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4장 (185/199)

 # 184

184.

“소혼미랑, 조금 늦었구나.”

목을 너무 급격히 많이 사용한 사람마냥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너는 누구냐?’ 따위의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이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만리추종 악풍, 귀영대의 지도자.’

급히 정지한 미랑에게 앞으로 나아갈 기회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굳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눈 한번 깜박이는 시간조차 소중했다. 그녀는 멈칫했지만 다시 신형을 뽑아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슈슈- 슈슉-

하지만 그녀가 막 몸을 빼내려는 그 찰나 열여덟 개의 파란 회오리가 정확히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그녀를 이곳으로 몰고 온 귀영대들이었다. 그들의 위치는 중앙 쪽에 악풍과 미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도주는 무의미해져 버렸다.

그녀의 가슴으로 절망이 사신처럼 찾아들었다. 역용한 탓에 실제 안색이 보이지 않았을 뿐 지금 미랑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결국 여기서 끝나는가.’

이미 만리추종의 눈앞에 이르른 이상, 그리고 귀영대가 모두 모여 있는 이상 도주나 대항 따윈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옳았다.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 ‘협상’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은 희망일 뿐이었다.

혈곡, 그리고 그 안의 귀영대라는 이름과 협상은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음정(音程)이었다. 서로 반대쪽을 향해 달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멀어질지언정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몰아쉰 후 오른손을 턱 밑에 대고 전체를 쭉 그어 올리듯 손을 머리 위까지 치켜 올렸다. 그러자 연약해 보이는 노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출중한 미를 지닌 본래의 모습만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두려움에 파리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미랑이 굳이 역용을 버린 것은 그의 목숨을 좌우할 이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마음을 변하게 하는 중요 요소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리추종 악풍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미혹에 빠지지 않으려 스스로를 경계하는 마음으로 찡그린 것인지, 아니면 미모 따위로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려 함에 기분이 상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찡그림이었다.

그의 얼굴은 특이하게 생긴 부분은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매우 특이했다. 눈, 코, 입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묘하게도 성격적으로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꼼꼼함과 예리함이 묻어나는 그런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인상을 논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허튼 계략을 꾸미길 포기할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천보갑을 내놓아라.”

차가운 얼굴은 그대로 둔 채 입술만 달싹거렸고 다시금 쉰 듯한 음성이 나왔다.

천보갑을 내놓아라.

지금 이 순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악풍에게도, 귀영대원들에게도, 그리고 미랑에게도 중요했다. 천보갑은 목숨이었다. 잠시의 정적이 1년이 지난 듯한 긴장 속에서 악풍이 말을 이었다.

“간단히 한 번만 설명하겠다. 귀를 열고 들어라.”

“…….”

“네가 얼마나 시간을 끄느냐에 따라 얼마만큼 고통스럽게 죽을지가 결정난다. 이왕 죽을 바에야 편하게 죽는 쪽으로 지혜로운 선택을 하길 바란다. 단번에 천보갑을 건넨다면 내 특별히 너에게 고통없이 죽는 영광을 안겨주겠다.”

악풍은 영광 운운하는 부분에서는 거의 특별 대우라도 된 듯 ‘영광’ 이 두 글자를 조금 힘주어 말했다. 그 모습은 언뜻 벼슬을 하사하는 황제의 권세처럼 보였다.

미랑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평상시대로 침을 삼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의식해서인지 오히려 침을 삼키기 곤란해져 악풍의 말이 끝난 후에야 그녀는 침을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소리치고 입을 열었다.

“후후,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천보갑은 곧 생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아는데 어찌 아무 곳에나 두었겠습니까? 만일 목숨을 보장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저와 함께 천보갑은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귀영대의 악풍님께서 허언을 하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미랑은 애써 두려움을 감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로선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그녀의 이 말로 인해 고통없이 죽는 영광(?)은 사라진 셈이었다.

“하하하, 거래를 하자는 것이군.”

악풍의 반응은 곧바로 나왔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의외여서 기쁜 듯 크게 웃었다.

“뜻밖의 대답이군. 내 권태스러운 마음을 일깨우는 기쁜 발언이야. 머리가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생각해야지. 아무렴.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내가 어떻게 보장해 주면 천보갑에 대해 말할까?”

악풍의 반응으로 보아 미랑의 도박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악풍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좋은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악성이 미랑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헉……!”

그녀의 표정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고 진정한 절망이 엄습했다.

‘어, 어떻게……!’

그녀의 몸은 이미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손목에, 왼쪽 가슴에, 허벅지 쪽에서 뜨끔한 충격이 전해지더니 삽시간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온 천지가 흑암으로 물들었다.

마비의 원인은 악풍이 소리도 흔적도 없이 날린 세 개의 섬전침 때문이었다. 적이 가까운 위치에 있을 때 소리와 -또 워낙 가는 까닭에- 형체도 없이 침이 날아드는 것으로 혈을 제압할 때 사용되는 악풍만의 암기술이었다.

악풍은 자신이 제안한 영광된 죽음을 거부하자 거래를 하는 것처럼 말해 미랑의 마음에 작은 빈틈을 만들어놓았고 섬전침으로 제압한 것이다.

그가 염려한 것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결을 하게 되면 천보갑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것이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게다가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군.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걸? 대체로 간덩이가 작은 녀석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거든.”

