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6장 (187/199)

 # 186

186.

제10장 가지고 있으나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그림의 떡?

저 멀리 보이는 미녀?

꿈에서 보았던, 꿈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랄 정도의 환상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느끼는 허탈한 상실감보다

나는 지금 수천 배 괴롭다.

- 천보갑을 앞에 둔 악풍

***

악풍이 그리도 끔찍스런 일을 자행한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물론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는 곡주 단천우가 은밀히 불러 천보갑에 대해 말하고 그것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말들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는 법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

그의 마음은 소혼미랑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탐욕이 꿈틀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탐욕은 그녀를 대하는 순간, 그리고 이어 천보갑을 건네받은 순간 폭발적으로 몸의 모든 신경을 자극하며 그에게 살의를 불러일으켰다.

-천보갑이라구. 천보갑을 얻는 데 그까짓 것들의 목숨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악마가 그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래도 그들은 내 제자와 같은 존재들인데…….

-그런 약한 소리 따윈 집어치워. 너는 너 자신을 속이고 있어. 너의 자신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란 말이다.

그는 악마의 외침에 점점 승복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래,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악마가 유혹하는 것은 너무 강렬했어.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양심과 정을 떨쳐 내고 귀영대원들을 죽일 계획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그들을 처리한 후 그의 마음은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후회한다든지, 혹은 그들의 죽음에 연민의 감정을 품는 따윈 거의 없었다. 그보다 지금 그의 마음엔 어서 천보갑을 열고 그 안에 든 천하제일신공이라 불리우는 금환신공을 살펴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록 어쩌면 혈곡의 추적이 벌써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혈곡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추적자였으니 말이다. 물론 혈곡에서 그만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리추혼 모진호.

희풍 갈천극.

온세추렴 풍화.

이들도 전문적인 추적의 달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높이 봐도 동급일 뿐이다. 그들이 흔적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때 악풍은 멀리 사라진 뒤일 것이다. 승산은 충분하다고 판단 내린 터였다.

그런 자신감과 함께 떠오른 것은 곡주 단천우에게 받았던 모욕이었다. 사실 그건 모욕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악풍은 혈곡을 등져야 할 당위성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데 사용했다.

모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나는 분명 천하제일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어떤 조직에서든 하급자들이 욕을 먹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그만큼 악풍이 당한 모욕감이라는 것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신법을 쾌활하게 놀렸다. 목적지는 장기적인 은신처가 아닌 단 하루 정도의 은신처면 충분했다. 아니, 하루도 길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만 몸을 감춰주면 되었다. 천보갑을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비급을 만져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비급을 처음 바라볼 때의 그 설레임, 처음에 만져지는 그 감촉 등을 느끼고 싶었다. 아마도 그는 비급을 꺼내 들고 두 손으로 꼬옥 끌어안을지도 몰랐다. 혹은 볼에 부벼대고 눈을 감으며 그 느낌을 즐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시급히 은신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의 호기심이 어찌나 크던지 조금만 지체된다면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지경이었다.

그의 심장이 터져 나가기 전 그는 다행히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는 발정기에 이른 개처럼 흥분해 동굴 안으로 날뛰듯 들어갔다. 어쩌면 발정난 암캐가 그보다는 얌전한 축에 속할지도 모를 지경으로 그는 흥분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동굴에 박쥐 서너 마리만이 감시하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천보갑을 품에서 꺼냈다. 마치 그 동작은 가슴팍에서 심장이라도 꺼내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동작이었다. 그는 천보갑을 한없이 고결한 생명을 대하듯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천보갑으로 인해 희생된 미랑과 스무 명의 귀영대들의 피가 섞여 있어 아주 추한 눈빛으로 칙칙한 상태였다.

천보갑은 일반적인 비급 두 권 정도를 넣을 수 있을 만큼의 두께와 폭을 갖추었는데 거기엔 어떤 장식도 없었다. 표면은 약간 까칠까칠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투박함이 오히려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아마도 그것이 천보갑이라는 이름과 그런 명성에 어울려졌기에 그런 느낌을 자아냈으리라. 천보갑의 옆면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열쇠 구멍인 것이 확실했다.

‘열쇠로 열 수만 있다면 천보갑을 훼손시키지 않겠지만 이런 껍데기가 무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언뜻 절친한 친구인 백미마군 황태를 떠올렸다. 황태는 기관학의 대가로 은둔자의 생활을 즐기는 그가 천보갑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난 말야, 천보갑에 어떤 것이 들어 있어도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어. 아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겠지만 그런 것들은 내겐 아무 중요한 문제도 아니란 말이네. 오직 내게 소중한 건 천보갑 그 자체야.”

