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2장 (193/199)

 # 192

192.

제15장 정파 회의

아버지, 제가 과연 이 자리에 있기를 바라셨나요?

아니면 차마 말을 하지 못하신 건가요?

저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넷째에게 비급 전하는 일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아버지의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 천선부주 오경운

***

천선부의 요청을 받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천하오대세가의 가주들은 천선부로 향했다.

이들은 천선부에서 보내온 연락에 단지 ‘매우 급하고 중대한 일’이라고만 되어 있어 궁금증을 가지고 서둘러 천선부로 향했지만 정작 천선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급하고 중대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버렸다.

그건 바로 천보갑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강호에 퍼져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선부로 향하는 발걸음은 곧 천보갑에 대한 소문이 단지 소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천선부의 봉황관.

정파 대표들이 중요한 것을 논의할 때면 언제나 이곳에서 모였다. 봉황관의 안쪽에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열여섯 명의 정파를 이끄는 핵심 지도자들이 자리했다.

그들의 얼굴은 사태의 심각성만큼이나 진지하고 신중했다.

천선부주 오경운이 인사말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대충 오시는 길에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 여기고 바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영문을 몰라 자세한 내막을 궁금해하던 지도자들은 오경운을 주목했다.

오경운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 아니, 공적인 자리이니 건곤진인으로 칭호하겠습니다. 건곤진인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믿고 아끼던 심복 경천일필 맹공효에게 은밀히 천보갑을 맡기셨습니다. 그런 내용은 심지어 본인조차 모르던 내용이었습니다.”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을 할 때 오경운의 음성은 조금은 낙담한 듯 가라앉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천선부주가 되었다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일이-그것도 천보갑과 비급에 관련된-암암리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혹시 자신이 부주의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법했던 것이다.

“맹공효가 할 일은 천보갑을 곤륜에 있는 넷째 오유태에게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본인으로선 천보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추측하기론 금환신공의 사본이나 새롭게 창안하신 무공 비급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앞에 놓인 잔으로 목을 축인 후 오경운이 말을 이었다.

“공효는 제게 여행을 간다고 말하고 부인 진몽향과 함께 곤륜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한 달 뒤쯤 공효는 고문산 절벽에서 떨어졌고 그는 죽기 직전에 혼금부 사람들에게 천보갑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속에 진인의 보물이 담겨 있다’고 했다 합니다.”

오경운의 말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천선부에서 사실 확인차 사람을 보내 혼금부 사람들을 만난 내용과 이미 그때 최초 목격자가 실종되었다는 것, 그리고 진몽향의 행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마도 최초 목격자인 막포라는 이의 실종이 바로 강호를 휘도는 소문의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이 내용을 들으시고 의문이 나시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화산파 장문인 양천일이 입을 열었다.

“천보갑을 탈취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강호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충 어떤 곳인지 짐작하고 계신 곳은 없으십니까?”

오경운이 답했다.

“물론 유력한 곳으로 혈곡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확한 증거가 없어 다그칠 수 없을 뿐이지 거의 혈곡이라고 단정 지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곤륜으로 가게 되면 천보갑을 빼앗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천보갑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곤륜에 있는 넷째 동생의 목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무슨 수단을 강구한다고 해도 열 수 없답니다.”

“천선부에도 열쇠가 있지 않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원래 열쇠는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천선부에 있고 또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넷째 동생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건곤진인께서 돌아가시면서 열쇠의 행방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저희는 묻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니 현재로써는 오직 곤륜산에 있는 넷째에게만 열쇠가 있는 셈입니다.”

곤륜파의 장문인 뇌추풍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한시 바삐 곤륜에서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가만히 지켜보던 표영이 입을 열었다.

“현재로썬 강호에 떠도는 소문으로 인해 헛되이 분란이 일고 가짜 천보갑이 나도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도 함께 처리해야만 합니다.”

옳은 말이었다. 실제 점점 소문은 덩어리가 커져 본래 천보갑의 진실보다 더욱 신비롭고 더욱 가공할 만한 것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당파의 장문인 운학 도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방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으음, 그런데 과연 그들을 어찌 납득시키는 것이 좋겠소?”

“일단 소문을 일거에 잠재우고 강호의 분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오경운을 비롯해 모두가 침음성을 흘렸고 표영이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두 가지 경우가 다 위험 부담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곤륜에서 은밀히 천보갑의 열쇠를 노리는 이들과 격돌한다면 천보갑을 찾아올 수는 있겠으나 강호에 뻗어 나간 소문은 쉽사리 잠재우기 힘들 겁니다. 또 한편 공개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일을 처리한다면 일거에 강호를 평온케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정파와 사파로 힘이 나뉘어 자칫 정사대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오경운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느 것도 쉽게 선택하기 힘들구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표영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공개적으로 할 경우 대혼전을 피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된다면 어쩌면 수월하게 일이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

모두가 시선으로 물어오자 표영이 다시 곧바로 대답했다.

