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
“하하하, 이미 사부의 기관 장치는 내가 다 멈춰놓았다오. 이젠 그냥 알아서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네놈이 어찌 이런 짓을 자행한단 말이냐!”
구세경은 응대하지 않고 벽의 한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연혼실의 천장으로부터 뿌연 독무가 새어 나왔다. 그런 것이 있다고는 황태조차도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당황한 것은 황태뿐만이 아니었다. 악풍은 일순 노기를 발해 황태를 다그쳤다.
“네놈들이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렷다!”
그는 손을 들어 당장에 황태를 쳐 죽일 심산으로 들끓었다. 친구고 뭣이고가 없었다. 그저 배신감만이 가슴 가득 차 올랐다.
“어서 탈출구를 열어라!”
황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독무를 마시지 않기 위해 호흡을 참고 급히 비밀 통로를 열었다. 그곳은 제자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곳이었다.
“도망가 보시겠다? 하하하……!”
어디를 어떻게 눌렀는지 연혼실의 내부 밑바닥에서 날카로운 창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정확히 황태가 있었던 자리를 뚫고 나와 그만 황태는 꼬챙이에 꿰이듯이 꽂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악풍은 그제야 순전히 제자 놈의 소행이라 여기고 천보갑을 품에 갈무리하고서 열려진 비밀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칠강도가 들려 있었다. 아무리 은밀한 통로라 할지라도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봐, 그쪽으로 가봐야 아무 소용 없다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구세경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을 것이 상상되자 악풍은 치를 떨었다. 만일 황태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그나마 이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순진해 보이던, 황태가 지극히 아끼던 제자의 소행이라니…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악풍이 막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때 발의 압력에 따라 암기가 쏟아지는 자동 장치가 가동되었다. 발의 압력이 적을수록 더욱 많은 암기를 뿜어내도록 되어 있었다.
원래 이 비밀 통로에 기관을 장착한 것은 오래전부터 사부를 죽일 요량으로 만들었었다. 사부 황태는 자신만의 비밀 통로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미 구세경에게 파악되었던 것이다. 사부를 죽인 것은 물론이고 뜻하지 않게 천보갑까지 얻게 된 것이니 구세경으로서는 펄쩍 뛰며 환호를 지를 만한 일이었다.
슈슈슉-
마치 수평으로 비가 내리듯 암기들이 쏟아졌다. 그의 경신술이 거의 독보적인지라 암기의 수효는 형용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보나마나 암기 끝에는 독극물이 발라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제길! 지독한 놈이로군.’
그는 신형을 급격히 이동해 앞으로 나아가 암기를 피했다.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자라면 암기를 피한 그 이후가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고 악풍은 충분히 그걸 예상했다.
타타타당!
암기가 양쪽 벽에 맞아 불꽃을 튀겼다. 그가 암기를 피해 앞으로 쭉 뻗어 발길을 대자 순식간에 바닥이 푹 꺼졌다. 하지만 그는 지면에 닿자마자 지면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었군.’
필시 그대로 떨어지면 밑에는 수많은 철창들이 날을 세우고 기다릴 것이 뻔했다.
그는 푹 꺼져 가는 땅을 살짝 딛는 것만으로 반발력을 만들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제 벽을 차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면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때였다.
치이이잉…….
쇠 갈리는 소리가 거침없이 나며 그가 솟아올랐던 지점의 동굴 벽에서 철륜(鐵輪)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튀어나왔다.
“헉!”
그것이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목을 철륜이 빠르게 회전하며 잘라 버렸다. 잘려진 목이 땅 위를 뒹굴면서 두 다리가 허물어졌다. 아직까지 미세한 감각을 지닌 그의 머리가 마지막으로 의식을 토해냈다.
‘미안하다, 귀영대들이여… 그리고 나의 친구여…….’
얼마 후 구세경이 그 비밀 통로의 기관을 해제하고 악풍의 품에서 천보갑을 꺼내 들었다. 그의 눈은 광기로 물들었다.
“으하하하하! 이제 나는 강호로 간다!”
제12장 묘진의 보고
내가 개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언뜻 보기엔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들이기 때문이지.
말 그대로 멋진 사나이들.
- 표가장에 온 묘진
***
묘진이 천보갑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표가장에 이르게 되었을 때 천보갑의 이동 방향을 따져 보자면 악풍이 백미정을 향하고 있던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강호에 큰일이 없을 때의 표영은 일단 표가장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표영은 두 가지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첫째는 아들 은(恩)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제자 혁성에게 견왕지로를 전수하는 것이었다.
은은 이제 막 첫 번째 생일을 지나 아장아장 걸음을 떼고 응얼응얼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시기였다.
“아바바… 아바바… 무어야?”
타구봉을 가리키면서 정확하게는 ‘아빠, 이건 뭐야?’ 정도가 될 말을 하자 표영이 타구봉을 건네며 말했다.
“응, 이건 타구봉이란다. 자, 아빨 따라 해보렴. 타구봉.”
“타아아… 까르르르∼!”
“허허, 타아아가 아니라 타구봉이래두.”
