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5장 (186/199)

 # 185

185.

귀영대들은 귀를 기울이다가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한 한편 싸늘해졌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혼미랑으로부터 천보갑을 빼앗은 후 그들은 각기 마음속에 한번 정도씩은 상상을 했었다.

‘저 금환신공을 내가 익힐 수만 있다면…….’

‘한번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구나.’

‘천하제일고수라… 천하제일고수…….’

이런 욕구로 인해 뜨끔했고 또 싸늘해진 것이다. 대원들 중 누군가가 천보갑에 대해 욕심을 품고 칼부림할지도 몰랐고 암습을 가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번 마음이 치우치면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이 돼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들은 이제껏 서로를 신뢰하며 함께 생사를 같이해 왔다. 하지만 이제 중원 최고의 비급이며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게 해줄 천보갑 앞에서 신뢰는 경계심으로 바뀌고 탄탄하게 이어지던 의리의 끈은 너덜거리며 잘려 나간 것만 같았다.

악풍의 말이 이어졌다.

“강호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수들도 가득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마천이 멸망한 것을 너희는 기억하느냐?”

그것은 굳이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니었다. 마천의 고수들이 단 하루 만에 몰살당해 버린 그 일은 혈곡에서도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거기에 새겨진 ‘천외천’이라는 조직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하늘 밖의 하늘,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뜻처럼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혈곡이 알고 있는 상식 속에서 마천을 단 하루 만에, 그것도 강시들까지 쓸어버릴 곳은 중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거나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신(神)이 등장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혈곡에 발을 디딜 때까지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부터 귀영대 전원은 천보갑에 대해 일체 말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겠다. 실수로라도 천보갑을 들먹거리는 사람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명심하라.”

“네.”

마치 한 사람이 소리를 내듯 귀영대원 이십 인이 일제히 작지만 절도있게 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부터는 가까이에 있는 서로를 절대 믿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하라. 은연중에 힘을 규합하여 천보갑을 탈취하고자 하는 자를 발견하는 자에겐 곡에 들어가 크게 포상하도록 하겠다.”

악풍의 이 말이 떨어짐으로 인해 간신히 남아 서로를 지탱해 주던 믿음의 끈은 확실히 끊어져 버렸다. 서로를 지켜주던 동료에서 이젠 서로가 감시해야 할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대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길 귀영대 일곱이 연합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버거울 것이라 했다. 비록 스치듯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 아니지.’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던 우리가 아니냔 말이다.’

‘내가 생각할 땐 1호가 제일 가능성이 높아. 그는 우리들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나고 그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 않은가.’

‘1호와 7호, 그리고 11호가 요주의 인물이 되겠군.’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 보며 더욱 신중해졌다.

“일단 우리의 목표는 곡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움직이기엔 걸리적거리는 바가 없지 않으니 세 덩이로 나누어 가도록 하겠다. 6호부터 15호까지는 나와 함께 중앙에 위치하여 이동하도록 하고, 1호와 5호는 후미를 맡고, 16호와 20호까지는 선두를 맡도록. 간격은 항상 해오던 대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런 대형은 여러 차례 다른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도 사용했던 것이라 그리 의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귀영대원 모두는 대주 악풍이 힘을 분산시켜 내부의 세력화를 제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세 덩이의 간격은 신법으로 약 일 다경(15분) 정도의 간격을 두는 것을 기본으로 해왔었다. 그리고 한 시진(2시간)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자, 그럼 각기 위치로 가도록 하라.”

선두와 후미를 맡은 이들이 재빨리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9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이 스친 것이다.

‘왜 이리 마음이 혼란스럽지?’

그는 생애 지금처럼 불안한 적이 없었다.

악풍은 일 다경이 지나자 10인의 수하들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는데 점차 어둠이 짙게 밀려들고 있었다.

암암리에 약속된 시간이 되어 악풍은 잠시 휴식을 명했다. 밤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달빛이 환히 비춰주고 있는 까닭에 주위는 그리 어둡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악풍은 나무에 기대고 약간은 느긋한 자세를 취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엔 대원들이 어지러이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각기 살펴야 할 위치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비록 계속되는 이동으로 피곤이 몰려든 건 사실이었지만 긴장을 풀기엔 지금 이 사안이 너무 중요했다.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편히 쉬라고 해도 결코 편히 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악풍이 허리춤에서 물병을 열고 목을 축이려다 물이 하나도 남지 않음을 보고 가까이에 자리한 8호에게 말했다.

“8호, 물이 남았느냐?”

“저도 물이 없습니다만…….”

그 뒤에 있던 11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물병을 악풍에게 전했다.

“제게 조금 남았습니다.”

악풍이 받아 들어보니 딱 한 모금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아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는 물병을 다시 11호에게 건네주고 모두에게 말했다.

“됐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물이 있으니 그곳에서 물을 보충하도록 하자.”

11호가 멋쩍게 물병을 받아 들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그런 악풍의 말에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악풍을 좋아했다. 악풍이 잔인할 때는 끔찍스러우리만큼 잔인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귀영대의 특성상 배신자들을 척결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악풍이 보여준 면모는 살 떨리는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악풍과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만일 적으로 만난다면?’

그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일행은 악풍의 인도에 따라 우물가에 이르렀다.

“일단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물병에 물을 보충하도록 하라.”

현 상황에서 물은 필수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객점을 이용한다거나 야생 동물을 잡는 것도 현재로썬 위험한 일이었다. 아직 아무런 장애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천보갑은 이 정도 정성을 기울일 만한 것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마른 고기와 함께 물은 중요한 식량이 되는 셈이었다.