“먼저 정파나 사파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인정되는 이를 찾아 그로 주재토록 해야 합니다. 일단 상대는 천보갑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열쇠가 있으니 그것을 열기 위해선 정과 사에 치우치지 않는 이가 중심을 잡고 천보갑을 개봉해야 합니다. 그 뒤에 각기 다섯 명씩 대결할 사람들을 뽑아 그들의 승부로 결정짓도록 하는 겁니다. 모든 무림인들이 모인 자리인만큼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리라 믿습니다.”

표영의 말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중임을 맡을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혈곡에서도 인정할 만한 사람이어야 되지 않습니까?”

점창파의 장문인 장영후였다.

“그런 분이 있긴 있지요.”

오경운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굽니까?”

“대학사 일이관지 소하천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탄성에는 ‘그라면 가능하겠군요’라는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이관지 소하천은 대학사로 이름이 드높았는데 나이는 60대 중반으로 학문에 능하나 무공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정파 사람이나 사파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대했고 사파 사람들도 그를 싫어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라면 가능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표 방주님의 의견에 따라 시행토록 합시다.”

제16장 배신자에 대한 예우

나의 소망이여,

나의 꿈이여,

어디로 가는가.

나는 혈곡의 십대고수가 되고 말 테다.

나는 강호를 진동시키는 고수가 되고 말 테다.

- 구세경

***

구세경에겐 꿈이 있었다.

-세상을 모두 내 발 앞에 무릎 꿇리고 말리라.

그 장대한 야망은 그가 고아로 자란 까닭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고아라는 것과 전혀 상관없을는지도 모른다. 세상엔 수많은 고아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제아무리 정상적인 집안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해도 그런 야심을 갖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는가. 그러니 출생 환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지을 순 없을 것이다.

구세경은 어린 나날을 하루도 쉬지 않고 삶을 원망하며 하늘을 저주하며 보냈다.

왜 자신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는지, 차라리 이렇게 태어날 바에는 갓난아이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으면 더 좋지 않았느냐며 절규했다.

하늘은 그런 구세경을 결코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이 비단 구세경뿐이겠는가. 결코 하늘은 누구라도 함부로 저버리지 않는다. 하늘은 다른 사람이 쉽게 얻지 못할 뛰어난 머리와 자질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 벼슬아치가 될 수도, 뛰어난 무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으며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도, 훌륭한 남편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구세경이 어떤 마음을 먹고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야 했다.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을 극복한다면 세상이 깜짝 놀랄 성공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하늘이 부여하신 것이다.

하지만 구세경은 그 소중함과 감사함을 모르고 원망을 그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았고 훗날에는 훨씬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건만 그는 당장 눈앞에 드러난 현실만을 바라보며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그가 스스로 행운을 잡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백미마군 황태를 만나고부터였다.

황태는 기관학의 고수이며 잡학에 능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탁월해 단번에 구세경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간파했다. 비록 미간 사이에 어려 있는 어두운 기운과 반골상을 보았지만 그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약간의 반골 정신은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구세경이 황태를 따라 백미정으로 들어가 사부로 모시고 배움을 갖게 된 것은 15세가 되어서였다.

백미정은 아직 어리다면 어린 구세경에게 세외의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 하나에까지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백미정은 초라한 생활을 해오던 구세경에겐 환상과도 같았다.

황태는 세상을 등지며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의 선택은 가히 탁월한 것이었다. 모래밭에 물을 뿌리면 순식간에 물이 스며들듯 구세경은 그렇게 황태의 모든 것을 흡수해 갔다.

마냥 배움이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구세경에게 변화가 나타난 것은 그 후 3년이 지나서였다. 구세경은 그때 거의 열흘간을 고열에 시달리며 곧 죽을 것처럼 앓았다. 의술에도 달통한 황태였지만 좀체 치료가 먹히질 않았다.

황태로서는 난감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건 어떤 치료약을 통해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구세경의 고통은 자신의 꿈이 이대로 동결(凍結)되는가에 대한 극한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 그의 꿈은 세상을 발 아래 두는 것이지 않던가.

헌데 그는 뛰어난 사부가 세상의 야망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음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좌절이 밀려든 것이다.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

열흘이 지나면서 천천히 구세경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황태는 드디어 약의 효험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병세의 호전은 곧 배신에 대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서서히 굳혀가면서 점점 좋아진 것이었다.