은은 타구봉을 쥐고 마구 휘두르며 좋아했다. 타구봉은 매우 가벼웠기에 은이 양손으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야야… 야아아아…….”
“어이쿠, 아빠 살려∼ 살려주떼여∼!”
표영은 그 앞에서 맞는 시늉을 해가며 데굴데굴 구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표영은 아들 은과 놀며 새롭게 말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고 틈틈이 제자 혁성에게 견왕지로를 전수했다.
묘진이 표가장에 이르게 되었을 때 혁성은 견왕지로의 2단계 과정인 견치지겁을 수련하고 있었다. 가히 개방 방주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표영에 비하자면 뒤처지는 성취였지만 혁성도 나름대로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묘진이 표가장에 들어선 후 황당함에 빠진 것은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개 우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개 우리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호랑이 대여섯 마리는 한꺼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컸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로선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은 방주님의 애제자가 아니던가?’
개 우리 안에는 총 다섯 마리의 개가 들어가 있고 그 중앙에 놀랍게도 혁성이 드러누워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어느 정도 황당함에 적응해 가는 묘진인지라 그리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놀란 것은 혁성의 온몸을 다섯 마리의 개가 꽉 물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혁성의 다리와 팔, 그리고 허벅지, 옆구리를 개가 문 채 연신 씩씩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허허, 거참…….’
그것만이 아니었다.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혁성은 코까지 드르릉 골며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안 아플까?’
개방 방주의 수제자라는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자리임에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만일 아주 보기 싫은 놈이 있다면 방주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복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여기까지가 전부라면 괴이하고 기이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첫 번째 놀란 것이 개 우리 안의 풍경이었다면 두 번째 놀란 것은 개 우리 곁에서였다.
우리 앞에서는 진지한 얼굴의 두 장로, 즉 능파와 능혼이 쪼그리고 앉아 뭔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는 묘진도 익히 알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흰둥이 진백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묘진은 가까이 다가가 옆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묘진이 두 장로님을 뵙습니다.”
묘진이 다가와 인사를 올리자 능파와 능혼이 일제히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쉬잇∼!”
“쉬잇∼!”
묘진은 엉겁결에 자신도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어눌한 자세를 취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모습이라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자자, 이리 와서 앉아.”
“아, 네네…….”
묘진은 능파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한 명이 더 늘어나 왼쪽부터 진백, 능혼, 능파, 묘진 순서로 나란히 줄을 맞춰 쪼그리고 있게 되었다.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얼 하고 계시던 중인 겁니까?”
묘진이 두 사람을 따라 한참 동안 개 우리를 지켜보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능파가 작은 소리로 답해주었다.
“으음… 저기 거품을 흘리고 있는 두 녀석이 보이지?”
능파의 말에 묘진이 두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저기 저 두 놈 말씀이시죠?”
“그래, 맞아, 저기 두 놈. 저 두 놈이 어제부터 침을 흘리면서 거품을 내더란 말씀이야.”
“네? 거품이요?”
“그래, 거품. 그래서 혹시나 광견병에 걸린 녀석들은 아닌지 파악하고 있는 중이지.”
능파의 말에 묘진이 놀랄 사이도 없이 능혼이 말을 보탰다.
“사실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리게 되면 2단계 견치지겁은 한 달 정도 단축되도록 되어 있단 말씀이야. 이건 아주 대단한 행운이지.”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진백은 여전히 과묵하게 개 우리 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묘진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로선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정상인 것처럼 태연히 내뱉는단 말인가. 이젠 개방의 전설이 되어버린 두 장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진작 패 죽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능파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냐?”
능혼도 걱정해 주었다.
“얼굴이 좋지 않은데?”
묘진은 애써 안색을 평온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프긴요… 하핫… 그럼 저는 방주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조금 있다가 보자구.”
자리에서 일어서는 묘진을 향해 능파와 능혼이 손을 들어주었고 진백도 고개를 돌려 과묵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묘진은 가면서 힐끔 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혁성을 바라보았다. 개에게 얼마나 많이 물렸는지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진짜 불쌍하군. 천선부에서는 이런 괴상한 수련을 쌓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하긴 알 리가 없지. 안다면 당장 데리고 간다고 할걸.’
묘진은 표가장의 가복들에게 표영이 있는 곳을 묻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이르렀다 싶을 때 벌써 웃고 떠드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어흥, 잡아먹고야 말겠다∼!”
“으아아… 까르르르∼ 아 돼… 아 돼…….”
“어흥, 은 잡아라. 어흥.”
“까르르르∼ 살데여…….”
늘 그렇듯 호랑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음이었다.
‘후후, 방주님도 참. 이래서 내가 개방이 좋아진 거 아니겠어.’
절정의 고수라 하여 늘 위엄 어린 모습에 차 있기보다는 소탈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강하고 커 보였다. 게다가 방주의 이런 영향 탓에 개방의 지도부 인사들의 행동 방식이나 사고방식은 괴이쩍고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묘진도 그렇게 돼가고 있는 입장인 것은 물론이다.
내전 앞에 이르러 묘진이 정중히 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묘진이 방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