“후후…….”

그로선 그런 황태의 발상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천보갑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희대의 보물이긴 하지만 천보갑만으론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악풍은 실소를 짓고 천보갑을 열기 위해 양손에 힘을 가했다.

“으음…….”

간단히 열릴 것 같던 천보갑은 의외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너무도 간단히 열린다면 어쩌면 맥이 빠졌을 것이다.

“흐흐, 그렇지. 이렇게 쉽게 벌어질 것 같으면 천보갑이 아니겠지. 그럼 좋아.”

그는 이번엔 내공을 불어넣었다. 어줍잖게 3, 4성 정도의 공력을 기울이기엔 그의 마음이 뱉어낸 말과는 달리 다급했다. 그의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면서 전신의 공력이 다 쏟아졌다.

파파파락.

“으으윽…….”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동굴을 울리고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천보갑은 굳게 입을 다물고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개를 잡아 입을 벌리게 하려 할 때면 열릴 듯하면서 다시 닫히곤 하는데, 천보갑은 아예 벌려질 생각조차 없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공력이면 돌도 바스러질 힘이었는데 전혀 작은 틈조차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힘을 다했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는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 영영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으음…….”

그는 스스로 겁이 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짐짓 태연해지려 애썼다. 하지만 불길함을 예상하고 있는 듯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진실로 온 힘을 다했었던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잘라주마.’

그는 천보갑을 땅에 내려놓고 칠강도를 꺼냈다. 날카로운 예기에 검기를 발휘한다면 베어내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도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을 죽이고 그들의 두터운 호신강기를 뚫었는지 모른다. 천보갑이 훼손되어 잘려 나갈 것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순순히 입을 벌리지 않은 탓이니 날 원망하진 말아라.’

“간다!”

쌔액-

그가 도를 휘두르자 도기가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더니 천보갑을 그어갔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그가 살인을 저지를 때, 가장 이상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을 때 상대는 자신이 잘려진 줄도 모르고 있다가 몸을 움직였을 때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경악에 차곤 했다. 그처럼 지금 천보갑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천보갑은 맥없이 그 입을 벌리게 될 것이다.

“흐흐…….”

그는 천보갑을 손으로 들고 가볍게 뜯어내 보았다.

“읍!”

그의 얼굴이 순간 시뻘겋게 변했다. 천보갑은 잘려 나간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 상처 자국조차 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건 순수한 두려움이었다. 아끼는 대원들을 죽이고 혈곡을 등진 대모험을 감행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들의 핏값과 바꾸고 어쩌면 영원히 도망자가 될지도 모를 길을 선택한 그가 아니던가 말이다.

천보갑이 열리지 않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너무도 태연히 천보갑은 그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영영토록 그냥 저렇게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솟았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기엔 그가 저지른 일이 너무도 컸고 가능성은 더 있어 보였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그는 마음에 몰려드는 두려움을 물리치려 크게 외쳤지만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소리는 점점 작아지면서 그의 마음의 두려움을 돌려주었다. 그는 다시금 칠강도를 들고 미친 듯이 천보갑을 내려쳤다.

챙! 챙! 챙! 챙!

천보갑이 아니라 맨바닥을 치는 경우도 생길 만큼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열심히 도를 휘둘렀다. 자칫 방심하면 적의 검이 목을 꿰뚫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천보갑은 대단한 고수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천보갑 안에 든 금환신공을 사이에 두고 애정 행각을 벌이다 결국 주먹다짐에 이어 칼부림이 나는 그런 삼각 관계처럼 보였다.

얼마나 내려쳤을까. 족히 백 회는 넘었으리라.

“헉헉헉헉…….”

어지간한 동작에도 숨이 가쁘지 않을 악풍이었지만 워낙 흥분한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손에 들린 칠강도의 중간에 칼날이 살짝 먹어 들어간 것을 보았다. 천보갑을 훼손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로 보호된 칠강도가 흠집이 난 것이다. 더 이상 손을 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멍한 눈동자로 공간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무슨 방법이 없는 것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 힘을 다해보았지만 도무지 열리지 않는 천보갑은 마치 오비원을 대하고 있는 듯했다.

‘오비원과 싸운다면 난 이런 절망감에 사로잡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금환신공을 갖고 싶었다. 그의 열망은 배고픈 사람이 그림의 떡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고 벌거벗은 미녀를 앞에 두고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의 욕정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보다 수천 배 수만 배는 더 간절했다. 온몸의 털이, 심지어 솜털까지도 다 빠져 버리고 모든 신경을 일시에 자극하는 것 같은 간절함이었다.

그때 무엇이 떠오른 건지 삽시간에 그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