소혼미랑은 두려움에 젖어 몸을 미세하게 떨었고, 온 얼굴에는 눈물과 땀이 어느덧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발톱과 손톱이 뽑힐 것이다. 그 정도는 이를 악물지 않아도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다.

온몸의 뼈를 자근자근 부러뜨릴 것이다.

자신의 팔이 절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죽기 전에 아름다운 얼굴에 온갖 칼자국을 남겨놓을 것이다. 또 그것을 잔인하게도 거울을 들이대며 보게 할 것이다.

한쪽 눈을 뽑고 햇빛을 바라보게 할지도 모른다.

일 식경 뒤엔 나머지 눈도 뽑을 것이다.

이 모든 것보다 더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느닷없이 맹공효의 음성이 떠올랐다.

“천보갑 따윈 당신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하.”

천보갑을 얻기 위해 그를 죽였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천보갑보다 자신을 아껴주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고 또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그대만이…….’

하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후회하는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평생 악풍님의 몸종이 되어 살겠습니다.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거의 울먹이다시피 그녀는 다시 도리질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만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어느덧 귀신처럼 다가온 악풍의 눈앞에 놓였다. 그는 저승사자였다. 아니, 저승사자보다 몇백 배는 더 무서운 존재-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만일 있다면-였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건 참 서글픈 일이지. 마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말이야.”

그때였다.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이십 인으로 구성된 귀영대 중에서 천보갑을 찾으라 보냈던 3호와 7호가 옆으로 내려앉았다.

“천보갑을 찾았습니다.”

또렷하게 전해오는 그 말은 미랑을 향한 사형 선고였다.

“사과 궤짝 밑에 이중으로 나무를 대고 그곳에 숨겨놓은 걸 발견했습니다.”

악풍의 눈빛이 천보갑에 꽂히며 반짝였다. 천하제일고수의 마지막 유품이 담긴 천보갑이 눈앞에 이른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금환신공이었다.

악풍은 다시금 냉막한 시선으로 돌아가 천보갑을 받아 들었다.

“수고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미랑 쪽으로 향했다.

“소혼미랑, 너는 더 이상 가치가 없겠구나. 물론 지금 찾지 못했다고 해서 너의 처지가 좋아질 리는 만무하지만 말이다.”

“용서하십시오. 부디… 용서를…….”

“좀 시끄럽군.”

악풍이 소매를 스윽 들었다 놓자 아혈까지 찍혀 버린 미랑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도살꾼 앞에 놓인 소처럼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악풍은 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약병을 꺼냈다. 거기엔 아무 글자도 써 있지 않았지만 미랑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놀람에 겨워 눈물 흘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지, 진초화골산이라니……!’

그렇다. 진초화골산이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진초화골산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아혈이 찍히기 전에 혀를 깨물고 죽지 않은 것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악풍이 다정하게 말했다.

“두 발에 발라놓을 테니 네가 알아서 적당히 썩고 적당히 죽도록 하거라. 원래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악풍은 옆집 할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려 주며 슬픔을 위로해 주는 듯한 목소리로 끔찍한 소리를 태연히 내뱉었다. 소혼미랑은 이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공포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악풍이 병마개를 열어 그녀의 양발에 각기 서너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러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타 들어가는 듯 연기가 솟아올랐다. 악풍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미랑은 극심한 고통에 눈을 까뒤집고 입으로는 거품을 물었다.

“아… 악……!”

아혈이 짚인 상태에서도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또 마혈이 찍혀 움직이지 못할 텐데도 조금씩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녀의 몸은 지금 발부터 시작해서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건 하루 동안 진행되며 온몸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끝내는 녹아버릴 것이었다.

악풍은 그녀를 발로 걷어차 숲 속으로 처넣었다.

“잘 가라, 흙덩어리. 하하하…….”

그녀가 수풀 속에 처박혀 고통스러워할 때 악풍과 귀영대는 신법을 전개해 그곳을 떠났다. 미랑만이 그곳에 외롭게 남아 썩어갔다.

제9장 견물생심(見物生心)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가, 인생이여!

보물을 얻는다 하여 마음이 채워짐인가?

만일 어떤 보물이 있어 천 년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치자,

그걸 얻기 위해 수천 명을 죽였다고 치자,

그의 천 년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 일이관지 소하천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악풍과 귀영대는 소혼미랑을 제거한 후 약 두 시진(4시간 정도) 동안을 쉼없이 혈곡을 향해 달려갔다. 그 시간 동안에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일단은 천보갑을 탈취했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진 않았다고 해도 세상일이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추적에 있어서 최고인 귀영대였기에 그들은 자만과 교만에 빠지면 결국에는 패망으로 치달을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천보갑과 그 안에 든 비급이 갖는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자칫 전 강호에 피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터질 듯한 긴장 속에 달려왔던 두 시진이 지난 다음에 대주 악풍은 귀영대원들을 잠시 쉬게 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에 봐오던 대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귀영대원들에게 악풍은 대주이기 이전에 사부였다. 그에게 귀영대원이 되기에 필요한 모든 힘을 전수받은 것이다. 그들은 늘 삼 푼의 여유를 지니고 있던 대주가 이렇게 긴장하는 것을 오늘 처음 보았다.

“너희는 혈곡으로 돌아가기까지 결코 긴장을 늦춰선 안 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다. 소혼미랑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도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맹공효는 암계에 걸려 허무하게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강호에 천보갑에 대한 소식이 유출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외부인의 위험이 될 수도 있고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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