 오는 도중에 개방의 힘을 빌어 전국 각지에 천보갑을 개봉하겠노라고 방을 붙여놓았다.
예정된 날짜는 더 남았지만 발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 오유태의 가족들을 그동안은 철저히 보호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금 이 자리에는 십여 명뿐이었지만 사실은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구파일방의 정예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당황스러워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 먼저 대표로 십여 명만 오게 된 것이다.
반가운 얼굴로 대하는 오유태를 오경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잘 있었느냐?”
건곤진인 오비원이 추상같은 명령을 내려 쫓아낸 후 자식으로도 생각지 않겠다고 단언한 말 때문에 같은 형제들 간에도 오유태에 대해 말하는 것이나 혹여 만나러 가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젠 버젓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오경운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사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내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넷째 동생에 대한 작은 질투였다. 원래부터 천선부주의 자리 따윈 관심도 없었던 오경운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가 아니면 안 될 상황이 되어 천선부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은밀히 천보갑을 넷째에게 보내 다른 계획을 세우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동생을 마주 대하고 있자니 오는 동안에 품었던 생각들은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애초부터 그런 생각들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짧은 시간, 말이 오가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로는 수천 마디의 말이 오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