구세경이 선택한 곳은 혈곡이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부터 구세경은 더욱 열심히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보였고 더욱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생겨난 빈틈을 타고 그는 혈곡과 은밀한 거래를 체결했다.

혈곡에서는 오래전부터 백미마군 황태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기관진식에 있어서 독보적 존재인 까닭에 혈곡의 사람이 된다면 그 힘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닌 수천 수만의 고수를 얻는 힘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황태는 정파에도 사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세상을 도외시한 채 신선처럼 나날을 보내길 바랄 뿐이었다.

가끔 협박도 해보고 절친한 친구인 악풍을 통해 회유도 해봤지만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악풍도 사실 회유라기보다는 그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오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전혀 설득시킬 마음 따윈 없었다. 그들은 진정한 우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구세경이 건넨 뜻밖의 제안은 혈곡으로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구세경은 황태가 목숨처럼 여기는 사대비서를 바치면 혈곡 내 십대고수 반열에 들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로선 인생에 있어 두 번째 행운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구세경은 황태와 악풍을 처치한 후 천보갑을 챙겨 들고 이미 마음에 새겨놓았던 계획대로 차례로 실행에 옮겼다. 그가 앞으로 행할 일들은 모두 잔인한 일들뿐이었다.

그의 잔악한 손속이 이어진 건 백미정의 다섯 하인들에게였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일하는 곳에 있다가 웃는 낯으로 다가온 구세경에게 차례로 맞아죽었다. 그들 중엔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것을 구세경은 낄낄대며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구세경은 조심스럽게 사대비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다시 잔머리를 굴렸다. 이제 천보갑을 얻은 이상 사대비서를 혈곡에 바쳐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것은 나만의 것으로 둔다. 사대비서까지 바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질 않는단 말씀이야.’

그렇게 간악함 속에 또 다른 간악함을 품었다.

사대비서는 혈곡에서조차 탐낼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자모이혼진(子母離魂陣).

한운허강(寒雲虛剛).

벽운태을(碧雲太乙).

천둔장법(天遁掌法).

자모이혼진은 진법에 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된 것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진 모든 진법을 다시금 황태가 자신의 것으로 녹여 재창안한 것들로 구성되어 사대비서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 바로 자모이혼진서였다.

한운허강은 자모이혼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책으로 자모이혼진을 구성함에 있어 그 원론이 되는 이치들을 빼곡히 적어놓은 비서였다.

벽운태을은 진법 외의 기(棋), 서(書), 예(藝), 의(醫)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그중 의(醫)에 대해 상당 부분 할애된 비서였다. 이 벽운태을이야말로 제2의 황태의 인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천둔장법은 유일하게 무공 비급인데 마치 진법을 장법으로 변환시켜 놓은 듯 그 움직임이 표홀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진세 안에서 천둔장법을 펼치면 그 힘의 열 배에 해당하는 위력을 갖게 되는 신비한 장법이었다.

구세경은 이 네 개의 비급을 곱게 갈무리하고서 백미정을 불살랐다. 그토록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던 백미정은 한 야심가에 의해 그렇게 그 광채를 잃어갔다.

백미정을 빠져나온 구세경은 혈곡의 인물들을 만나기 전 몰래 사대비서를 숨겨놓아야만 했다. 나중에 물어본다면 천보갑을 가지고 급하게 나오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천보갑의 명성은 충분히 사대비서에 대한 의문을 씻어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흐하하! 강호여, 이제 이 구세경이 우뚝 설 날을 지켜보아라!”

단천우의 눈이 이글거렸다. 천보갑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수중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구세경이 서 있었다.

“수고가 많았다. 천보갑은 어디에 있느냐?”

단천우는 태연한 척 애썼지만 마음은 크게 들떠 있어 아무도 없다면 마구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으아아아악∼! 이제 천보갑은 내 수중에 들어왔다! 금환신공이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으하하하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천보갑을 받은 후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외쳐야 할 말이다. 어쨌든 지금 혈곡의 곡주로서 채신머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기회를 엿보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하늘이 저를 도와 혈곡으로 오도록 인도한 듯합니다.”

구세경은 머리를 조아리고 품에서 천보갑을 꺼내 건넸다. 단천우는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드디어 천보갑이 수중에 들어왔다. 전 강호가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듯했다.

그때 뒤쪽에 있던 모진호가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단천우에게 속삭였다. 단천우는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다는 표정을 짓고 구세경에게 말했다.

“사대비서는 가지고 왔느냐?”

구세경은 이미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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