각자는 목을 축이고 물통에 물을 채워 넣었다. 물이 목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슴에 시원한 감촉이 퍼졌다. 이 순간만큼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듯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들의 눈은 ‘그래, 우린 하나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기분을 살려 다시금 신형을 날려 길을 떠났다. 환한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밤길을 관통하는 그들의 동작은 낮보다 더욱 빠르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대략 우물가를 떠난 지 약 일 식경(30분) 정도가 되었을까.

풀썩. 풀썩.

악풍을 뒤따르던 귀영대원들 두 명 9호와 13호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으윽……!”

그들은 고통스러운지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급히 근처에 있던 대원들이 그들의 상세를 살폈고 나머지는 암습자에 대비해 진형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의 의도일 뿐이었다.

“욱……!”

“어억!”

그들조차도 9호와 13호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총 10명 중 8명이 쓰러지고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7호와 11호뿐이었다. 둘은 순간적으로 ‘독’에 당했음을 감지했다.

“우물물?”

이 두 사람은 물통에 남아 있던 물을 마시고 우물물을 담기만 했을 뿐 마시지 않은 터였다.

“대주님!”

그들은 악풍를 바라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도 몸을 비칠거리며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으윽! 도대체 누가…….”

7호가 황급히 달려가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악풍을 부축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악풍의 눈이 한순간 빛나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불쑥 7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건 말 그대로 파고든 것이었다.

7호는 자신의 심장 쪽을 뚫고 들어온 악풍의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서서히 의식의 끈이 끊어져 가며 비릿하게 웃는 악풍의 미소를 보았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세상의 그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제쳐 두고 그런 잔인하고 욕망에 찬 눈빛을 보며 죽는다는 것은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악풍은 7호의 가슴에서 손을 쑥 잡아 뽑아 피가 철철 묻어난 손을 옷에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11호는 너무 놀라 분노해야 한다는 것 마저 잊어버렸다.

“왜, 왜 그래야 했습니까?! 천보갑 때문인 겁니까?!”

그는 아무리 혈곡이 사파라 해도 의리를 믿었다. 하지만 이게 무어란 말인가.

용서를 구해야 할 악풍은 눈을 이글거리며 오히려 분노를 토했다.

“내가 천보갑을 입에 올리면 죽게 된다고 했지 않더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천보갑을 얻기 위해 수하들을 독살하고 수하의 피를 묻힌 사람이 누굴 탓한단 말인가. 11호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진지하게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때 악풍은 어느새 칠강도를 빼 들고 11호를 향해 짓쳐들었다. 칠강도는 칼등 부분이 초생달 모양처럼 파인 그의 독문병기였다. 칠강도가 11호의 허리를 수평으로 베어갈 상황에 놓였지만 11호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슉-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11호를 향해 칠강도는 멈출 줄 모르고 뻗으며 허리를 베어갔다. 아무런 저항도 없던 11호는 칼이 몸을 쓸어가기 직전, 악풍이 옆으로 지나갈 그때 처연한 한마디를 남기고 허리가 두 동강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몸이 반 토막나며 사라졌지만 그의 음성은 악풍의 귀에 꽂혀 아른거렸다.

“개자식!”

확실히 그는 개자식이라고 했다. 11호는 이 말만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거의 20여 년 넘게 생사를 같이했던 그들이었다. 악풍을 스승처럼 모시며 믿고 따랐었다. 하지만 천보갑을 얻기 위해서 그는 가차없이 수하의 목숨을 앗은 것이다.

그는 진실로 ‘개자식’이었다.

악풍은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지는 11호를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래, 나는 개자식이다. 내가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개자식이라는 말을 기꺼이 감수해 주마. 마음대로 지껄여라.”

그는 이윽고 품에서 노란 병을 꺼내 죽은 열 명의 수하들의 몸에 액체를 뿌렸다. 그러자 곧바로 그들의 몸은 ‘프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액체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좋아, 이제 나머지들도 없애주어야겠지.”

그의 신형은 선두를 달리고 있을 수하들에게 향했고 그의 목과 가슴 부근의 옷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건 11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으허억……!”

거친 신음 소리에 놀라 앞서 가던 귀영대의 16호부터 20호까지가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휴식 중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그들은 피에 젖은 악풍을 발견하고 모두들 경악스런 얼굴로 변해 그를 부축했다.

“이게 누구의 짓입니까?”

“어떻게…….”

악풍이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머지는 모두… 모두 죽었다. 나를 업고 어서 일단 이곳을 피해… 엄청난 고수가… 뒤에…….”

그들은 악풍 대주가 이런 상처를 입을 정도면 피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어줍잖게 덤볐다가는 모두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다.

17호가 악풍을 업고 옆길로 빠져 달려갔다. 악풍은 업힌 상태에서 ‘히죽’ 하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보았다면 17호는 공포에 영원히 사로잡힐지 몰랐다. 악풍은 손을 뻗어 17호의 머리를 내려쳤다.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17호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악풍도 함께 쓰러졌다. 그 소리에 나머지 대원들은 암습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악풍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사방을 점하고 뒷걸음치며 모여들었다. 악풍의 눈에는 등을 보이고 모여드는 수하들이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크크. 그래, 죽여주마.’

악풍은 삽시간에 도를 휘둘러 네 명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누가 죽인 것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죽었다.

“크크큭… 바보 같은 녀석들.”

그는 그동안 아껴왔던 수하들을 미련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제 후발대 녀석들만 남았군.”

그들을 없애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누구도 이들처럼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